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78

별이 총총

처음 먹은 맛이 그리워질 정도가 되면 그때는 손을 내밀기도 귀찮아진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싫증이 난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된다. 사랑도 유효 기한이 있는 것이고, 그리 오래 이어지는 게 아니다. 기간 한정. -나 홀로 왈츠 中 외둥이는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아이가 주렁주렁 많았다. 아이가 셋이면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진다나 뭐라나, 아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하곤 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건 서로 마찬가지 아닌가. 그도 저도 시간이 지나 한바탕 상처를 입은 뒤에야 깨달은 일이었다. 둘씩 셋씩 낳아봤자 하나라도 비뚤어져서 말썽을 부리면 그걸로 모든 게 끝장이다. 자식 농사에 2승 1패 같은 건 없지 않은가. 하나라도 똑똑하고 반듯하게 키워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바닷가의..

한밤의 도서관 2019.08.16

인생의 베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니까요.” 그녀가 되풀이했다. “들었소” 그는 애정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빈정거릴 의도는 없었군. 다만 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 대꾸를 안 한 것뿐이었어. 하지만 할 말이 없다고 말을 안 한다면 인류는 머지않아 언어 사용 능력을 잃지 않겠는가. 키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건 그에게 지루한 일이었다. 그리고 부끄럽고 불편했다. 게다가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그는 독서를 좋아했지만 그가 읽는 책들은 키티에게 매우 따분하게 보였다. 마지막 선을 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과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만한 환상적인 변화는 도..

한밤의 도서관 2019.06.26

82년생 김지영

“은영 아빠가 나 고생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둘이 고생하는 거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혼자 이 집안 떠메고 있는 것처럼 앓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러라고 한 사람도 없고, 솔직히, 그러고 있지도 않잖아.” 어린 여공들은 직장 생활이 원래 그런 건 줄 알고 제대로 잠도 못자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일만 했다. 방직기계가 내뿜는 열기 때문에 덥다 못해 미칠 지경이었고, 안 그래도 짧은 스커트를 최대한 걷어 올리고 일을 해도 팔꿈치와 허벅지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뿌옇게 먼지가 날려 폐병을 얻는 이들도 많았다. 잠 깨는 약을 수시로 삼켜 가며 누런 얼굴로 밤낮없이 일해서 받은 터무니없이 적은 돈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아들이 집안을 ..

한밤의 도서관 2019.06.21

메리 수를 죽이고

어쩌면 성장이란 시간의 흐름이 가져오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中 지진과 쓰나미의 영향으로 노심이 융해된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쏟아져 나왔다. 눈에도 보이지 않고,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막연하고 어렴풋한 불안을 끌어안은 채로, 뭐 괜찮겠지, 하고 암시를 걸며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경계란 항상 모호해요. 각자 자기만의 현실 인식에 따라 믿는 것을 스스로 정의해갈 수밖에 없죠.” - 트랜스시버 中 “전자서적 시대에도 소설 퇴고는 종이로 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편이 머리에 잘 들어오거든. 텍스트 데이터로만 된 소설이라니 육체가 없는 인간하고 비슷하지 않아? 그건 작..

한밤의 도서관 2019.03.21

그대 눈동자에 건배

공장은 작년 가을부터 문을 닫은 상태였다. 공장을 돌려보려해도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직원들 월급은 몇 달 치나 밀렸다. 불어날 대로 불어난 빚을 갚을 전망 따위, 전혀 없었다. 회사는 이제 곧 도산할 터였다. 이 집도 저당이 잡혀 있다. 즉 거처할 곳도 없어지는 것이다. 성실하게 살아왔다. 오로지 성실하게 온 힘을 다해 산다고 살아왔다. 그래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깨달았다. -새해 첫날의 결심 中 “원래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실사영화를 많이 봤어. 근데 언제부턴가 실사를 보는 게 힘들어지더라고.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찾게 된 거야.” “어째서 힘들어졌는데?” “글쎼, 어째서일까. 아무튼 실제 인간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제 그만, 이라는 기분이 들어. 사람 얼굴은 현실 세..

한밤의 도서관 2017.12.15

블랙머니

저녁의 정적이 수정처럼 흔들렸다. 높고 가늘게 떨리는 소리가 집 쪽에서 들려왔다. 공작새 울음일 수도, 여자의 비명일 수도 있었다. “내가 20년간 진료를 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실수가 된다 해도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둬야 한단 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깨우치게 되거든. 폐기종 환자면 담배를 끊고, 만성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끊고, 그리고 중증 낭만주의자 아가씨는 현실주의자로 변합디다. 여기 내 사랑하는 아내처럼” 나는 침대에 쓰러졌고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잤다. 해 뜨기 직전 바람이 잦아들었다. 조용함에 나는 뭐가 빠진 거지 하고 의아해하며 깨어났다. 회색빛에 창문이 뿌옜다. 시내 바닥을 돌아다니는 거지처럼 철퍽거리는 바다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알아요...

한밤의 도서관 2017.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