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월어

uragawa 2013. 3. 26. 09:00

그 책이 읽혀진 책인지 아닌지는 펴보았을 때 책장의 미묘한 저항감으로 알 수 있다. 세나가키의 손 안에서 책장은 부드럽게 넘어갔다. 하지만 찢어진 곳은 없다. 세나가키는 감탄했다.



가게에 있는 고서적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 책들을 쓴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여기에 남겨진 것은 이 세계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고요한 속삭임 뿐이다. 예전에 살아 있을 때 경험한 기쁨이나 슬픔, 사고, 고민의 일부이다. 마시키는 그 책들에게서 들리는 속삭임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책은 생명이 길다.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소중히 다뤄진 책은 낡은 것도 잊은 채 무궁당에서 한가롭게 다음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책을 지키는 데 바깥세상도, 시간도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말하려던 참이지? 신경 쓰지 마, 옛날 일이야, 잊어버려, 라고 입 밖으로 말을 꺼내면, 그것이 오히려 아직도 그때 일을 잊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핵심을 피한 채, 하지만 서로 번갈아 가며 조심조심 손을 내민다.




자신이 입은 상처의 치료를 가장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바로 세나가키라는 남자였다. 고통에 둔감하기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약자를 도와야만 한다는 희생정신과도 거리가 멀다. 그는 자신이 유약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고, 상처 입은 후에 오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를 겁쟁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시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시키가 어떻게 해도 따라갈 수 없는 세나가키의 강인함 이라고 생각했다.



햇빛이 똑바로 내리쬔 탓에 마시키의 등은 곧 땀으로 젖었다. 수분을 흡수한 셔츠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 소리를 질러버릴 것만 같았다. 느릿느릿 달리는 전차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나가키를 생각하며, 마시키는 자신이 호흡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생물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열심히 달렸다.




마시키는 영원히 얻을 수 없었던 것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고 울었다.




“상처가 상처로 남아도 그것으로 됐다는 태도로 대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상처가 아니라 나의, 아니 나만의 흉터가 된다면서요. 그래서 이 기회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서 묻는 것입니다. 왜 나와 할아버지를 버렸던 겁니까?”




체념해버리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굴레는 끝나버린다.




“분명히 나는 그 사람의 얼굴 같은 건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잊어버렸어,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근데 그사람 얼굴을 본 순간 확실히 생각났어. ‘그래, 이분이 내 아버지였지’라고.”

“그런 걸 거야, 부자관계라는 것이.”




“난 잊고 있었어.”

“뭘?”

꿈을 꾼 것도, 희망으로 가슴이 설레는 두근거림도, 모든 일에 도전하고 싶다는 야심도, 마시키와 만났던 그 여름날에 생겼던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늘 그렇다. 혼다의 존재에 과잉 반응하고, 늘 보기 흉하게 떨고 만다. 그것이 싫어서 그를 나만의 세계에 가두어버린다. 가공의 세계에서 그를 조작 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마음대로 그를 바라보고, 그의 반응을 내 마음대로 이것저것 여러모로 생각할 수 있다. 대상을 향한 그 허무한 행위가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말이다.




혼다는 누구에게나 일정한 간격으로 거리를 둔다. 일반 고등학생들과는 가진 취향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늘 냉정한 품위만이 감돈다. 그가 사람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나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아니, 어폐가 있다. 그는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상냥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냉정하다. 원래부터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체념한 것인지,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다른 사람과 쉽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없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마음대로 그와 나를 동일시했다. 지금 그와 함께 뻥 뚫린 여름 하늘을 보고 있다는 기만으로 가득 차서, 혼다와는 어딘가 통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슬프기 때문은 아니다.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다는 것이 늘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새삼스레 그 사실 깨닫고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이 숨쉬기조차 힘든 고통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난 잊고 싶지만은 않다.




“저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하려 애쓰는 비겁한 인간이에요. 선생님은 잃어버린 것을 어떠한 형태로든 되찾으려고 하시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무서워서 할 수가 없어요.”

“그럴까? 혹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네가 젊기 때문에 되찾고 싶다고 희망하는 상실감을 아직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혼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의미인지 난 알 수 없었다.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어. 너는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히 되찾고 싶은 큰 유실물은 없는 거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이라고 마시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유욕이 강한 것 같아.”

“뭐?”

“너,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글쎄.”

뭔가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건가? 라고 약간 동요하며 세나가키는 대답했다.

“난 있어”라고 마시키는 말했다.

“사실은 가게에 있는 책을 팔지 않고 다 놔두고 싶지만, 책의 행복을 위해 마음이 아프지만 팔고 있는 거야. ‘여자를 굉장히 좋아해서 기생집 주인이 되어버린 남자’ 와도 같은 기분일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