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인기척의 잔재를 발견할 때마다 가케루는 왠지 겸언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달리면서 삼륜차나 비료 봉지를 살핀다는 사실을 주인은 모른다. 모르는 채 그런 것들을 움직이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케루는 왠지 유쾌해졌다. 상자 속의 평화로운 낙원을 살며시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처마 밑에 놓여진 삼륜차와 밭 한구석에 뒹굴고 있는 비료 봉지. 가케루는 그런 것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비 오는 날에는 삼륜차가 차양 밑으로 들어가고, 비료 봉지의 내용물이 서서히 줄어들다 마침내 새 봉지로 바뀌어 있기도 했다.
신동과 무사는 마작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다.
“ ‘월요일 심야에 방송! 기대하세요!’라고 해놓고는 날짜로 보면 화요일 오전 1시 입니다. 신동 씨, 이상하지 않습니까?”
“심야 0시를 지났다 해도 잠자리에 들 때까지 ‘월요일’은 이어진다는 해석이겠지만, 아닌게 아니라 혼란을 초래하는 표현이군.”
- 멀고 험난한 하코네 산 中
어둠 속에서 무릎을 껴안고 욕조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하얗고 둥그런 빛이 흔들거렸다.
“아! 가케루, 외등인가 했더니 달님입니다.”
열어둔 창문 저편 봄의 밤하늘에 으스름달이 떠 있었다.
“이것 보세요.”
무사는 양쪽 손바닥을 살며시 물 속으로 집어넣고는 미소지었다.
“건졌습니다.”
“정말이네요.”
가케루도 덩달아 즐거워져 웃음이 나왔다. 무사의 손 안에 작은 달이 백옥처럼 부드럽게 번져 있었다.
- 드디어 연습 시작 中
육상이 자신에게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일반 세상에서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일에 매일 죽을 힘을 다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유쾌한 기분도 들었다.
- 기록대회 中
가케루는 알고 싶었다. 강인함을, 그리고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는 처음이었다. 이제까지의 가케루는 늘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몸이 요구하는 대로 달렸다.
‘아! 만일 하이지 선배의 말대로 달리는 것에 대한 이 마음이 사랑과 흡사한 거라면……. 사랑이란 그 얼마나 일방적이고 보답 받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가케루는 생각했다.
한번 매혹되면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좋고 싫은 것도, 득실도 초월하여 단지 끌려들어간다. 행선지도 알지 못한 채 깜깜한 어둠에 집어삼켜지는 별들처럼. 힘들어도, 괴로워도,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어도 달리기를 그만둘 수는 없다.
단백질이 들어간 레몬물을 나눠주기 위해 가케루도 양지로 발을 내디뎠다. 햇살이 정수리를 직격했고 매미가 갑자기 한꺼번에 울기 시작했다. 구름은 떠내려가 버려 이제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하늘이 파랗구나.”
여름이었다.
-한여름날의 구름 中
장거리는 폭발적인 순발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시합 중에 극도로 집중해서 기량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두 다리를 번갈아 앞으로 내밀며 담담하게 나아갈 따름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경험한 적이 있는 ‘달린다’는 단순한 행위를 정해진 거리만큼 지속하면 될 뿐이다.
‘이걸로 충분할 걸까?’하고 허를 찌르며 떠오르는 불안감, 충분하다고 확신하기가 무섭게 ‘그래도 실패하면…….’ 하고 솟아오르는 두려움. 육체와 정신은 연마하면 연마할수록 무너지기도 쉬운 법이다. 감기도 걸리기 쉬워지고 배탈도 나기 쉬워진다. 정밀기계가 소량의 먼지로 허무하게 망가지는 것처럼.
-영혼이 외치는 소리 中
‘지금까지는 답답하고 개운치 않은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기만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면 안 되겠다. 후지오카처럼, 아니 후지오카보다도 빨라지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달리는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기요세 선배가 말하는 강인함일 것이다.’
-예선대회 中
분노는 두려움과 자신 없음의 이면이다. 기요세는 믿으라고 했고, 하나코는 두려워하지 말고 인정 하라고 가케루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자기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다시 겨울이 오다 中
‘하나짱, 넌 언제나 열심히 하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구나. 더는 열심히 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우리를 응원해 주는 거지?’
난방으로 따뜻해진 버스 안의 공기는 자고는 싶은데 잠의 심연으로 빠져들지 못할 때와 비슷해서 정신이 멍하고 거북스러웠다.
고통스럽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괴롭다. 그 두 단어만이 뇌에 소용돌이 치고는 등골을 타고 내려와 몸 안에 가득 찼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떤 타이밍으로 투료하느냐가 어렵단다.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이 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어떻게 패배를 인정할 것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법이거든. 어떻게든 역전할 방법은 없을까 하고 필사적으로 승부를 벌이다 그래도 상대가 공격해 오면 거기에서 투료하는 거다. 바둑판이 전부 차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그걸 비난한다든지, 싸움을 도중에 그만뒀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좋은 타이밍에서 투료하면 ‘물러날 자리를 안다.’며 패자도 칭송을 받는다. 이기고자 하는 자세를 아슬아슬한 마지막 순간까지 관철했기 때문이다.”
기대된다.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이제껏 없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이토록 기다려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가 기다리는 장소로 빨리 달려가고 싶다고 원했던 적도 지금까지 없었다. 고통을 뛰어넘어 달리는 기쁨을 느끼며 다시 만나기 위해서, 만나서 함께 달린 것을 기뻐하기 위해서 내일도 싸울 것이다. 온 힘을 다할 것이다.
-저편을 향하여 中
유키는 누군가와 겨루기보다는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앞으로의 방향과 대책을 궁리하며 어떻게 자신이 힘을 발휘하여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그래, 이 외로움이 장거리다 별도 뜨지 않는 밤하늘 아래를 여행하는 듯한 고독과 자유. 한계까지 다다른 심장 박동을, 식힐 겨를도 없이 열기를 뿜어내는 땀에 젖은 살갗을, 혈액과 연동하는 근육의 신음소리를 니코짱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정해진 길을 달려가고, 정해진 장소에 이르기까지 다른 어떤 사람도 다가오는 일 없이 니코짱은 홀로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싸움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킹은 소심한 만큼 자존심이 강했다.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리지도 못했다. 소심한 본성을 누군가가 알게 되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기에 겉으로는 사교적이고 명랑한 성격인 척했다.
그 덕분에 함께 떠들고 즐길 수 있는 친구는 많은 편이고, 지쿠세이소 주민들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킹이 어려운 당했을 때 도와줄 사람이 있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 해도 자신이 없었다.
물리적으로 같은 길을 달려도 도달하는 장소는 제각기 다르다. 어딘가에 있을 나만의 결승점을 찾아 달린다. 생각하고, 망설이고, 틀리고, 다시 시작한다.
‘어두운 상자 안에서 생장을 계속하는, 왠지 기묘하고 불쾌한 식물 같다’
기요세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덮개에 씌워진 채 뿌리가 말라 썩어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탐욕스럽게 가지와 잎을 키우려 했다. 육체적인 한계에 몰려 있는데도 달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다.
기요세는 달리기를 그만두면 죽을 것만 같았다. 정신이 죽고, 이윽고 육체도 쇠퇴할 것이다. 그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소용없는 행위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경기의 세계에서 계속해서 달렸다. 그것밖에 자신의 마음을 살아 있게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성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