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3

블러디맨

인간은 자신과 인연이 희박한 상대에게는 얼마든지 잔혹해진다. 이 세상에 자신의 힘만으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간은 태어나서 독립하기까지 가정 안에서 좀 더 큰 사회에서 살아낼 수 있는 자양분을 얻는다. 그것은 간접적으로는 부모의 사상이나 지혜고 직접적으로는 재력이나 인맥이기도 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환경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나 블론디처럼 가정에서 악영향밖에는 받지 못한 인간은 인생 자체가 기나긴 핸디캡 레이스에 억지로 참가하는 꼴이 된다. “나는 단지 복수를 하려는 것뿐이야.”“복수를 한다고?”그것은 테러리스트가 곧잘 입에 담는 말이다. 용서받을 수 없는 만행에 대한 자기변호.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살인을 신성시하려는 수많은 개똥철..

한밤의 도서관 2015.03.03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혐오감이라고 하는 말 알아?” 카렌은 혼혈답게 또렷한 쌍꺼풀이 있는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바로 솟구치는 감성같은 건데…….” “왜 검은 옷을 입은 여자만 대상으로 삼은 거지?”“그건 내 망상 때문이야. 난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을 지배하는 꿈을 꿔왔어. 검정은 악마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내겐 숲을 연상시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그렇지만 이 세상에 진짜 검정색은 존재하지 않아. 검정색을 본 순간, 그 색은 아무리 조금이라고는 해도 빛을 반사하고 있는 셈이지. 하지만 검정에 빨간색을 칠해 넣으면 검정색은 질량이 늘어나지. 알고 있나? 염색을 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야. 난 그걸 실현해보고 싶었어. 그 여자들의 피가 ..

한밤의 도서관 2015.02.25

러버 소울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인기와는 무관한 극히 평범한 사람들조차 블로그에 자신이 나쁘게 비칠 만한 글은 쓰지 않는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블로그와 트위터는 전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그러한 도구를 손에 넣은 사람은 자신을 예쁘게 포장하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이상을 현실처럼 쓰고, 실력을 과장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애당초 매스컴이 거론하는 뉴스의 우선순위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는 걸까. 세계는 항상 움직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인류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르는 중요한 뭔가가 결정되고, 무서운 재해가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어째서 그런 중대한 뉴스 사이에 불탄 집에서 남자 시체가 발견됐다는 사소한 일이 끼어든 걸까. 진실? 진실이 ..

한밤의 도서관 2015.02.12

순수의 영역

레이코는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불만은 없다. 수입에 대해서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라는 아내의 말을 빌미로, 쌓이는 부채감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깊은 내면에는 고마움을 감싼 엷은 질투심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번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든 내면의 모래언덕이다. 갇힌 세계에서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나쁜 버릇이란 건 안다. 애써 얻어 소중히 품어온 것을 무작정 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대외적인 얼굴과 내면에 지닌 모습에 괴리감이 있는 남자였다. ‘괴리’라는 말을 레이코는 속으로 되뇌어본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느냐고 스스로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곁에 잠들어있는 남편을 생각한다. 모든 일에 대해 내가 선택하고 책임도..

한밤의 도서관 2015.02.07

공허한 십자가

“유족분들에게는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죽이다니,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물론 죽음으로써 사죄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어떻게든 속죄하게 해주십시오. 어떻게 해서라도 속죄하고 싶습니다.”그 말은 아무런 무게감 없이 나카하라의 귀를 공허하게 빠져나갈 뿐이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놓고 아직도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자기혐오에 빠졌다. 자신은 아직 혼자 서 있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서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면서 전화를 기다렸다. 하릴없이 담뱃갑을 쳐다보았다. ‘담배는 당신에게……’로 시작되는 경고문을 보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십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담배를 피우고 있다...

한밤의 도서관 2015.02.02

종이 여자

나는 파도가 집어삼키기 직전, 잔양으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과 입맞춤을 하는 석양의 가두리를 눈을 뜰 수 없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토록 장엄하게 느껴졌던 광경인데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나는 비축해놓은 감정을 모두 소진해버린 사람처럼 무감각해졌다. 나는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그러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는 도리어 차 안의 긴장감을 높였다.They tried to make me go to RehabI said No, No, No “제발 괴로움을 핑계 삼아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짓 좀 그만둘 수 없어요? 당신 스스로 무기력의 사슬을 끊지 못하면 패배의 구렁텅이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돼요. 하긴 새롭게 용기를..

한밤의 도서관 2015.01.28

내일의 기억

나이를 먹고 미래가 줄어든다는 사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만큼 추억이 늘어난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아주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진료 내과 Q&A』, 『정신과 진찰을 받으려면』,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처방전』, 『편안한 마음의 스트레칭』.최근, 부쩍 이런 유의 책이 눈에 들어온다. 대개 부드러운 제목에 책의 꾸밈새도 묘하게 밝은 분위기가 나는 것이 많다. 어두운 동굴을 억지로 화려하게 전광 장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이 분해서 우는 눈물인지, 뭔가를 잃는다는 슬픔의 눈물인지, 내 자신이 가엾어서 흘리는 눈물인지, 도대체 내가 왜 울고 있는지 매번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왜 사는 걸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의 의미가 뭘까. 삶이란? 죽음이란? 젊..

한밤의 도서관 2015.01.23

심문

그래, 심문은 엄격한 규칙과 시간 제한에 따라 승부를 펼치며 상대를 때려 눞혀야 하는 한 판의 권투 시합과 다름 없었다. 시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굴다리 아래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이었다.그런 꼴을 보고 있자니 에디는 부잣집 도련님이라 배짱도 없나보다 싶었다. 그네들은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면 공포에 질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어차피 많은 것을 통제하며 살아갈 인간들인걸. 저치는 훗날 시델 쓰레기 수거 업체를 통제할 것이고, 따라서 자신도 쥐락펴락하게 될 것이었다. 이런 사실에 속이 상한 에디는 더 이상 생각을 말자며 눈앞의 문제에 정신을 집중했다. 찰리는 단언했다.“삶의 기술은 해야만 하는 일을 기꺼이 웃으며 하는 거야.”바로 그게 문제였다. 에디에게는 활짝..

한밤의 도서관 2015.01.20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

“말을 안 하면 당신을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빠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말을 안 해도 당신과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번 말할까 생각했습니다. 조금 힘들었어요. 하지만 당신의 혼잣말을 정말 좋아합니다. 영원히 듣고 싶었는데.”-파도에 꽃피우다 中 “넌 말이지, 정말로 영혼이 고독해. 사람들한테 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네 자신 속에서만 담아놓고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한다거나 다른 사람이 네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도 전혀 없지. 말도 어눌하고 머리도 모자라. 사람이란 부족한 것보다는 넘치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지. 언젠가 누군가가 나타나서 너를 구해줄 거라는 환상 따윈 빨리 버리라고. 만약 ..

한밤의 도서관 2015.01.19

기억 깨물기

무섭다고 아주 조금 생각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무서운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금과 은: 가와카미 히로미 편지에서 시선을 들어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때마침 강풍에 휘날렸는지 아직 노란 물이 들지 않은 은행잎 하나가 빙글빙글 춤추며 날아가는 게 보였다.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어 그 잎사귀를 눈으로 따라갔다.어디에서 왔니?어디까지 가니?바람이 기억의 나무를 뒤흔들어 추억의 잎사귀들이 푸르르 휘날렸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직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서 충동적으로 ‘이 사람이다’라고 정해버려도 괜찮지만, 이별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별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어느새 그렇게 우리 바로 옆에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을까.-호수의 성인: 고데마리 루이 실현되느냐 마느냐 따위, 상..

한밤의 도서관 2015.01.12

밤의 기억들

그레이브스는 버스를 타러 가기 전에 좀 쉬고 싶었다. 주변 경치가 달라지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낯선 냄새가 나면 예민해지는 성격이라 이동할 때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그는 잠을 청하는 대신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한 채 차창을 스치며 지나는 마을과 도시를 응시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고 모든 곳에서 악마를 보는 사람들과,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전혀 악마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공포에는 한계가 있다거나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의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편안한 생각을 다시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열망도 있었지만, 그런 마음도 사그라진 지 오..

한밤의 도서관 2015.01.08

두 번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지금까지 만나오면서 고다는 얼굴뿐 아니라 머릿속도 개새끼나 다름없다는 것을 몇번이나 실감했다. 그것도 그냥 개가 아니라 미친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방금 전까지 꾸던 꿈의 세계가 얼마나 이상한 곳이었는지 느닷없이 깨닫는다. 어째서 꿈속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는지 신기하기 그지 없다. 일과 돈이 없는 사람에게 하루가 얼마나 긴지 뼈저리게 느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산 우롱차를 마셨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노숙자가 나무 사이에다 박스로 집을 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것이 바로 내일의 내 모습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두 번째 읽은 소네 케이스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최근에 [코]를 다시 읽고 나서 한번 더 읽으려고 펼쳤음역시나 재미있음 ㅋㅋㅋㅋ..

한밤의 도서관 2014.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