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77

나를 쳐다보지 마

이처럼 상세한 편린(片鱗)들은 아동기의 기억 대부분이 멀리 사라진 후에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의 마지막 날은 내 마음에 철썩 들러붙어, 감은 눈꺼풀 속에서 일렁이며, 빛과 어둠으로, 마치 옛날 홈무비처럼 끊임없이 재상영된다. 나는 기다림을 싫어하지 않는다. 인내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때를 보는 행위이다. 우리는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늙기를 기다린다……. 어떤 날엔, 아니 대부분의 날에 나는 실망한 채로 귀가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해하지는 않는다. 기회는 또 오기 마련이니까 “신문에 났더라. 글래스고의 어떤 나이 든 여자가 집 안에서 죽은 채로 8년간이나 방치돼 있었대.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봐. 그래서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고. 가스랑 전기는 끊겼어. 창문은..

한밤의 도서관 2020.04.08

지진 새

《말괄량이 삐삐》와 《비밀의 화원》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그녀는 거침없는 삐삐를 존경했고 인도에 살다가 요크셔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된 비참한 메리의 처지에 공감했다. 구름 한 점 없던 그날, 루시는 《폴리아나》를 읽고 있었다. 선생님이 빌려준 책이었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은 역겨웠다. 감상적인 주인공 소녀는 불평하는 법을 몰랐고, 최악의 상황이 분명함에도 좋은 점만을 찾아내려 애썼다. 도쿄는 루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너무 커서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았고,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으며, 너무 비싸서 저축에 관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혼란 속에서 차갑고 조용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허리가 굽은 백 세 넘은 노인들, 세 살 먹은 닌텐도의 귀재들, 먹고 잠..

한밤의 도서관 2020.04.04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결혼은 친척을 두 배로 늘리고, 짐을 두 배로 늘리고, 싸움을 네 배로 늘린다. 당연히 책꽂이의 책은 전부 이중으로 꽂혀 있다. 뒤에 있는 책은 보이지 않으니 분명히 있을 책이 걸핏하면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아내에게는 시침 뚝 떼고 똑같은 책을 또 샀다. 하지만 그런 나쁜 짓은 물론 들키게 돼 있다. 도대체가 책의 형태가 문제다. 네모나고, 쌓기 편하고, 게다가 썩지 않는다. 임시로 한 권을 책 탑 위에 대충 올려놓는다. 이게 그 뒤의 행방불명과 붕괴로 이어진다. 가나와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아침 일찍 청소와 빨래를 시작해 오전 중으로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치우고 나면, 전철을 갈아타고 경로 우대 할인이 되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백화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거나(가나를 우연히 만난 국숫집을 처음 발견한 ..

한밤의 도서관 2020.03.26

고독한 늑대의 피

오가미와 히오카는 가코무라구미 사무소 주변에서 신도 방문을 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말하는 ‘신도檀家’란 사건 관련 정보를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일반 시민을 가리킨다. 신도 방문과 통상적인 탐문의 차이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사건처럼 보이는 일이나 사건으로 연결될 만한 일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는 점이다. 신도는 주유소 종업원, 현지의 개인 상점 주인, 커피숍 주인 등 다양하다. “폭력단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 인간은 말이지, 밥을 먹으면 똥을 눠야 해. 밑을 닦을 휴지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폭력단은 화장실 휴지 같은 거야.” “그런데 왜 나와시로들은 시체를 섬에 묻었을까요?” 눈앞에 나타난 아카마쓰 섬의 그림자를 응시하면서 오가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드럼통..

한밤의 도서관 2020.03.20

염소가 웃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잠깐 안겨줬다가 곧바로 그 작은 희망마저 빼앗아버리는 게 아닐까? 상황이 좋아진 거라곤 하나도 없는데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최악의 결과를 알고 있으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유령도 아니고, 자신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걸 제일 두려워한다. 한마디로 '미지未知'를 가장 두려워한다. 더보기 염소가 웃는 순간 山羊獰笑的剎那(2018) 찬호께이 새로운 책이라 제목만 보고 구매했는데, 두껍고 무거워서 집에서 저녁에만 읽기로 생각했거든? 인물 설명을 읽고 '청춘물이겠구나~' 하고 가볍게 읽기 시작. 했는데? 왜 때문에 호러 공포물이냐!!..

한밤의 도서관 2020.03.15

라이프 오어 데스

“자네 이름이 뭔가, 젊은이?” “모스 제러마이어 웹스터인데요.” “이름이 모스가 뭐야?” “그게요, 소장님, 엄마가 제 출생증명서에 모세를 잘못 쓰셔 가지고요.” 자라다 만 나무들의 행렬 위로 붉게 빛나는 태양이 떠오른다. 네 시간 후, 물의 기억은 까마득하고 하늘에서는 불타는 원이 용접공의 불꽃처럼 뒷목을 달구고 있다. 길 위에는 피부의 모든 주름과 패인 곳에 먼지를 뒤집어쓴 오디 혼자뿐이다. 면회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여자들이 몇 명 있다. 남자들을, 또는 범죄자들을 잘못 고른 여자들이다. 잡힌 자들. 패자들. 서툰 자들. 사기꾼들. 데지레는 회상에 잠긴다. 데지레는 이미 좋은 남자를 찾는 건 쉽지 않다고, 제일 좋은 남자는 보통 게이 아니면 유부남이거나 허구의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2..

한밤의 도서관 2020.03.1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한 때 도서관이라고 불렸던 장소 중 일부는 박물관이 되었고 그럴 가치가 없는 곳들은 대부분 전산화되었다. 지금의 도서관은 다른 개념이다. 이곳에 있는 건 책도 논문도, 그 비슷한 자료들도 아니다. 이제 도서관엔 끝없이 늘어섰던 책장 대신 층층이 쌓인 마인드 접속기가 자리하고 있다. 더보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친구가 빌려준 책. 2020년 첫 책이 되었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첫 문장부터 너무 불편해서 거를까 싶었던 단편. 작가가 준비한 세계관으로 들어갈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깊은 대화를 건네는 느낌이었음. [스펙트럼] 요소는 재미있었는데,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할지 몰라 급하게 마무리한 느낌이었다. 일방적인 이야기만 펼쳐놔서 재미가 좀 떨어졌음. [공생 가설] 어떻게든 한국을 ..

한밤의 도서관 2020.02.09

로드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目). 남자는 자신이 아무런 근거 없이 희망을 걸고 있음을 알았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더 어두워지고 있다는 걸 잘 알면..

한밤의 도서관 2019.11.03

로스트 케어

현대의 교수형은 기관이 아니라 경동맥을 조이기 때문에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한다. 고통을 맛보기도 전에 뇌로 가는 피가 멈추어 실신하게 된다. 물론 실제로도 그런지는 알 수 없다. 먼저 뇌사 상태에 빠져 뇌의 기능이 정지하고, 따라서 심폐기능도 멈춰 이윽고 완전히 죽는다. 이때 근육이 이완되어 똥오줌을 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어머니는 이제 성장하지 않는다. 앞으로 더 나빠지기나 하지 좋아질 일은 없으리라. 날이 갈수록 더욱 의사소통이 힘들어진다. 요코는 지금까지 막연히 일본이 오래 사는 나라라는 게 좋은 거라고 여겼는데 그건 큰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니, 이렇게 절망적일 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소개한 ..

한밤의 도서관 2019.10.20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네 가지 있다. 입 밖에 낸 말, 공중에 쏜 화살, 지나간 인생, 그리고 놓쳐버린 기회.”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中 공기는 만들어낼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공기의 총량은 일정하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공기뿐이라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 中 동물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는 여자들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는 소리다. 동물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아이를 키우고..

한밤의 도서관 2019.09.15

냉면

“보면 사람들 참 먹을 거 좋아한다니까요. 만나서 하는 말도 ‘밥 먹었어?’고 헤어지면서 하는 말도 ‘언제 또 밥이나 먹자!’잖아요. 식사는 사교의 단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내 삶을 타인과 어느 만큼이나 나누고 있느냐의 단위는 함께 한 식사로 측정할 수 있다고 봐요.” 냉면 - 안전가옥 앤솔로지 1 친구가 올해 국제도서전에서 작가님 사인 받으며 구입한 책인데, 집에 책을 다 읽어버려 빌려 달라고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함 A, B, C, A, A, A - 김유리 A가 다 갖추었다는 주요 3대 요소 좀 보세요 사랑에 빠지는 주요 3대 요소1. 188cm의 키. 2. 아이돌처럼 생긴 얼굴. 3. 초콜릿 복근 이거 판타지세요?? 이런 사람이 나랑 사귄다고요??? 13살 연하인데요???? 냉면집..

한밤의 도서관 2019.08.31

별이 총총

처음 먹은 맛이 그리워질 정도가 되면 그때는 손을 내밀기도 귀찮아진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싫증이 난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된다. 사랑도 유효 기한이 있는 것이고, 그리 오래 이어지는 게 아니다. 기간 한정. -나 홀로 왈츠 中 외둥이는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아이가 주렁주렁 많았다. 아이가 셋이면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진다나 뭐라나, 아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하곤 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건 서로 마찬가지 아닌가. 그도 저도 시간이 지나 한바탕 상처를 입은 뒤에야 깨달은 일이었다. 둘씩 셋씩 낳아봤자 하나라도 비뚤어져서 말썽을 부리면 그걸로 모든 게 끝장이다. 자식 농사에 2승 1패 같은 건 없지 않은가. 하나라도 똑똑하고 반듯하게 키워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바닷가의..

한밤의 도서관 2019.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