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환상의 여자

uragawa 2015. 12. 7. 22:53

스스로를 둘러싼 시간이 부드럽게 녹은 사탕처럼 늘어날 듯이도, 탱탱하게 당겨진 가는 실처럼 조금이라도 힘을 더 주면 끊어져 버릴 듯이도 느껴졌다.




부모자식 관계는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어진 듯 보일 때에는 언제나 본인들밖에 모르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끊지 않는 편이 마음의 부담은 훨씬 적다. 친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향도 그렇다.

-제1장 재회 中




이렇게 창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온다. 아버지와 아들. 특히 서른을 넘은 뒤 내 얼굴은 아버지와 무척 닮아졌다. 그 무렵 아이였던 나는 몰랐다. 어른의 마음이 그리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어른이라는 게 사실 그렇게 확고한 존재가 아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은 발붙일 곳이 위태위태하다는 것을.




인생은 애처로울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아이는 다른 청년은 되지 않는다. 청년은 다른 어른이 되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거야.”

포켓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날 밤에 그녀가 말했다.

“괴로우니까 도망친다고 생각하겠지만, 도망치니까 괴로워지는 거야.”

-제2장 추억 中




보이는 것과 똑같은 것 따위, 이 세상에는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외견대로여도 지장은 없다. 그것이 세상이다.




허세를 부리고 타인에게 마음을 허락하려 하지도 않고 쉽게 신용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감추어진 힘이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타인이 알아주지 않는 것은 전부 타인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다.

-제3장 의혹 中




“나쁜 말은 안 하겠습니다. 잊어버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설마.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의 충고입니다. 죽은 사람 일은 잊어버리고 살아 있는 사람끼리 잘 사는 겁니다. 사회정의 따위는 똥이나 먹으라죠.”




어릴 때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감정 표현이 서투른 청년으로 불렸고, 지금은 삐딱한 변호사. 훌륭하다. 언제까지나 자기 본위라서 다른 이의 고통을 배려하는 기분이 없다는 것이다.

-제4장 부재 中




8할의 과장과 2할의 진실. 대부분의 독자가 잡지 기사는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렇지만, 바꿔 말하면 2할의 진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잡지사는 명예훼손 소송 때문에 전부 망했을 것이다. 천만 독자에게 보도하는 신문에서는 쓸 수 없는 진실을 전하고 있다고도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경마를 하고 있으면 졌을 때는 데이터적인 필연이었고, 이겼을 때는 뭔가 우연이 작용한 듯한 느낌이 들어. 그게 기분이 좋은 거지.”




마음의 톱니바퀴는 이상할 정도로 쉽게 바뀐다.

-제5장 상흔 中




JR전철 창에 빗방울이 흘러갔다.

해 질 녘을 앞두고 붐비기 시작한 시각으로, 창유리 안쪽이 승객들의 숨으로 흐려져 있었다.




“할머니가 한 가지 좋은 거 가르쳐 주지요. 여자라면 누구나 사랑한 남자에게 받아들여지고 싶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 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죠. 하지만 모든 것을 알아 달라는 것과는 달라요. 그리고 그 아이는 여자였고. 죽은 뒤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제 6장 탐색 中




자신이 자신을 위해 저지른 나쁜 짓은 눈을 감고 정부니 뭐니 타인을 매도할 때는 논리 정연한 원칙을 내세운다. 세상 어딘가를 뒤집으면 논리 정연하게 정리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부친이 자살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모친이 어리석은 여자로 생각되어 견딜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부친이 정의로운 남자가 아니었던 것을 용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완벽한 악인조차 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부친이 나를 사랑한 것이 틀림없고, 내가 부친을 사랑했던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상처받을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상처받지 않은 채 아버지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을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나는 밝고 아무런 그늘도 없는 것이야말로 좋은 것이라고 배우고 살아온 것이리라. 그런 편이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달아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의 과거를 만든 부친이 용서되지 않았다. 용서할 수 없는 편이 낫다고조차 믿었을지도 몰랐다.

-제 7장 해후 中




나는 인생이 뭔지 모르겠다. 35년을 살면서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인생이라는 뭔가 대단한 것을 사는 게 아니라 나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아침을 살고 낮을 살고 밤을 사는 것뿐이다.




나와 만났을 때 그녀는 고독했다. 그전부터 계속 고독했고, 나와 만났을 때도 고독했고, 그리고 나와 함께 보내고 있어도 또한 고독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고독을 몇 분의 1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 자신만을 밀어붙이려 했을 뿐.




세상이라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 수수께끼를 원하지 않는다. 조금쯤 어긋나는 것이 있어도 단순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결말이 수수께끼보다 몇십 배는 소중한 것이다.




밤의 장막이 완전히 내렸고 콜타르처럼 새카맣게 된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제 8장 이별 中




“놀랐어? 당신이 어떤 인간들을 봐 왔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인간이란 쉽게 엉망이 되는 동물이지. 자신이든 타인이든, 엉망으로 만드는 거야 간단해. 몰아넣고 마지막은 자신의 의지로 도망쳐 버리면 되는 거지. 그다음은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나름대로 살 수 있어서 고민을 계속했던 날들에 비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나을지도 몰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돼. 일단 도망쳐서 싸움에 진 개가 되면 평생 그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




시민이라는 놈들은 모두 힘없는 어린양이지만, 귀염성이 있는 어린양은 아니잖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바로 포기하고 송곳니를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는 주제에, 가까이에 표적으로 삼을 만한 상대가 있을 때에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괴롭힘을 시작하지. 집단이 되어 누군가를 규탄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믿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자신이 귀만 남아 이 자리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흘러 들어오는 말을 정리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이란 것은 약간만 깊이 생각하면 누구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할지 하지 않을지 였다.




자신의 마음에 억지로 마무리를 지을 필요 따위 없었다.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애쓸 것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것도, 하물며 안녕을 고하려고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 안에 살아 있었다.

-최종장 가을색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