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아무래도 방구석이 제일 좋아

uragawa 2018. 7. 5. 19:45

자고로 생물이라면 배가 고플 때는 뭔가를 먹으면 되고 컨디션이 나쁠 때는 얌전히 자면 된다. 하지만 기계는 상태가 나빠도 대체 뭘 해야 호전되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조용하게 그리고 갑작스레 상태가 나빠진다. 마치 기업의 전사로 일선에서 싸우다 과로로 쓰러지는 아버님들 처럼, 혼자 있을 때 술을 홀짝홀짝 마시다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어머님들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망가지는 것이다.
- 백설공주의 독 사과 中



“그야 남성이라는 생물과 도무지 인연이 없는걸요. 가끔씩 생기는 만남도 살리지 못하고, 세상의 절반이 남성인데도.”
“에이, 그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이에요.”
뭐, 그 말도 맞다. 남성과의 사랑에 인연이 없다고 해서 동성애자라는 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논법이리라.
“미우라 씨는 여자를 보면 욕정이 생겨요?”
“지금으로서는 아니에요. 귀엽게 생긴 애를 보면 으흐흐 침을 흘리기는 하지만 욕정이 생기는 건 남자를 봤을 때예요”
“그러면 좀 판단하기 애매한데요.”
“여자에게 욕정이 생기면 뭐, ‘사랑의 대상도 분명하게 좁혀졌고 하니, 어디 한번 헌팅해 볼까’라며 신나게 거리로 나서겠죠.”
“연애의 대상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헌팅하느냐 마느냐는 그 사람의 성격이라서, 마음이 확실해졌다 한들미우라 씨에게는 헌팅은 무리일 것 같은데요.”
안은 그럴싸한 지적을 하고나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과 나의 인생극장 中


신이 나지 않을 때는 신이 나지 않는 대로, 천천히 꿈지럭대며 가 봅시다.
-훌쩍 떠난 오사카 여행 中



하나의 법칙을 발견 했다.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있는 여성은 거리에서 나눠 주는 전단지를 결코 받지 않는다. 아니, ‘헌책방 전단지’라고 한정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들은 절대로 손을 내밀지 않는다. 지금까지 2개월가량 전단지를 나눠 줘 본 결과 발견한 법칙이다.
-왜 하필 나예요? 中



“너야말로 감기는 괜찮아?”
“드러누워서 만화를 읽었더니 좋아졌어.”
다시 말해 평소대로 생활했더니 병이 나은 것이다. 열어 둔 창문에서는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종아리 털이 싫은 건 아니다. 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종아리 털도 환영하고픈 아이템이다. 하지만, 하지만 종아리 털이란 건 평소 대중에 노출되어도 되는 털인가? 가슴 털은 당당히 내보여도 괜찮다. 하지만 종아리 털은…… 종아리 털은 봐도 아름다운 게 아니지 않은가!
-종아리 털이 싫어서가 아니야 中



한편, 나는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지금까지 시판된 진통제 중에 안 써 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약이나 약효가 느리고 지속력이 부족했다. 복용하고 30분이 지나서야 효과가 나기 시작하는 데다 지속력도 두어 시간밖에 되지 않아서 별 의미가 없었다. “이러다가 애 나오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배가 아픈데,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때는 ‘절반은 친절함’으로 만들어진 ○퍼린(버퍼린)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절반은 친절함’이라면 가격도 반으로 내려라”라고 욕설을 퍼붓고 싶어지는 이유다.
-비밀은 아무것도 없다 中



무슨 만화일까? 차 안에 있으면 남이 읽고 있는 것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성격이라 나는 고개를 빼들고 페이지를 훔쳐보았다. 『시마부장』이었다. 정력적으로 일을 해치우로 밥을 먹고 여자를 안는 시마 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평일 미술관에 가면 中



저 자식이 진짜. 한마디 할 때마다 화가 치민다.
-공놀이 中



키가 아직 아빠의 허리꼐밖에 오지 않는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아빠 옆에 바짝 붙은 채 문가에 서 있다. 아빠는 자그마한 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고 이따금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러다 딸의 머리카락이 엉킨 걸 알고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가만히 풀어 준다. 그사이에도 소녀는 입을 다문 채 아주 얌전히 안심한 듯 아빠에게 폭 안겨 있다. 그래, 소녀가 전철 안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겠지.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사춘기는 소년소녀일 때 딱 한 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한 계절이라는 걸 요 몇년 사이에 이해했다. 분명 갱년기도 사는 동안에 몇 번이나 찾아온 사춘기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두 번째 푸른 과실 中



켄 씨……. 이렇게 속삭이기만 해도 내 가슴은 살살 녹는다. 나는 히로스에 료코가 싫다. 왜냐하면 영화 「철도원」에서 켄 씨아 함께 연기했기 때문이다. 젠장, 히로스에! 너무 부럽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켄 씨의 등에 새겨진 사자와 모란을 본 적도 없는 주제에! 그렇다. 그저 볼썽사나운 질투다.
-거친 사자의 포효를 들어라 中



미안, 동지 가미하라, 동지 다나카여! 나는 권력 앞에 쉽게 무릎 꿇었다. 책이 잘 팔린다는 소리에 너무나도 간단히 전향해 버린 것이다. “잘 팔리면 새 가방을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은 슈퍼에서 받은 비닐봉지를 가방 대신에 쓰고 있는 걸…….” 돈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약한 내 마음, 바다로 흘러가서 물고기에나 잡아먹혀라!
-내가 불인 이름이라고 단정하지 마세요!(눈물) 中



최근 들어 산다는 건 ‘내일로 넘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를 넘겨서 내일로 미루고 미루다 보면 결국에는 그것들이 모여 오호츠크해의 거친 파도보다 커다란 파도가 되었다가 어느 날, 죽음과 함께 잔잔해진다. 그 바닥의 밑바닥에는 풀다 남은 문제집이 마리아나해구를 메울 기세로 침전해 있을 것이다.
-번외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