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75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그런데 이런 시기에 동창회를 해도 괜찮겠어? 코로나 때문에 다시 떠들썩하던데.” 아, 그거. 모모코는 평소답지 않게 살짝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책을 생각해 두긴 했어. 탁 트인 오픈 스페이스가 있는 곳을 찾아뒀거든. 상황이 나빠지면 그쪽으로 옮기든지, 아니면 간격을 띄어서 앉든지.” “그러면 되겠네” 감염 재확산이 빈번하게 일어나니 다들 대응 방식에도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데 난 도쿄에서 못 나갈지도 모르겠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 자제하라고 했지.” “응, 괜히 이 시점에 고향 내려갔다가 돌이라도 맞으면 어떡해.” “남의 신분증을 봤으면, 그쪽도 보여 줘야 공평한 거 아닌가?” 다케시는 수첩을 펼쳤다. “흐음, 고구레 경감이라. 마요, 아쉽게 됐구나. 메그레 경감이었다면 좀 든든했을텐데..

한밤의 도서관 2021.05.18

청부 살인, 하고 있습니다.

“청부살인업자는 상상해선 안 돼. 표적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지. 혹은 이 사람이 죽으면 곤란한 사람이 있겠지 같은 걸 상상해선 안 된다고. 반대로 표적이 아무리 못된 인간이라도 이런 녀석은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선 안 돼. 상상은 감정이입과 이어지지. 인간은 감정이 들어간 상대에게는 냉정해질 수 없어. 즉 줄일 수 없다는 말이지.” - 검은 물통의 여자 “너 말이야, 청부살인업자가 왜 존재한다고 생각해?” “왜 존재하느냐고?” “사람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이야.”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사람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쉽게 빼앗을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청부살인업자라는 존재가 필요한 거지. 쉽게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을 대신 빼앗아주는 전문직의 존재 의의 말이야. 하지만 테러 사건이 빈발한다면 어떨..

한밤의 도서관 2021.04.30

셰이프 오브 워터

엘라이자는 일평생을 사각지대에서 살았다. 세상은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모두를 놀라게 할, 무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엘라이자, 인생은 그런 거야. 별 의미 없는 것들을 이것저것 짜깁기를 해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우리 입맛에 맞는 상상을 만들어 내 공허한 속을 채운다고. 이해가 돼? 오, 세상에! 스트릭랜드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한국에 돌아와 있었다. 한국에서 호이트의 임무는 남쪽으로 피난하는 수백만 명의 한국인을 돕는 것이었다. 당시 스트릭랜드는 호이트의 보좌를 맡고 있었고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부대가 집결해 있던 영동이라는 곳에 있었다. 호이트는 그곳에서 스트릭랜드의 멱살을 쥐고 트럭을 가리키며 운전하라고 명령했다. 푹푹 찌는 날씨에 쏟아지..

한밤의 도서관 2021.04.16

40세, 미혼출산

나는 스무 살 때, 마흔 전후의 여자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십대 여자와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초등학생이 보더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동물적 직감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것이 본래의 정직한 피부감각이다. 마흔 살 전후의 여자가 그때까지 사랑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옛날의 나는 어떻게 느꼈을까. 닭살이 돋았을 것이다. 시골 노인들의 생각에는 격세지감이 있어서 불쾌감이 드는 일이 많았다. 낡은 생각을 가진 인간들과는 정면으로 부딪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도록 뼈저리게 느껴왔다. 그래서 반박하지 않는다. 아아, 이 눈빛이다. 고향의 술집에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그때보다 더욱 중년 남자의 변태도가 증가했다. ‘중년 남자의 변태도’라는 말은 동기인 나미가 이십 ..

한밤의 도서관 2021.03.24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위장.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조금씩은 하고 산다. 괴물도 햇살 아래 당당하게 걸어 다니기 위해 인두겁을 뒤집어쓰는 법을 배워 위장한다. 이제 와서 보니 진실은 중요치 않았다. 전부 꾸며 내면 그만이었다. 대중이 납득할 만한 살인범의 요소들을 한데 모으니 살아 움직이는 흉악범이 탄생했다. 증명은 필요치 않다. 애초에 쓸데없는 짓이고, 혼란의 파도 위에 이슈를 올려놓으면 그만이었다. 아이러니하고 우습지만 스녠은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일에 찌든 회사원과 시체의 차이점을 면밀히 연구해 본다면, 유일하게 다른 점은 아마 호흡의 유무뿐일 것이다. 버스가 아침의 차량 행렬을 따라 정류장에 도착했다. 장페이야는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다른 학생들을 따라 버스에 몸을 밀어 넣었다. 차 안에서 각종 냄새가 섞여..

한밤의 도서관 2021.03.14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해를 거듭할수록 생일이 서글퍼진다. 나이 듦에 따른 외로움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양어깨를 덮쳐누르는 뚜렷한 불안 때문이었다. -가족 여행 스승의 말에 따르면 결말을 아는 영화를 즐길 수 있으면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이며, 아는 결말을 한 달간 즐길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영사기사라고 한다. -영화 팬 오우라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짧은 야간 아르바이트에는 휴식 시간이 없기 때문에 반년 전에 들어온 접수 담당 여직원이 기혼인지 미혼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과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홀가분함이 이곳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는 큰 이유이지만, 희박한 인간관계 속에 가끔 이런 대화가 오가면 묘하게 반가운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미안, 좋아해 청경채와 달걀볶음에 참기름을..

한밤의 도서관 2021.03.10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사람을 죽이고 싶다. 누구든 상관없다. 이유도 딱히 없다. 그냥 죽이고 싶다. 속이 후련해질지도 모르니까. 그게 다다. 특별히 재미있어 보인다거나 즐거워 보여서 이러는 건 아니다. 엽기 살인 사이트 등을 보는 사이에 감화되어 흥미가 생긴 것도 아니다. 여하튼 세상에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우둔한 쓰레기들뿐이다. 하나같이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그저 멍하니, 의미 없이 살고 있다. 길을 걸어도 눈에 들어오는 건 어중이떠중이 쓰레기들뿐. 멍청해 보이는 쓰레기들이 당당한 자세로 줄줄이 걸어간다. 하나하나가 전혀 살아갈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다. -ABC 살인 컴퓨터가 사원들을 관리하고 사정해서 인사 전반을 프로그램에 맡기고, 이렇게 기업을 운영한다. 정말 합리적이다. 적재적소의 효율적인 인원 배치, 인적 낭비는..

한밤의 도서관 2021.02.09

그 집에 사는 네 여자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유키노는 뭐든지 다 혼자 해왔다. 어른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자립해 혼자 사는 것은 어른이 됐다는 증거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혼자 살 수 있는 인간은 없고, 돈도 어차피 천하를 돌고 돈다. 어디까지나 노동한 대가로 남에게 받는 것이지 유키노 본인의 가치를 나타내진 않는다. 양보하기도 하고 부대끼기도 하면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야말로 어른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다. “너는 회사에 다니니까 누군가와 만날 수 있을 거 아냐. 그러면 혼자 사는 편이 아무래도 편리하지 않을까 해서.” “이보세요.” 유키노가 한숨을 쉬었다. “밖에 나가면 호감을 주고받을 사람을 만날 거라는 거, 네 환상이야.” “그래?” “그렇..

한밤의 도서관 2020.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