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사랑 없는 세계

uragawa 2020. 4. 24. 22:30

후지마루는 샤워를 하고 미리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둔 보리차를 마셨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다고 자평하며, 다다미 여섯 장 짜리 방에 이불을 깔고 타월 이불을 배에 올리고 드러눕는다.
알람을 해놔야지, 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보니 친구에게 온 라인(LINE)이나 문자는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난 외롭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덮쳐오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다.



후지마루는 멍하니 생각한다. 배룰 채우는 것은 한때의 일. 맛있고 영양 밸런스가 잡힌 요리를 아무리 먹어도 결국 언젠가는 죽으니까. 아니, 그렇게 말한다면 어떤 행위도 다 무의미하다. 나도, 대장도, 혼고 대로를 걷는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좋은 일을 해도, 나쁜 일을 해도, 언젠가는 모두 과거가 된다.



미안해요, 어머니. 저는 식물과 결혼했어요......! 수분(受粉)으로 어떻게 되는 거라면 손주의 얼굴을 보여드릴 수 있겠지만, 아니, 식물이란 게 결혼 상대치고는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네요. 지금까지도 화분에 심은 식물을 말라죽게 하고 있고, 애기장대 세포는 기대한 만큼 빛나 주지 않고. 아아, 나는 연구자의 재능이 없는지도.



즐거운 시간이란 뭘까. 함께 밥을 먹거나 놀이공원에 가거나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밥은 재빨리 혼자서 먹고 남는 시간에 애기장대의 씨앗을 한 알이라도 더 많이 채취하고 싶다. 놀이공원의 놀이 기구에 휘둘리거나 낙하할 틈이 있으면 그 시간에 애기장대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
한 대의 현미경을 둘이서 동시에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와 사귄다고 해도 그 사귐의 어디에서 가슴 두근거리는 포인트를 찾아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뭔가 확실한 느낌이 오질 않았다. 연구 이상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는다.



기특하다, 하고 자기도 모르게 의인화하여 감정이입을 하고 만다. 머리가 좋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한다. 식물에게는 뇌가 없으니 머리도 엉덩이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잘 조화를 이루며 생존을 위해 궁리한다. 인간보다도 머리가 좋구나, 하고 생각한다.



나 또한 식물들처럼 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생물이 될 수 있다면, 가장 귀찮은 일이 없어지는 셈이어서 마음이 편할 텐데. 모토무라는 한숨을 쉰다. 사고도 감정도 없을 터인 식물이, 인간보다도 타자를 더 잘 수용하고 더 초연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참으로 얄궂다.



인간사란 게, 명확한 완성이 없다는 점에서는 다 마찬가지구나 하고 모토무라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아무리 사랑하는마음을 쌓아 올리고 또 올려도 완성되는 일은 없다. 완성은커녕 사랑이 맥없이 무너져 다른 데로 옮겨 갈 때가 언젠가 오는 거겠지. 아마도.
모토무라는 연애 방면의 사랑은 자신의 인생에서 제쳐놓고 있는 몸이라서 뭐라고 아는 척할 처지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얼필 듯은 말들에 근거하여 볼 때 사랑의 영원성과 견고함을 즉각적으로 믿는 것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적어도 알고 있다.



"저는 겁쟁이였어요" 하고 가토가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저는 예전에는 작은 화분에 억지로 쑤셔 넣어진 선인장처럼 저 자신의 세계를 좁히고 있었어요. 그러지 말고 내가 선인장을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나와 함께 선인장에 흥미를 가져줄 사람이 있었을 텐데, 멋대로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있었던 거에요."



호기심이란 때로는 브레이크가 듣지 않기 때문에 무서운 면이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결코 꼴불견이 아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정직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오히려 '이런 약한 소리나 진심을 말하면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위축되어 주위의 걱정해주는 마음을 차단하고 혼자 숨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꼴불견이고 약한 모습일 것이다.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도 없고, 기온이나 계절이라는 개념조차 없는데도, 식물은 정확히 봄을 알고 있다. 온도계나 일기장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건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 진짜 봄이다. 슬슬 여느 해와 같이 활발하게 생명 활동을 할 시기가 왔다'라고 판단하고 기억한다.



왁자지껄한 연구실 창문을 열고 봄의 밤바람을 맞는다. 어둠 속에서도 벚꽃은 묵묵히 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벚꽃에 관해서는 '꽃이 시든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구나, 하고 모토무라는 생각한다. 엷고 싱그럽게 활짝 피어나 시들기 전에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무수한 반딧불이같이 어둠 속에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이해는 사랑과 비례하지 않는다. 상대를 알면 알수록 사랑이 식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모토무라에 대한 후지마루의 마음은 그것과는 반대였다.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랑하는 마음도 늘어가기만 했다.



오늘의 도시락은 일식이다. 큼직한 주먹밥을 100개 만든다. 속에 들어갈 것은 가다랑어포 매실과 순무 두 종류다. 반찬은 명란적을 끼운 닭 가슴살 튀김과 돼지고기 구이. 그 외에도 톳 유부조림과 시금치 두부부침 등의 자잘한 반찬을 만들어서 색감을 살리면서 도시락 통에 담아야 한다.



정말로 신기하다. 각각의 생명체가 갖고 있는 정묘한 매커니즘이.
식물이나 동물은 왜 태어나는지. 태어났는데 왜 또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리고 가는 길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왜 모두 어둠이 아니라 빛을 식량으로 살아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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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
愛なき世界(2018)



[트위터책빙고 2020]
6. 2020년에 출판된 책
(우리나라에 2020년에 나왔으니까 되겠지요?????네????)



오랜만에 미우라 시온 작가님 책이 나왔다.
너무 신남.



+
배경이 대학 캠퍼스라 청춘이네, ㅎㅎㅎ
두 주인공이 순수? 해서 너무 좋았음.
드라마나 영화로 나와도 손색없을 것 같은 작품이었다.



++ 
"교수님은 '초록 손가락'을 갖고 있어요" 
초록 손가락?
어디서 들었다 했더니 만화책 [그린 핑거] 에서 봤구나?  



+++
후지무라 두 번이나 까임. 
와 아주 마음에 드는 결말이야 ㅋㅋ
백점이다 백점 ㅋㅋㅋ  



++++
나폴리탄 계속 나와 먹고 싶게!!!
톳 유부조림도 먹어 보고 싶어



+++++
표지 디자인이 정말 정말 예쁜데, 일본 원서랑 표지가 똑같더라구 
아! 그리고
2019년 4월 23일. (와, 작년의 어제네.)
일본식물학회는 미우라 시온 작가에게
식물학 공헌자에게 수여하는 특별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대박적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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