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기본적인 물적 토대를 필요로 하며, 이 기본적인 물적 토대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의 조건이기도 하다. 춥고 배고픔이라는 가난과 그런 결핍상태의 지속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릴 수 없게 한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 이 모순적 태도는 남에 비해 내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려는 인간의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속성은 필연적으로 나와 다른 남을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차별, 억압, 배제하는 데 동의하도록 작용한다.
우리는 경쟁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욕망을 넘어 탐욕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국가가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대신 폭력의 주체가 되고, 구성원들 사이에 "당신의 몸을 소유한다"의 명제가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지 못한 사회에서 힘은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최소한의 상식'이라는 법에 호소하지만, 이 땅에서 법은 오랫동안 표트르 크로폿킨의 말처럼 '힘센 자의 권리'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가진 게 없고 힘없는 약자들, 그리고 소수자들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느낌 정도를 넘어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사람에게 배고픔의 현상은 있어도 '생각고픔'의 현상은 없다. 사람은 몸과 정신으로 구성된 존재로서 몸은 생존을 위해 영양분을 섭취하고, 정신작용에 의해 머릿속에 사유세계를 형성한다. 몸속에 들어간 영양분은 분해되어 건강을 유지하게 하고 찌꺼기는 배설된다. 신진대사를 통해 배고픔을 느끼는 몸은 새 영양분을 섭취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이 배고픔 현상이다. 반면에 우리가 한번 품은 생각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생각고품의 현상이 없다.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과 충돌하는 생각이 바깥에서 다가올라치면 가차없이 배척한다. 생각의 성질이 머물기, 즉 고집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내가 기존의 생각을 고집함으로써 그것을 수정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배움은 이미 멈춘 것이다.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대부분의 한국 사회 구성원들처럼. 각자가 자기 생각의 출처조차 묻지 않은 채 기존 생각을 고집한다면,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지난 시절에는 일제가 망하고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사회 상층에 빈자리가 생긴 데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사회 상층의 자리가 많이 늘었다. 서민 출신 자식들이 들어갈 틈새가 있었다. 오늘날엔 그 자리들이 이미 채워졌으며 '고용 없는 성장'의 저성장 시대, '수축사회'가 말해주듯 사회 상층의 자리뿐만 아니라 '괜찮은' 일자리도 줄고 있다. 병목현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이고 유치원 때부터 자기들만의 트랙(영어유치원-사립초등학교-국제중학교-특목고-SKY 또는 미국의 MBA 등)을 가진 특권 부유층의 자식을 서민 출신이 따라잡아 용이 될 가능성은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도 낮다.
타자의 고통이나 행복의 감정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 공감 능력인데, 이 공감 능력은 진보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내가 자유인을 지향한다면 타자의 고통과 불행을 공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 고통과 불행을 줄일 수 있도록 행동에 나서야 한다. 내가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바란다면 타자 또한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관심은 잔인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매우 활동적이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관심은 무엇보다도 추악한 권력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 주기 때문이다." 『경제적 공포』를 쓴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말이다.
이 땅의 지배세력이 국민의 절대다수를 무시하면서도 계속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고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근본적이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한, 앞으로도 강정과 밀양의 분통함, 세월호와 가습기 참사의 참담함, 굴종과 복종을 강요당하는 노동자들의 고통과 불행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장래를 설계하기 어려운 청년들의 삶도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이디 때문이다.
흔히 한 나라의 인권 현실을 알고자 하면 두 사회계층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이주노동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감옥에 갇힌 재소자들이다. 이주노동자들은 내국인에게서 쉽게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재소자들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죄를 지었으므로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통념이 작용하기 때문에 인권 사작지대의 놓이기 쉽다 이 두 계층은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므로 이들의 인권을 끌어올리는 만큼 그 나라의 인권 수준은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내국인들의 사회문화적 소양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교 우위'를 확인하고 만족해하는 저급한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주노동자들을 차별, 혐오하기 쉽고 재소자들의 인권 신장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본디 나를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공감 능력이나 감정이입에 의해 남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법이다. 한국에서 타인을 무조건 배척하는 혐오 문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는 기자의 물음에 어느 지혜로운 이방인은 이렇게 응답했다.
"타자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이해하려면 나부터 독립적인 주체가 돼야 한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면 자기 정체성부터 확립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 혐오가 만연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찾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 과정에서 나조차 몰랐던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한 곳에 머물려 해서는 안 된다."
돈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인권은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올바른 생각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을 해야 한다.
결 : 거칢에 대하여
[트위터책빙고 2020]
16. 사회, 정치, 인권에 대한 책
예, 트위터 책빙고 하나 채워 보려고 산 책이고요.
(표지 디자인 마음에 들어서 샀다고 ㅋㅋ)
에세이라 다행이었어.
현실도 버거운데
글로 한 번 더 확인 사실 당하는 느낌. ㅋㅋㅋ
+
공감 능력을 키우고 좀 더 넓게 바라볼 것.
나 하나 관심 가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되지 않는다라는 생각 갖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