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75

사람의 아이들

나는 지금도 옥스퍼드의 봄날이 품은 눈부신 빛에서, 매년 더욱 사랑스럽게 피어나는 밸브로턴 거리의 만개한 꽃들에서, 돌담 위를 어른거리는 햇살에서, 바람결에 무성한 잎을 뒤채는 마로니에 나무에서, 꽃을 피운 콩밭의 향기에서, 첫 꽃망울을 틔운 설강화의 자태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담하게 피어난 튤립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이는 감각적이라기보다 지적인 즐거움이다. 인간의 눈길이 지켜보지 않아도 수백 년 동안 봄은 올 것이고 꽃은 필 것이다. 담장은 무너질 것이고 나무는 죽어 썩어갈 것이며 뜰에는 잡초가 우거질 것이다. 이 모든 아름다움은 그 모습을 기록하고 즐기고 축하할 인간의 지성보다 더 오래 살 것이므로, 내가 지금 느끼는 즐거움은 애틋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흔히들 매력을 무시하는데, 나로선 ..

한밤의 도서관 2020.10.26

무코다 이발소

가게에 다른 손님은 없다. 대부분의 음식점이 주 사흘 영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문 닫을 시간까지 있으면 가게 주인이 차로 집까지 데려다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술을 마시러 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에 큰 병원에 없다는 게 노인들에게는 간단한 일이 아니군.” 다케시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쉰다. “할 수 없잖아. 날로 쇠락해가는 동네인데. 슈퍼와 편의점이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지.” 간병인이 있어도 무방하다는 병원이라는데,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 더욱 속이 상한 듯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민생위원으로 있는 교코가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조성금 목적으로 그런 사업을 하는 곳도 많거든요. 정말 심한 병원도 있어요. 쓰레기 냄새가 나는 데도 있고, 냉난방비를 아끼느라 겨울..

한밤의 도서관 2020.10.08

시선으로부터,

분노를 연료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만, 정말 여기는 이해할 수 없어. 이따위로 엉망인데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단 말이지? 이백 그램 남짓한 무게는 역시 손목에 부담없이 좋았다. 옛날에 수레로 책을 끌고 다녔다는 사람들이 들으면 얼마나 분할까, 엉뚱한 생각도 했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내가 그렇게 고향만두를 ..

한밤의 도서관 2020.09.24

사형에 이르는 병

성인이 되면 정부는 일률적으로 지능지수를 정밀조사해서 평균 미만인 녀석들을 가스실에 보내야 한다. 안 그래도 국력이 약해지는 요즘이야말로 우생보호법이 필요하다. 한계가 있는 자원을 저런 멍청한 놈들에게 써줄 이유는 없다. 저런 놈들에게 귀중한 산소가 소모되는 것조차 짜증 난다. 남편과는 상사의 소개로 만나 거의 맞선 같은 결혼이었던 것. 호적에 올리자마자 바로 시부모와 함께 살게 된 것. 시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려져서 간호를 위해 일을 그만둬야만 했던 것. 시어머니는 간호를 전혀 거들지 않고 놀러 다니기만 했던 것. 일을 그만두자 수입이 없어져서 가정에서 발언권까지 사라져버린 것. 간호가 힘들어서 체중이 8킬로그램이나 줄어든 자신에게, 남편은 격려의 말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던 것. 시아버지가 건강했던 시절..

한밤의 도서관 2020.09.11

나는 절대로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출근하기 전에 퇴근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출근한 미래에서 퇴근하고 싶다는 감정이 과거로 거슬러 온 것 아닐까?” - 초광속 통신의 발명 中 나를 포함한 넷은 너무나 전형적이라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내향적 사람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집구석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선호하고, 그러다 보니까 근처 사람들한테 “얘는 하는 짓 보니 영재의 싹이 있다.”는 큰 오해를 받게 되고, 그 오해를 딱히 수정할 생각도 없어서 시키는 공부를 했는데 정말 머리가 좋지는 않아서 의대나 치대 진학은 실패하고, 약대나 갈까 생각하면서 화학공학이나 생물학 따위를 전공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꽤 적성에 맞아서 어영부영 눌러앉았다가 결국 연구소에 계약직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면서, 여전히 집에 틀어박혀 있는 ..

한밤의 도서관 2020.08.22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범죄소설 작가는 유쾌하지 못한 재주 탓에 작품마다 적어도 한 명은 욕을 얻어먹어도 싼 인물을 창조할 의무가 있으며, 이따금 착한 사람의 공간을 침범한 피비린내 나는 범죄행각을 불가피하게 그려야 할 때도 있다. 리밍이 코델리아의 기차표를 샀고 수하물 보관소에서 휴대용 타자기와 서류가방을 찾아오더니 일등석 열차를 향해 앞장서 걸었다. “나는 기차에서 할 일이 있어요. 혹시 읽을거리라도 있나요?” “괜찮아요. 저도 여행 중에 얘기 나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토머스 하디의 《트럼펫 주자》도 갖고 있고요. 가방에 늘 페이퍼백 한 권은 넣고 다니거든요.” 인간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존재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왜 젊음을 질투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젊음은 특권의 문제가..

한밤의 도서관 2020.08.20

옥상에서 만나요

“언니, 결혼생활은 어때요?” “굴욕적이야.”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어릴 때부터 성실했던 서른네번째 여자는, 결혼 적령기에 곁에 있던 사람과 쫓기는 마음으로 결혼했다. 몇 년이 지나고서야 이 숙제는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가 아니었을까, 의문이 찾아왔다. 다섯살 아래 여동생과 통화하다가 여자는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스무살 넘으면 어른인데 너무 아이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아. 입을 모아 내가 부족한 존재라 해서 정말 부족한 줄 알았어. 결혼을 해야 어른 취급받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니? 그래서 착각한 게 아닐까, 꼭 해야하는 숙제로. 너는 나..

한밤의 도서관 2020.08.14

일의 기쁨과 슬픔

연애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연봉을 모르고 있었다. 여느 회사가 그렇듯 우리 회사도 자신의 연봉을 누설하면 해고할 수 있다는 사규가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가 모아둔 재산과 연봉을 공개해야 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말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가족오락관 찍는 것 같다는 농담을 하면서 웃고 있었다. 셋, 하던 그 순간, 나는 구재와 내가 외치는 숫자의 앞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보다 세전 기준 천삼십만원을 더 받는 구재는 당연히, 모아놓은 돈도 나보다 훨씬 많았다. 구재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자 자기도 민망했는지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이년 동안 백오피스에 있어서 그랬나봐.“ 그래, 그게 맞는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한밤의 도서관 2020.07.30

마리카의 장갑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어릴 때 오빠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마리카가 다섯 살 때쯤입니다. 오빠들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 가문비나무를 베러 숲으로 가는 도중에 큰오빠가 마리카에게 물었습니다. “이 호두를 우리 넷이 사이좋게 나눠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니?” 마리카의 발밑에는 호두가 한 알 떨어져 있었습니다. 마리카는 곧바로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땅에 심을 거야!” 오빠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하지만 마리카는 자신만만했습니다. “호두나무가 자라서 호두가 열리면 다같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잖아.” 호두 한 알을 네 명이 나눠 먹는 대신 땅에 심어서 나중에 호두가 열리면 함께 배부르게 먹자는 이야기 입니다.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던 오빠들도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

한밤의 도서관 2020.07.03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로. 헨은 늘 음산한 분위기의 책들을 골랐고,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어둡고 징그러운 그림으로 몇몇 대회에서 상까지 탔으니까. 하지만 캠던 대학교 1학년 때 첫 조증이 오면서 과도한 자신감과 심각한 불안감 사이를 미친 듯이 오가게 되었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밤새 강박적으로 1시즌 DVD를 다시 봤다. 나중에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미라는 ⟪시간의 딸⟫을 읽기 시작했고, 매슈는 ⟪동떨어진 거울(A Distant Mirror)⟫를 거의 다 읽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이 세 번째로 읽는 것이리라 . 매슈는 역사물은 다 좋아했지만 특히 중세시대를 다룬 책이 제일 좋았다. ..

한밤의 도서관 2020.06.30

요리코를 위해

“하지만 당장 써야 할 소설 마감이 코앞이라고요.” “그런 건 개나 줘버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용을 써봐야 아무 소용 없어. 억지로 매수만 늘린다고 좋은 글이 나올 거 같냐?” “인간이란 종종 가까이 이웃한 누군가에게 모든 죄업을 뒤집어씌우곤 합니다. 때론 거기서부터 비극이 태어나죠. 니시무라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진정으로 증오해야 할 적을 잃어버리고 손이 닿는 곳에서 증오의 표적을 정해버린 겁니다. 증오란 결코 이성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남의 괴로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친절한 사람이라도 동정에는 한도가 있기 마련이라고. 니시무라가 내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말로 이해할지 모르겠네요. 아니, 이건 아니다. 근거 없는 상..

한밤의 도서관 2020.06.22

실버 로드

“죽음에는 어딘가 짜증나는 면이 있어요. 내면에서부터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참전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런 경고를 해주지 않았죠. 죽음을 직접 보면 어떻게 되는지, 죽음을 대면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죽음이 날 조종하고, 내 일부가 된다는 걸요.” “그걸 알았다면 참전 안 했을까요?” “제 경험상 잘 웃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더군요.” “무슨 말이죠?” “아무 이유 없이 웃고 미소로 상대를 속이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악하더군요.” “명심하죠.” 과거를 떨쳐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쉬운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나 상대의 추악한 면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아. 불가피한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 하지.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때를 놓..

한밤의 도서관 202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