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눈먼 올빼미

“문제의 핵심은 내가 이 모든 것에 지쳤다는 거야. 나는 범죄자로 선고받은 자보다 훨씬 나쁜 상황에서 밤을 보내고 있네. 나는 삶에 지쳤어. 나는 더 이상 나를 속일 수 없어.” 나의 유일한 두려움은 나 자신도 알지도 못한 채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나는 나와 타인들 사이에 가로놓인 두려운 심연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침묵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가능한 한 오래 나의 속마음을 남에게 발설하지 않는 것임을. 이제 만일 내가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다면, 그것은 단지 내 그림자에게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일 뿐이다. 내 마음 상태는 영원한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의 마음과 같았다. 이런 꿈을 꾸려면 더없이 깊은 잠에 빠져야만 한다. 내게는 침묵이 영원한 삶의 힘이었다. ..

한밤의 도서관 2015.08.24

인간실격

말하자면、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이다。거들먹거린다는 말로도 부족하다。경박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사람은、밥을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그래서 일하고、밥을 먹어야 한다、라는 말만큼、제게 있어 어렵고 복잡하고、그리고 협박조로 들리는 말은、없었습니다。 남들이 욕을 하면、정말이지、그게、제가 엄청난 잘못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언제나 그 공격을 말없이 받으면서、속으로、미칠 만큼 공포를 느꼈습니다。그거야 물론 누구든지、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거나、야단을 맞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만、저는 화를 내고 있는 사람 얼굴에서、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훨씬 무시무시한 동물의 본성을 봅니다。 서로 속이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누구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서로 속이고있다는 사..

한밤의 도서관 2015.08.18

남은 날은 전부 휴가

“일의 가치랑 보수는 딱히 일치하지 않으니까, 신경 안 쓰는게 나아.”“그런가요?”“잘 버는 놈들일수록 제대로 된 일 안 해. 거만한 자세로 컴퓨터 앞에 앉아 뽁뽁거리며 버튼이나 누르고 사람을 아랫사람 부리듯이 부려먹고. 그보다는 짐 나르고 물건 만드는 사람들이 훨씬 훌륭한데 말이지.” “되돌릴 생각이세요?”“가능하다면.”“그런 건 생각하지 않는 게 나아요.” 나는 스스로 의식하기도 전에 말하고 있었다. “과거만 돌아보고 있어봐야 의미 없어요. 차만 해도, 계속 백미러만 보고 있으면 위험하잖아요. 사고가 난다고요. 진행 방향을 똑바로 보고 운전해야지 지나온 길은 이따금 확인해보는 정도가 딱 좋아요.” “참 묘한 하루네.”나는 기지개를 켠 다음 손에 쥔 열쇠를 바라본다.“추억에 남는 날이 됐네.” 어머니가..

한밤의 도서관 2015.08.10

센스의 재발견

기획이란 아이디어보다 ‘정밀도’가 훨씬 중요하다.그래서 “세상을 놀라게 할 기획을 하겠다는 마음은 버리는 것이 좋아. 그런 야심이 제대로된 기획을 만들지 못한 원인이니까”라고 쓴 소리도 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평범함이란 무엇인가?대중의 의견을 알고 있다는 것? 상식적인 것? 아니다.평범함이란 ‘좋은 것’을 아는 것평범함이란 ‘나쁜 것’도 아는 것양쪽을 모두 알아야 ‘가장 한가운데’를 알 수 있다.센스가 좋아지고 싶다면 우선 평범함을 알아야 한다. 내 생각이지만 ‘아름답다’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미래가 아닌 과거에 근거한다. 향수나 그리움도 틀림없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요소가 될 것이다.기술과 센스, 기능과 장식, 미래와 과거.이런 식으로 서로 맞대응하는 시대의 ‘틈’을 모두 오가고 있다.시장은 이미 센스 방..

한밤의 도서관 2015.08.04

굽이치는 달

“팀장님…….”지하로 내려가는 층계참, 맨살을 드러낸 콘크리트가 유난히 차가웠다.“그러고도 월급 받는 거, 고마운 줄이나 알아. 죄다 지들 멋대로 불평이나 하고.”수고했어.이치코 팀장은 마지막에 그렇게 내뱉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2차 나갈 때 뿌리는 오드투알레트 향수 냄새가 떠돌았다. 이런 것이 전무가 말하는 성인 사회라면 기요미는 자신이 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로 어중간한 자리에 한숨만 쌓여가고있었다.아, 싫다. 혹시 이사무의 아이가 생기더라도 자신은 낳지 않을 것이다.그런 임신은 단순한 ‘실수’일 뿐이다. 내 인생을 바쳐야 할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없는 것보다 나은 남자’에게 온몸을 던져 의지할 수는 없다. 쓰레기통 속..

한밤의 도서관 2015.07.18

나와 춤을

맞는 말이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이 느끼며 모인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그런데 날카로운 칼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또다시 우리의 평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째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나요? 어째서 둘 다 선택하면 안 되는 거죠? 모두가 똑같은 걸 본다고 똑같이 느낀다는 법은 없지 않을까요? 그런 거, 부자연스럽지 않나요?”-주사위 7의 눈 中 “마침 점심시간이라 어디를 가나 자리가 없었어요. 어디나 회사원들로 만원이었죠. 활기가 가득하고, 스피드가 넘치고. 학생 신분에서 직장인을 바라보면 스피드가 넘치더군요. 다들 그저 점심을 먹는 것뿐인데 압도돼서 말이에요. 다들 저렇게 취직해서 일하고 있구나 생각하니까, 이도 저도 아닌 처지에서 어설픈 구직 활동을 하는 제가 너무너무 비참하게 느껴져서 가게에 도저..

한밤의 도서관 2015.07.14

천국여행

장작불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주위는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짙다.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밤의 깊이에 아키오는 몸을 웅크렸다. 어디선가 새가 울고 있다. 새겠지. 깍깍 소리가 비명처럼 들린다. 녹음이 발산하는 농후한 냄새 속을 아키오와 청년은 터덜터덜 걷는다. 나뭇잎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지면에 내리쬐는 햇빛이 흑백의 감옥 같은 문양을 공중에 그린다. 이끼에서 증발하는 수분이 풍경을 흔든다. 모습을 볼 수 없는 새가 울고 어디선가 짐승이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다.끝이 없는 나무의 바다를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간다. 이 세상에서 언어를 가진 생물은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다.꽤나 오래 걸은 것 같은데 나무의 바다 주변부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시간도 거리도 방향 감각도 인식의 틀..

한밤의 도서관 2015.07.11

교장

불안하다. 저 남자가 옆에 있으면 사소한 것도 실수라고 질책당할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기미치카’라는 이름에서 ‘기미지카 성미가급하다는 뜻’라는 단어가 연상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제 1 화 불심검문 中 인테리어 일로 숙달된 구스모토의 눈은 아무리 미묘한 색상 차이라도 구분할 수 있다. 달아난 차와 기시카와의 차, 두 대는 완벽하게 똑같은 색이다.-제 2 화 고문 中 학생들의 일기를 훑어보는 사람은 담임만이 아니었다. 교관들도 돌려본다. 누구 눈에 들어갈지 모르니 어설픈 소리를 쓸 수 없다. 두 번 점검한 뒤에 지우개를 들었다.‘각오’는 ‘다짐’이라고 고치는 게 맞겠다. 게다가 지문은 ‘채집’이 아니라 ‘채취’가 맞다. 큰일날 뻔했다. 오탈자가 있으면 한 군데 틀릴 때마다 팔굽혀펴기 스무 번의 벌을 ..

한밤의 도서관 2015.06.08

디자이너, 직업을 말하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디자이너는 예술가가 아닙니다. 물론 디자이너도 구상과 프로세스를 시각화하기 위해 예술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예술가와는 달리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합니다. 나는 당신이 책을 빨리 읽고 나서 다시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얇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나는 어떤 ‘체계’를 두지 않았다. 이 책을 읽다가 ‘일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라고 요란하게 약속하는 색인카드 따위를 사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갈 일도 없을 거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도 하지 않겠다. 버킷리스트에 다섯 개의 항목을 추가할 일도, SNS 전략을 수정할 필요도 없다. 아무도 몰랐던 비밀을 찾아낼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당신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될 것이고, 당신의 기술에 ..

한밤의 도서관 2015.05.12

붉은 낙엽

제니는 명석하고 눈치도 빨랐다. 제니가 학교에 갔던 첫날, 집에 돌아와 내게 물었다. 왜 학교 선생님은 몇 번씩 말을 되풀이하냐고. 나는 제니에게 말해주었다. 한 번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제니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치 자연이 보여주는 불평등을 자기 상황에 맞춰 이해해보려 애쓰는 것도 같고, 그 불평등으로 인해 생겨나는 희생자 수를 헤아려보는 것도 같았다. 마침내 제니가 바다처럼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정말 슬퍼. 못 알아듣는 건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닌데.” “안녕, 잠꾸러기 씨.” 메러디스가 쾌할하게 말했다.주방 안의 공기에는 베이컨의 짭짤한 냄새와 끓는 커피 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 냄새는 가정을 가진 남자의 확실한 표시일 것이다. 싸구려 향..

한밤의 도서관 2015.04.21

채텀 스쿨 어페어

“새 환경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채닝 선생님. 하지만 여기서 금새 행복해질 거라고 확신합니다.”아버지가 얘기한 “행복”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따분한 일상과 제한된 활동 반경, 끈덕진 갈망을 조금도 채워줄 수 없는 쪼들리고 생기 없는 삶. 그들은 거창하게 로맨틱한 삶을 꿈꾸지 않았다. 특별히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없이 따분한 것들에 집착하고, 진정한 열정 한 번 불태워보지 못한 채 청춘을 허비했을 뿐이다. 채텀 스쿨을 졸업하면 그들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야 했다. 결혼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아이를 낳고. 내게 그것은 따분하고 활기 없는 삶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당연하고 바람직한 삶이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가 채텀 스쿨의 커다..

한밤의 도서관 2015.03.30

살인자의 기억법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거야.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사막이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습기라곤 없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어린 날도 있었다. 내겐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나는 늘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그들은 나를 소심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거울을 보며 표정을 연습했다. 슬픈 표정, 밝은 표정, 걱정하는 사람의 표정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다. 남이 찡그릴 때 찡그렸고, 남이 웃을 때 웃었다.옛사람들은 거울 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지. 그들이 거울에서 보던 악마, 그게 나일 것이다. 여자들의 표정은 풀기 어려움 암화와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법석들은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울면 짜증이 났고 웃으면 화가 났다. 시시콜콜 얘기를..

한밤의 도서관 2015.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