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uragawa 2020. 4. 15. 22:30

정신을 차려 보니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자신이 있었다. 환갑을 넘긴 남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쑥스럽지만, 문득 외로워서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인간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고독을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쁜 나날에 가려져 있던 고독이란 놈은 한가해지는 순간 빠끔히 고개를 내미는 모양이다.



대일본석유회사에서도 출산을 계기로 회사를 그만둔 여직원은 많았다. 다들 아이를 키우고 가사노동에 전념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이처럼 이전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여자도 있는 걸까.
"역시 여자는 파트타임 정도가 고작일까."
"아버지 잠깐만, 마이 앞에서 그런 소리 절대 하지마."



인간관계라는 건 원래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단란한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려면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닐까.



"아냐, 그건 아니지.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인간은 혼자 살면서 고독을 씹어 보기 전까지는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단 말이다."
"엔카 가사 같은 얘기네."
"게다가 아이를 낳는 나이대를 생각해 봐도 말이지, 남자는 몇 살이건 상관없지만 여자는 그런 것도 아니잖냐."
"잠깐 묻겠는데, 아빤 손주 상대로 놀아 주는 게 재미있어?"
"그럴 리가. 힘에 부칠 때가 많지."
"아빠가 애들을 봐 준다고는 하지만 그건 고작 마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잖아? 전업주부라도 돼 봐. 하루 24시간 내내 계속 애들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한다고."
"남자랑 여자는 다르잖아. 실제로 고향의 할머니는 달랐다고."
"왜 안 나오나 했네. 남자랑 여자는 다르다는 소리. 우리 부장들 중에서도 아직 그런 생각을 하는 남자들이 몇 명이나 있는데 정말이지 민폐덩어리라니까."
"하지만 유리에, 이것만은 말해두마. 결혼을 빨리 하는 편이 좋아."
"네에, 네. 아빠랑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결혼하기가 싫어지네요."



"머시마들, 잘 들으래이. 말만 곱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이다."
"맞다, 그런 표면적인 것만으로는 안 되제. 여자가 우습나."



엄마가 아이와 함께 있는 광경은 행복의 상징이 아니었다. 육아에서 극상의 기쁨을 느낀다고 내 멋대로 그렇게 믿어 버렸을 뿐이다. 그저 흔히들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을 강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리에가 나중에 결혼해서 이런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내 딸의 일이 된다면, 조만간 노이로제에 걸리겠지.



"기미에는 내 자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화가 끊임없이 치솟는 모양이야."
"어째서?"
"이런 남자가 왜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내 곁에서 자고 있지? 대단한 구석도 없으면서 잘난 척 거만하게 굴어대기나 하고, 란 생각이 든다고."



"기미에가 말했거든. 말하는 도중 여자가 갑자기 입을 다무는 건 그걸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포기한다는 건 무슨 의미지?"
"이 이상 남편과 대화해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단념하는 거야."



"여자란 이렇게까지 해 두지 않는 이상 외출조차 할 수 없는 건가."
유리에가 괴로운 표정으로 편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첫째 날 저녁은 냉장고에 넣어 둔 난반즈케를 드세요, 라네. 어라, 설마 엄마가 만든거야?"



"당신 진짜 비겁하네."
"무슨 소리야?"
"남편은 밖에서 일하고 아내는 집을 지킨다는 역할 분담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잖아."
유리에가 무엇에 대해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남편이 정년퇴직을 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데? 아빤 집에 있잖아. 이제 역할분담은 끝난 거 아냐? 그런데도 엄마에게 집안일을 미루는 건 어째서냐고."
"그건 그렇지만, 이 나이를 먹고서는 이제 와 집안일이라니 나한테는 귀찮을 뿐이라고. 익숙한 사람이 하는 쪽이 낫지. 사람은 각자가 잘하고 못하는 일이 있는 거니까."
그 순간 유리에가 시선을 비키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겨우 설거지를 끝내고 "영차"하며 허리를 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허탈함.
설거지를 해도 밥을 먹고 나면 또다시 설거지거리가 나온다.
청소를 해도 다음 나링 되면 희미하게 먼지가 쌓인다.
빨래를 해도 다음 날에는 엄청난 양의 빨래가 생긴다.
이 무의미한 작업을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하지 않으면 청결한 생활은 불가능한 모양이다.



"여자 선배들을 보면서 남자 중심 사회에서 일하는 데에 녹록한 것은 없다는 걸 알게 된 거 아닐까요? 회사 상층부는 얼핏 보기에 일하는 여자들을 이해하는 척 하고 있지만 속내는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저도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그런 분위기를 오싹할 만큼 느꼈어요.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과 상관없이 누가 못생기고 누가 건방진지 뒤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데다가, 보람이 느껴지는 일은 전부 남자 직원들이 가져가 버리고......"



―당신 세대의 남자들이 죄다 죽지 않으면 일본은 더 나아지지 않을 거란 뜻이야.
그게 무슨 얘길 하고 있던 때였더라.
아아, 그래. 마이가 아직 어린아이를 맡기고 일을 나간다고 해서 총명한 여자라면 출산휴가도 육아휴직도 쓰지 않은 채 집에 들어앉을 거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했을 때였다.
그것도 잘난 체를 하면서.
게다가 그런 것도 모르냐면서 내가 가르쳐 주겠다는 식의 말투로 이야기했었다.
유리에에게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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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 읽는 내내 혈압 터질까 걱정하면서 책 읽기 처음이네.
여자를 뭐로 생각하는 건지 ㅋㅋㅋㅋㅋㅋ

난 그래서 아저씨가 개조되는 이야기인 줄 알았지 뭐예요???



+
후겐병... 남편 때문에 생기는 병 ㅋㅋㅋ 
어째서 병 있는 남자들의 행동 때문에,
참고 참기만 하는 여자들이 이런 이름을 가진 병으로 불려야 하는 거야?
아 화딱지나 죽겠네.



++
엄마는 여행을 떠나도 상사인 ㅋㅋ 남편의 허락도 받아야 되고요
음식도 다 해놓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알아서 밥 못 챙겨 먹을 거면 나가 뒤졌으면!!!!

난반즈케:
튀긴 음식을, 식초, 술, 소금, 파, 고추 등을 섞은 국물에 재운 반찬.

아니, 왜 튀긴 음식을 굳이 이렇게 국물에 재워서 먹는 거야 정말로 ㅠㅠㅠ
했는데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보니 맛있게 생겼어 ㅋㅋ



+++
초반에 90여 페이지 내내 헛소리하는 남자를 보며 쌍욕을 했고
3분의 2가 지나도 그다지 변함이 없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ㅋㅋㅋ 버틸 수 있는 분은 읽어보세욬ㅋㅋ
사실 결말도 완전히 개조된 느낌은 아니잖아
첫째 손녀 아오이가 똑똑하지 않았으면 할아버지 혼자 아이 둘 보기 수월한 것 아니었고,
손자 손녀도 자주 보는 할아버지한테 마음을 연 거지.
할아버지가 많이 개선된 느낌은 못 받았다고... 

휴, 읽는 내내 화가 안 풀려서 힘들었다 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작가의 다른 책은 궁금해졌음.

아 그리고 책 표지가, 개인적으로
2000년대 초반 스타일이어서 좀 올드하다 느꼈는데
원서 일러스트가 더 내 취향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