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밤의 기억들

그레이브스는 버스를 타러 가기 전에 좀 쉬고 싶었다. 주변 경치가 달라지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낯선 냄새가 나면 예민해지는 성격이라 이동할 때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그는 잠을 청하는 대신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한 채 차창을 스치며 지나는 마을과 도시를 응시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고 모든 곳에서 악마를 보는 사람들과,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전혀 악마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공포에는 한계가 있다거나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의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편안한 생각을 다시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열망도 있었지만, 그런 마음도 사그라진 지 오..

한밤의 도서관 2015.01.08

두 번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지금까지 만나오면서 고다는 얼굴뿐 아니라 머릿속도 개새끼나 다름없다는 것을 몇번이나 실감했다. 그것도 그냥 개가 아니라 미친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방금 전까지 꾸던 꿈의 세계가 얼마나 이상한 곳이었는지 느닷없이 깨닫는다. 어째서 꿈속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는지 신기하기 그지 없다. 일과 돈이 없는 사람에게 하루가 얼마나 긴지 뼈저리게 느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산 우롱차를 마셨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노숙자가 나무 사이에다 박스로 집을 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것이 바로 내일의 내 모습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두 번째 읽은 소네 케이스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최근에 [코]를 다시 읽고 나서 한번 더 읽으려고 펼쳤음역시나 재미있음 ㅋㅋㅋㅋ..

한밤의 도서관 2014.12.27

제로

‘밖’으로 눈을 돌리면 다양한 가치관을 이해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 다양한 업무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정년까지 무사히 일하는 삶이 ‘행복한 인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만, 행복에 단 한 가지 형태만 있다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 인간은 새롭게 첫걸음을 내딛을 때나 다음 무대로 나아갈 때 출발선 위에 서는데, 누구나 제로 상태가 되어 출발선에 선다는 것이다. 결국 ‘곱셈의 답’을 추구하는 당신은 현재 ‘제로’인 백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제로에 어떤 수를 곱해도 결국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제로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출발선 위에 설 때는 ‘곱셈’이 아닌 ‘..

한밤의 도서관 2014.12.26

밤의 나라 쿠파

“나 이제 정신 차렸어. 내가 정말 미쳤나 봐. 여보, 우리 다시 시작해.” 아내는 바람을 피운 사실을 반성하고 말했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친구들과 강습을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낮에 곧잘 나가 젊은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꽤 오래 사귄 것 같은데 남자에게 돈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진실한 연애라기보다 서로 노는 관계였던 건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나는 오래도록 속아 온 사실에 놀라서 내가 봤던 가정의 모습은 환상이었나, 하고 망연자실해졌다. 내가 기업 주가에 일희일비하는 사이에 우리 집 주식은 폭락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란 위기에 처하면 주위의 누군가와 의논을 하고 싶어 하는 생물이니까. ‘의논을 하는 편이 좋을까?’ 하는 것조차 의논하고 싶어지는 거 같아.” 최근..

한밤의 도서관 2014.12.11

안구기담

높이도 폭도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검은 벽이 눈앞에 가로막혀 있는 느낌이었다. 고통스럽거나 슬픈 차원을 넘어 나를 둘러싼 이 세계 자체가 절망의 상징처럼 보였다. -재생 中 “이봐, 그딴 하찮은 선입관은 버려. 애초에 당신한테는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를 이성적으로 상대화해서 파악하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어. 안타까운 일이야. 아주 안타까운 일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럼 묻겠는데, 당신은 문어나 오징어는 거부감 없이 입에 넣을 거야. 그렇지? 해삼이나 갯가재도 좋아하고, 회나 낫토도 맛있게 먹지? 그런데 예를 들어 텍사스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 그게 얼마나 혐오스러운 행위로 보일지 생각해봤어? 그들이 보기에 일본인은 야만적인 음식 문화를 가진 집단으로 보일거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

한밤의 도서관 2014.12.02

몽위

인간은 진심으로 오싹했을 때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공포에 쥐어뜯겨 움푹 팬 부분을 평평하게 고르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은 헛되이 하루 또 하루 얇은 종이를 떼어내듯이 흘러간다. 뭔가를 희박하게 만들고 조금씩 빛바래게 만들어간다. 기대를 품었던 시간은 실망으로 변하고 이윽고 체념에 들어간다. 마사지사에게 몸을 맡기고 끄덕끄덕 졸고 있으려니 낮에 본 몽찰의 잔재가 조금씩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반쯤 잠든 상태가 되면 히로아키는 항상 이즈미 교카의 소설이 떠오르곤 한다. 수술실에서 마취주사를 맞으면 자칫 마음속에 감춰진 비밀을 고백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혹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비밀을 감춰두기란 어려운 일이다.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

한밤의 도서관 2014.12.01

살인마 잭의 고백

미쿠리야는 장갑을 벗으며 석연찮은 듯이 말했다. 이 또한 이 사람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던 말투였다.“난처하게 됐습니다.” “소화기관에는 위, 장 소장, 대장, 췌장, 간이 있습니다. 순환기관에는 심정, 비장, 신장이 있고요. 호흡기관이라 하면 폐, 비뇨기관에는 요관에서 방광까지 있을 테고요. 생식기관은 난소 자궁이 있습니다만, 장기란 장기는 죄다 적출된 상태입니다. 잘 아실 테지만 사망 추정 시각이라는게 직장直腸 내 온도를 측정해야 알 수 있는 것인데, 이건 뭐 직장 자체가 없으니…. 음식이 소화된 상태라도 알아보고 싶은데, 위가 있어야 말이죠.” 익명성은 안전지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인간은 안전지대 안에서 마음껏 악의나 독선을 드러낸다. 그 과격함에 흠뻑 취한 채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에 희열을..

한밤의 도서관 2014.11.26

모즈가 울부짖는 밤

이대로 야음을 틈타 도망치기는 쉽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놈들은 계속해서 그를 찾아내 죽이려 들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쫓기고 위협당하며 살아가긴 싫다. 어떻게든 여기서 결판을 내야 한다. 무로이는 진땀을 흘리며 제 몸을 지키려는 듯 주먹을 쥐어 가슴 가까이 끌어당겼다.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의 의연한 태도는 어디가고, 그 곳에는 죽음의 공포에벌벌 떠는 초로의 남자만 있었다.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지고 땀에 젖은 백발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보고 있기 애처로울 정도였다. “쏘지 마십시오. 보면 알잖습니까. 무로이 부장은 이미 죽었어요. 빈껍데기를 쏴봤자 아무 의미 없습니다.”“아니요, 쏠 겁니다.”구라키가 스스로 다짐하듯 내뱉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

한밤의 도서관 2014.11.25

다크 플레이스

죽은 우리 가족이 최고라는 일그러진 애정이 샘솟았다. 순간적으로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엄마는 내가 얄팍한 겨울 부츠를 벗는 걸 도와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내 발가락 하나하나를 손으로 따뜻하게 비벼댔다. “먼저 엄지발가락을 따뜻하게 하고, 이번에는 새끼발가락.” 이 장면에서 버터 바른 토스트 냄새가 났지만, 실제로 그런 토스트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기억 속에서 내 발가락은 아직 모두 성한 상태였다. 거실에 책장들이 죽 있었지만, 꽂혀 있는 책이라고는 자기계발서 밖에 없었다. 《햇살을 열어젖혀라!》, 《파이팅 걸》, 《자책은 이제 그만》, 《일어서서 당당하게》,《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자》,《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계속해서 기운을 북돋우는 당찬 제목들이 주르륵..

한밤의 도서관 2014.11.20

두번째 코

내게도 그런 인생을 보내라는 건가. 농담 마라.아버지는 의무교육이 끝나자마자 조그마한 마을 공장에 취직해 정년까지 거기서 일했다. 평생 이루어 낸 일을 들자면 그저 가족을 먹여 살리고, 불면 날아갈 듯한 이 작은 집의 대출금을 변제했을 뿐인 시시한 남자다. 환경 선진국인 이 나라에 이미 화력발전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력은 원자력 발전소와 ‘인발’이라고 불리는 인력 발전소에서 공급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에 형은 상장이 취소된 후 칸토무라 인발에 보내졌다고 적혀 있었다. 그곳에서 사회를 위해 죽을 때까지 발전용 자전거를 밟는 것이다. “인발이라고 해도 말이죠. 이제 자전거를 밟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건 휴머놀이라고 해서, 인간을 원료로 한 새로운 바이오 연료입니다. 이 병 속에 들어 있는 건 ..

한밤의 도서관 2014.11.15

파이브

베아트리체는 그날 이후 이 곡을 다시는 듣지 않았지만 음 하나하나가 귀에 익고,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몇 달 동안이나 남아서 맴돌았던 향냄새, 꽃과 슬픔의 냄새, 특히 혀에 느껴지는 쓴 금속 맛. 죄책감이란 천천히, 끝까지 맛보게 될 무엇이었다. 그 남자. 왜 내 머릿속에서는 범인이 늘 남자일까? “어제…… 노라의 시신을 확인했어요.” 그는 쥐어짜듯 단어 하나하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맞았어요…… 그리고 아내가 아니었어요. 예전의 노라가 더는 아니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이제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냥…… 사물이었어요.” 그의 온몸이 한 번 떨렸다. 그는 몸을 돌려 바지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베아트리체는 그가 다시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

한밤의 도서관 2014.11.15

날개 달린 어둠

“창아성에 장미는 피지 않아요. 유가오 씨. 붉은 장미도 노란 장미도 파란 장미도…… 검은 장미조차도.”빛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은 피지 않는다. 태어나는 건 하얀 알비노 뿐이다. “지금까지의 얼개로 흘러간다면 하얀 까마귀도 사라져버리겠죠.” 의외의 말이었다. 평면 세계를 이야기하던 중에 느닷없이 시계열時系列이 끼어 들었다. 기사라즈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척……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가 할 말을 떠올리는 데 일 초씩이나 걸릴 리 없기 때문이다. “글쎄.” 언제나 그런 말만 앞세운다. 그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다는 뜻이리라.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뜨뜻미지근하지만 등줄기를 싸늘하게 식히는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익, 하고 불길한 울림을 내며 출구 쪽으로 흘러간다. 푸른 까마귀의 발소리일까? 계단을 내려갈수록 흙..

한밤의 도서관 2014.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