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

uragawa 2013. 4. 12. 08:30

여자는 다른 여자의 존재에 민감해서 남자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지요. 밤에는 더 농밀해지고 더욱 정열적이죠. ……알죠? 남자는 기꺼이 그걸 누리고, 여자는 점점 도를 더해가고. 그런 식으로 되풀이 되는 거죠.”


배신의 정의는 무엇일까? 신뢰를 짓밟히는 것이 배신일까? 그러나 신뢰는 짓밟히는 바로 그 순간에 무너지고, 결국 남는 것은 자존심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존심이 바로 배신이라는 행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나 자신이 무섭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여자에게 실컷 이용당하고도 눈치 채지 못한 한심함. 스승이란 든든한 방패를 잃어버리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연구세계에서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 그런 현실이 눈앞에 들이닥쳤는데도 무감각한 채, 어떻게든 해보려는 기력조차 잃어버린 나 자신이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은 무라카와나 오타 하루미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속에 있는 뭔가를 아낌없이 내주고 꺼내주면 누군가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천진하게 믿고 있는 그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요.”



“당신의 마음에 박힌 얼음기둥도 언젠가는 녹을 거예요. 하지만 뻥 뚫린 구멍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겠지요. 그 아픔은 계속 남아 그곳을 지나는 바람소리가 당신을 잠 못들게 하는 밤도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나는 이 아픔을 언제까지고 맛보고 살고 싶어요. 그것이 내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기 위한 증표가 될 거예요. 내 아픔은 나만의 것. 내 공허는 나만의 것. 난 누구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을 나만의 것을 이제 겨우 손에 넣었답니다.”

- 결정(結晶)





이 집의 고요함과 어둠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의 침전물이 표출된 것이 아닐까?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내 앞에서 음식을 먹는 마사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감정의 배선 구조가 전혀 다르다. 마치 외계인과 식사를 하는 기분이다.



아무리 고민과 괴로움이 있어도 뒤로 미뤄둔 채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잔다. 뒤로 미뤄놓을 수 있는 구조로 생겼다니 마음이란 의외로 잔혹하다.



가슴이 아프다. 살아 있는 한, 가슴은 아프다. 행복해 죽을 것 같을 때에도, 고통스러워 미칠 것 같을 때에도.

- 잔해(殘骸)





엄청난 불행이 예정되어 있으면 그 전에 맛 볼 수 있는 모든 행복이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달콤하게 느껴진다.



“나는 나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뭐가 뭔지도 모르는데, 모든 일들은 착착 진행이 되고 있어. 근데 따라가질 못하겠어. 그래서 초조해하는 나 자신한테 화가 난 거야. 내가 너무 싫어.”

- 예언(豫言)





놀고 있네. 내가 무엇보다 싫어하는 것은 내 구역에 타인이 침입하는 것이다.

-수장(水㢡)






사람은 탄소로 이뤄져 있지만, 탄소에는 감정이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어쩌다 보니’ 사람의 모양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죽음을 선택할 때 그 이유가 주변 사람들과 전혀 무관치는 않겠지만, 누구 한 사람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다.

- 냉혈(冷血)





단둘이서 서로 의지가 되어주고 서로 욕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야 실감했다.

- 귀가(歸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