소설 77

요리코를 위해

“하지만 당장 써야 할 소설 마감이 코앞이라고요.” “그런 건 개나 줘버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용을 써봐야 아무 소용 없어. 억지로 매수만 늘린다고 좋은 글이 나올 거 같냐?” “인간이란 종종 가까이 이웃한 누군가에게 모든 죄업을 뒤집어씌우곤 합니다. 때론 거기서부터 비극이 태어나죠. 니시무라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진정으로 증오해야 할 적을 잃어버리고 손이 닿는 곳에서 증오의 표적을 정해버린 겁니다. 증오란 결코 이성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남의 괴로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친절한 사람이라도 동정에는 한도가 있기 마련이라고. 니시무라가 내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말로 이해할지 모르겠네요. 아니, 이건 아니다. 근거 없는 상..

한밤의 도서관 2020.06.22

실버 로드

“죽음에는 어딘가 짜증나는 면이 있어요. 내면에서부터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참전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런 경고를 해주지 않았죠. 죽음을 직접 보면 어떻게 되는지, 죽음을 대면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죽음이 날 조종하고, 내 일부가 된다는 걸요.” “그걸 알았다면 참전 안 했을까요?” “제 경험상 잘 웃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더군요.” “무슨 말이죠?” “아무 이유 없이 웃고 미소로 상대를 속이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악하더군요.” “명심하죠.” 과거를 떨쳐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쉬운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나 상대의 추악한 면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아. 불가피한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 하지.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때를 놓..

한밤의 도서관 2020.06.15

펭귄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노력하지 않으면 꿈은 이룰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저히 이루기 힘든 꿈이 있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럼 혼혈이구나. 그런데 혼혈인 건 둘째 치고, 전학을 오자마자 이런 식의 자기소개를 하다니 앞으로 여러모로 고생할 것 같다. 그래도 얼굴은 예쁘니 잘하면 이 무례한 태도는 쉽게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젯밤에 미리 취사 예약을 해놓은 전기밥솥의 뚜껑을 열자 뜨끈한 김과 함께 갓 지은 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아침밥을 먹을고 하는 게 아니다. 도시락을 만들려는 것이다. 더보기 펭귄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ペンギンは空を見上げる(2018) [트위터책빙고 2020] 15. 표지에 펭귄이 있는 책 + 주인공 사쿠라 하루,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하는데 ..

한밤의 도서관 2020.06.09

늑대의 왕

조수들이 다시 나와 사형수를 묶었다. 회스가 손에 침을 뱉고 도끼를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사형수의 손목에 내리찍자 쩍 소리를 내며 손목이 댕강 잘렸다. 사형수가 고통으로 울부짖는 가운데 조수가 진흙탕에 나뒹구는 손을 집어 들더니 군중을 향해 던져주었다. 참수당한 자의 손가락과 손을 가지고 있으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었다. 특히 엄지손가락은 도둑이 가지고 있으면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인기가 많았는데 이 도시에는 도둑이 수도 없이 많았고 다들 미신을 믿었다. 손을 서로 갖겠다고 씨름하던 부랑아들 중 이긴 자가 이 손을 가져가서 토막내어 팔게 될 터였다. "아마 죽음은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오나 봅니다. 제가 마주한 죽음은 검은 아가리를 벌린 텅 빈 심연이었습니다. 죽음이 저를 삼키는 순간, 저는 ..

한밤의 도서관 2020.06.04

미안하다고 말해

“저희 수사본부입니다. 어떻습니까, 교수님?” “독특한데요.” “일부러 가족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봤습니다. 같이 마시고, 같이 먹고. 누구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솔직히 고백하고, 의문 제기도 부담 없이 할 수 있죠. 저희 팀은 영국 최고의 사건 해결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당신들 어머니가 아주 자랑스러워하시겠군. 나는 생각한다. 경감의 건방진 태도가 무척 거슬린다. “성공한 사이코패스라는 이 개념은 의료계에서 자주 잊히거나 무시당합니다. 우리는 사회 주변부를 맴도는 이들만을 연구할 뿐입니다. 중퇴자와 성취도 낮은 사람들. 지적 능력과 야망이 부족한 사람들. 우리들 틈으로 완벽히 파고든 사이코패스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

한밤의 도서관 2020.05.25

사라진 세계

어렸을 때 모스는 어머니가 그저 술만 마시는 망가져버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녀 또한 상처를 받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누구든지 성인이 되면 똑같은 수렁에 빠지고, 그렇게 상처를 받고 나면 타인의 상처를 더 쉽게 알아보는 법이다. 블랙 베일에서 교관은 우리에게 아득한 시간의 수수께끼를 가르쳤다. 시공간 마디와 닫힌 시간꼴 곡선이라고 하는 드문 순간에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며, 미래 또한 오로지 가능한 미래로만 여행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우리가 IFT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동안, 현재의 현실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 말은 곧 IFT의 현실은 오직 관찰자만의 현실이란 얘기였다. 객관적인 현실이 될 수 없다. 오직 우리가 살고 있는 현..

한밤의 도서관 2020.05.05

아가미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 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 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보통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세상 모두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요? 안 그래요 곤은 자기가 한 말이 뜻하지 않게 그녀가 개인적으로 달래고 있을지 모를 환부를 성급히 일반화하거나 폄하하는 것으로 들렸을 법도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정도 부연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면 책장을 덮는 것 외에 더 당연한 순서란 없었다. 더보기 아가미 (초판 2011) 리디북스에서 1,900원 대여한 책. 나님은 정신 차려라. 표지 디자인에 혹 하고 그러는 것 아니야. [파과]도 재밌게 읽은 것 ..

한밤의 도서관 2020.05.03

디오게네스 변주곡

란유웨이는 그녀에 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 집 유리창은 불투명 유리로 바꾸면서 인터넷에는 사적인 정보를 마구 공개한다. 란유웨이는 늘 그런 모순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中 "창작을 위해 살인을 한다니, 누가 그런 범행 동기를 믿어주겠나? 언론이든 경찰이든 자기들이 생각할 때 말이 되는 동기만 찾을 뿐이야. 그래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고 보고서도 쉽게 통과되니까. 요즘 시대는 말이지, 아무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어."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 中 나는 영화를 볼 때도 미리 시놉시스를 읽지 않는다. 배경지식 없이 보다가 깜짝 놀라는 쪽이 좋다. -숨어있는 X 中 더보기 디오게네스 변주곡 第歐根尼變奏曲(2019) [트위터책빙고 2020] 2..

한밤의 도서관 2020.05.02

사랑 없는 세계

후지마루는 샤워를 하고 미리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둔 보리차를 마셨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다고 자평하며, 다다미 여섯 장 짜리 방에 이불을 깔고 타월 이불을 배에 올리고 드러눕는다. 알람을 해놔야지, 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보니 친구에게 온 라인(LINE)이나 문자는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난 외롭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덮쳐오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다. 후지마루는 멍하니 생각한다. 배룰 채우는 것은 한때의 일. 맛있고 영양 밸런스가 잡힌 요리를 아무리 먹어도 결국 언젠가는 죽으니까. 아니, 그렇게 말한다면 어떤 행위도 다 무의미하다. 나도, 대장도, 혼고 대로를 걷는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좋은 일을 해도, 나쁜 일을 해도, 언젠가는 모두 과거가 된다. 미안해요, ..

한밤의 도서관 2020.04.24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정신을 차려 보니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자신이 있었다. 환갑을 넘긴 남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쑥스럽지만, 문득 외로워서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인간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고독을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쁜 나날에 가려져 있던 고독이란 놈은 한가해지는 순간 빠끔히 고개를 내미는 모양이다. 대일본석유회사에서도 출산을 계기로 회사를 그만둔 여직원은 많았다. 다들 아이를 키우고 가사노동에 전념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이처럼 이전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여자도 있는 걸까. "역시 여자는 파트타임 정도가 고작일까." "아버지 잠깐만, 마이 앞에서 그런 소리 절대 하지마." 인간관계라는 건 원래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단란한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려면..

한밤의 도서관 2020.04.15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나처럼 나이들어 몸은 망가졌지만 정신은 멀쩡한 인간이 되면 말이지." 그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혼자일 때 고통을 덜 느껴. 다른 노인네들을 보고 있으면 병들고 망가진 자기 모습이 떠오르니까." 책 읽기는 신성한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꾹 참는다. 그러면 매번 효과를 보는데, 소리 내어 책을 읽는 동안 나를 옭아매고 있던 모든 매듭들이 조금씩 조금씩 풀린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 폭군이 나에게 가하는 그 모든 모욕들이 하나하나 지워진다. 낭독이 끝날 때쯤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화가 모두 사라진다. 예를 들어 네가 서점을 운영한다고 치자. 너는 다른 누구보다 먼저 신간을 읽지. 그런데 남들보다 먼저 읽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결정하는 건 시건방진 짓이야. 책은 우..

한밤의 도서관 2020.04.13

여름의 책

"사랑은 참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사랑은 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정말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계속 사랑해야지." 소피아가 위협하듯이 말했다. "더욱더 많이 사랑해야지." "난 좀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날이 좋으면 짜증이 나는 거 같아."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건 네 할아버지하고 똑같구나. 할아버지도 폭풍을 좋아했지." 하지만 소피아는 할머니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가 버렸다. 여름이 깊어 밤이 꽤 길어진 지 오래여서, 잠에서 깬 소피아는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새 한 마리가 협곡 위를 날아가며 먼저 가까운 곳에서, 이어서 멀리서 울었다. 평화로운 밤이었고, 바다 소리가 들렸다. 협곡을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치 무언가 움직이..

한밤의 도서관 202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