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나를 쳐다보지 마

uragawa 2020. 4. 8. 22:30

이처럼 상세한 편린(片鱗)들은 아동기의 기억 대부분이 멀리 사라진 후에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의 마지막 날은 내 마음에 철썩 들러붙어, 감은 눈꺼풀 속에서 일렁이며, 빛과 어둠으로, 마치 옛날 홈무비처럼 끊임없이 재상영된다.



나는 기다림을 싫어하지 않는다. 인내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때를 보는 행위이다. 우리는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늙기를 기다린다……. 어떤 날엔, 아니 대부분의 날에 나는 실망한 채로 귀가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해하지는 않는다. 기회는 또 오기 마련이니까



“신문에 났더라. 글래스고의 어떤 나이 든 여자가 집 안에서 죽은 채로 8년간이나 방치돼 있었대.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봐. 그래서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고. 가스랑 전기는 끊겼어. 창문은 폭풍에 깨졌고. 우편물이 안쪽 복도에 쌓여 있었어.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대. 사람들이 침대 옆에 누워 있는 여자의 유골을 발견했지. 아마 넘어지는 바람에 골반이 부러져서, 죽기 전 며칠 동안 살아 있으면서 도움을 청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아무도 듣지 못했나 봐. 그리고 이제 유족은 여자의 집을 놓고 다투고 있어. 다들 한몫 챙기고 싶은 거지. 그런 걸 보면 궁금해져…….” 
“뭐가?” 
“혼자 죽는다는 게 얼마나 끔찍할지.”
“우리는 누구나 혼자 죽어.”
나는 말해놓고 곧장 후회한다. 




“용의자가 있긴 합니까?”
“많아서 탈이지.” 크레이가 끙 소리를 낸다.
“이곳 주민들은 우리가 삽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슬슬 신경들이 날카로워지고 있지. 오늘 밤 공청회가 있어요. 당신이 거기 와줬으면 해요.”

“내가 왜요?”
“우정 출연이라고 해두죠.”
“제가 아는 우정은 그런 게 아닌데요.” 크레이가 어깨를 뒤로 젖히고 눈동자를 빛내며 웃음을 짓는다.
“우린 그런 사이에요, 교수. 의견이 서로 엇갈릴 때 굳이 합의를 끌어내지 않아도 여전히 심오함과 끈끈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이. 자, 현장을 보여드리지.”




책 한 권이 협탁의 스탠드 아래 놓여 있다. 케이트 앳킨슨의 『삶 그 후의 삶』이다. 책 중간쯤에서 책갈피가 빼꼼 엿보인다. 이제 결말은 읽을 수 없게 됐군.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진정하세요, 여러분. 여기 모인 우리는 모두 친구들입니다.”
나는 배너먼이 주의 깊게 택한 표현에 손발이 오그라든다. 신경에 거슬리는 말이다. 거짓된 친밀감, 가식 어린 연대감. 우리 모두가 친구라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지? 살인자는 바로 이 사람들 가운데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노년은 언젠가 한번쯤 가보고 싶은 외국이 아니다. 아직 수평선 저 너머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머지않아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경험들의 총합이다. 우리가 현재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지난날 겪은 일들 때문이다.



어떻게 누군가를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애정을 갈구할 수 있을까? 사랑과 증오는 위아래가 뒤바뀐 동일한 감정이 아니다. 하나는 심장의 착각이고 또 하나는 배반당한 사랑의 부산물이다. 둘 가운데에는 무관심이 놓여 있다.



원자폭탄 폭발로 생긴 히로시마의 그림자(영원히 잊지 못할)를 찍은 연속 사진들이 기억난다. 폭발로 발생한 열이 벽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을 강타하자마자 사람들이 증발해서 ‘그림자’만 남았다. 마치 벽에 인쇄된 2차원 그림 같았다. 살인 현장을 볼 때면 나는 바로 그걸 느낀다. 그림자들을 본다.



아버지가 괴물이었다면, 어머니 역시 방조한 죄가 있었다. 그냥 잠이나 잤더라면, 그래서 아버지도 잠을 자도록 놔뒀더라면 얼마나 많은 폭력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 어머니 역시 자기 몫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심지어 죽은 후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참 대단한 한 쌍이다. 내 부모란. 내 DNA, 세포 하나하나, 유전자 하나하나, 염색체 하나하나가 그들에게서 왔다. 그들은 내 안에서 아직도 싸우고 있다. 누가 나를 더 잘 망쳐놓을 수 있는지 어디 보자며 전투 중이다.



여자애가 루이츠를 돌아본다. 
“풍선 드릴까요?”
“저는 그러기엔 좀 늙어서요.”
“하나도 안 늙으셨는데요.” 여자애가 루이츠에게 윙크하며 말한다.
루이츠가 손을 내민다.
“그거 봤어?” 루이츠가 묻는다.
“뭐?”
“여자애가 나한테 들이댄 거.”
“이번 주가 노인공경주간이라 그래.”
“좆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의 공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공포가 우리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게 해준다고들 하지.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원하는 거라고도 하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안 그래? 알지, 공포는 정의하거나 테를 두를 수 없어. 한계가 없고 아무런 자비도 보여주지 않을뿐더러 어떤 법에도 따르지 않지. 공포는 마음속에서 시작되지 않아.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되지. 근섬유와 신경종말에, 우리의 DNA에 새겨져 있어. 그게 몸이 소리보다 더 빨리 반응하는 이유야. 우리는 이유를 알기도 전에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붙지. 무의식적으로. 선천적으로.”




“얼리 박사가 부검을 실시할 겁니다. 보면서 배우도록 해요.” 
외과수술용 장갑도 미처 벗지 못한 채로, 박사가 복도에서 나를 맞는다. 
“약속은 하고 온 겁니까?”
“5분이면 돼요.”
“내게 5분이 있다면 아침 똥을 싸겠네요.”
“제발, 루이스.” 박사가 꿍얼대며 걷기 시작한다




“좋은 저녁 보내세요.” 말뿐인 인사.
씨발, 싫어!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다. 나는 거지같은 저녁을 보내기로 마음먹었어.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들을 위해 변명을 한다. 사건을 축소한다. 용서한다. 서사를 바꾼다. 그들의 피가 우리의 피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샘솟는다. 내일은 새로운 날이야. 내년이 되면 더 나아질 거야.



“우리 주님은 진정 뉘우치는 죄인들을 용서하십니다.”
“지옥을 공짜로 벗어나는 카드 말씀이시군요.”




모든 사람이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특하다고. 특별하다고. 자기들 삶을 여행 같은 것으로 상상하며, 자아를 발견한다는 둥, 끝을 맺는다는 둥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사실 찾아낼 것은 아무것도 없고 유일한 종결─중요한 종결─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어떤 단계다. 죽음. 해방. 끝.



누구에게나 세 개의 심장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심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심장, 그리고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는 심장. 내가 사람들에게서 찾는 것은 마지막 심장이다. 보통 가장 상처받는 심장.



“당신은 내가 왜 인간보다 개를 더 사랑하는지 알아요?” 총경이 소리친다. 전반적으로 더 누그러졌다. “개들은 먹여주고 쓰다듬어 주기만 하면 나를 사랑해주거든. 사람은 누구 하나 날 사랑해주지 않을 때도.”



그게 내 문제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는 결코 하지 않는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조, 오늘 기분은 어때? 뭐가 두려워? 요즘 무슨 꿈을 꿔?” 나는 자신이 뭘 발견할지 겁이 나기 때문에 자신을 분석하기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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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쳐다보지 마
Close Your Eyes(2015)



리디북스에서 1900원 대여.

아, [라이프 오어 데스]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말장난해야지! 각오하고 쓴 듯한 느낌이었음 ㅋㅋ
(얘도 몇 군데 거슬리는 부분 빼고)



+
웃겨 죽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아빠들은 간단한 아침 식사를 차려놓고는 자기가 미슐랭 별 다섯 개짜리 미식이라도 만든 줄 아는 걸까? 정작 그런 일을 매일 하는 엄마는 칭찬받을 생각 따윈 하지도 않는데 말이지.”
줄리안이 치즈가 녹아 들러붙은 그릴을 문질러 닦으면서 묻는다.
“그게 인생의 크나큰 수수께끼 중 하나지.” 


“우리 사회는 남자들의 공격성을 너그러이 봐주는 것 같아요. 남자들은 나약하고, 불행한 존재로 여겨지죠. 예전과 달리 통제력뿐만 아니라 특권이나 권력도 잃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남자들이 우리한테 주먹을 날리더라도 용서해줘야 한다는 식이지.


“남자들의 문제는……” 하고 베티가 말한다.
“자기들 젠더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여자를 차버리거나 반대로 자기가 차이기 전에는, 아니면 누군가를 오줌 쌀 정도로 패버리거나 자기가 그렇게 얻어맞기 전에는 남자가 못 된다는 거지. 어떻게 생각해요?”
“방금 제 인생의 지난 30년을 요약해주셨네요.” 베티가 소리 내어 웃는다.
“축하해요, 당신은 남자가 됐군요.” 





++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범인은 아무 죄도 지지 않은 엄마까지 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이것부터 벌써 별로였음.
엄마는 건들지 마라.



줄리안(주인공의 부인) 초기단계라고 해서 수술했더니
색전증 와서 세상을 떠나버림.
아니, 왜! 살려주면 안 되는 거였나???
앞서 살인사건에서 죽은 여자들과 주인공의 부인까지
여자는 아주 남아 남질 않겠네.



범인의 최후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결말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
그리고 궁금한 부분.

범인은 혹시 모를 증거를 없애기 위해 하퍼의 손가락을 표백제에 담갔다.


표백제에 손가락 담그면 증거 사라지나요.?

말장난이 재미있었던 작품.
시간이 된다면 다른 작품도 볼까나




2020/03/12 - [한밤의도서관] - 라이프 오어 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