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인생의 베일

uragawa 2019. 6. 26. 22:04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니까요.” 그녀가 되풀이했다.
“들었소” 그는 애정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빈정거릴 의도는 없었군. 다만 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 대꾸를 안 한 것뿐이었어. 하지만 할 말이 없다고 말을 안 한다면 인류는 머지않아 언어 사용 능력을 잃지 않겠는가. 키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건 그에게 지루한 일이었다. 그리고 부끄럽고 불편했다. 게다가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그는 독서를 좋아했지만 그가 읽는 책들은 키티에게 매우 따분하게 보였다.



마지막 선을 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과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만한 환상적인 변화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우연히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늘 봐 왔던 같은 여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인생의 항로를 바꾸려면 그 전에 충분한 숙고의 과정이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자유라는 선물이 던져진다면, 아!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것이 얼마나 간단해질 것인가!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않았어. 내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렸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편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



“그럼 이 세상에 오직 나 말고는 원하는 게 없다는 말은 왜 했죠?”
그의 입꼬리가 심술궂게 밑으로 쳐졌다.
“오, 이런,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운 법이야.”
“진심이 아니었나요?”
“그 당시에는 그랬지.”



인간이 이렇게까지 고통 받을 수 있을까.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녀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절박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왜 찰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잘못일 거라는 추측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들은 언제나 잘 지냈고 함께 있을 땐 웃음이 끊이질 않아서 그들은 연인일 뿐 아니라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너져 내렸다. 그가 밉고 그를 경멸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그를 다시 보지 못한다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인간의 손으로 지어졌다고 하기엔 너무나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며 비물질적이었다. 마치 꿈결처럼.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의 모습에서 사물의 무상함과 애수가 밀려왔다. 모든 것이 흘러갔지만 그것들이 지나간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다 말인가? 키티는 모든 인류가 저 강물의 물방울들처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여전히 머나먼 타인처럼, 이름 없는 강줄기를 이루어, 그렇게 계속 흘러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소한 문제에 터무니 없이 집착하고 그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인간이 너무나 딱했다.



“마음을 얻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자신이 사랑을 주고 싶은 대상처럼 자신을 만들면 되지요



책을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여러 생각들이 고요한 호수 위에 반사된 흰 구름처럼 그녀 마음의 표면 위를 흘러 다녔다. 그것들 중 하나를 움켜잡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 그것을 따라가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 행렬에 열중할 수 없었다.



“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역겨움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이따금씩 혼돈 속에서 창조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그린 그림, 그들이 지은 음악, 그들이 쓴 책, 그들이 엮은 삶. 이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것은 아름다운 삶이죠. 그건 완벽한 예술 작품입니다.



파란 하늘이 얼마나 절묘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전에는 결코 몰랐다. 길 위로 너무나 예쁘고 우아하게 기운 대나무 숲에서 또얼마나 즐거웠던가. 자유! 그게 바로 그녀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생각이었고, 비록 미래는 아주 희미했지만 아침 햇살이 드리운 안개 낀 강물처럼 다채롭게 빛났다. 자유! 답답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그녀를 짓눌렀던 애증 관계로부터의 자유였다. 자유, 위협적인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정신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유체 이탈 된 한 영혼의 자유, 그리고 자유, 용기, 무슨 일이 생기든 개의치 않는 씩씩함이 그녀와 함께했다.



“난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범한 실수를 그 애가 저지르지 않도록 잘 키우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릴 적 모습을 돌이켜 보면 제 자신이 싫어요. 하지만 제겐 기회란 게 전혀 없었어요. 내 딸은 자유롭고 자기 발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키울 거예요. 난 그 아이를 세상에 던져 놓고는 사랑한답시고 결국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위한 여자로 키우기 위해 평생토록 입히고 먹일 생각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