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잔예

‘허망’은 불교용어로 진실의 반대말이다. 진실과는 다른 것, 번뇌에서 생기는 현상을 뜻한다. ‘허망견’은 잘못하여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라고 믿는 것이고, ‘허망체상’은 번뇌와 선입관에 사로잡힌 눈으로 본디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믿어버리는 상태나 모습을 이른다. 유령도 저주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재수가 없다’는 말에는 마음이 흔들린다.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 않는 ‘무언가’가 현상과 현상을 잇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론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한테만 한정된 일은 아닌 듯하다. 내 주위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합리주의자가 많지만, 그래도 ‘운이 따른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 ‘인연이 있다’, ‘인연이 없었다’ 같은 말은 자주 듣는다. 남편은 나보다 더한 심령현상 완전 부정론자..

한밤의 도서관 2016.01.13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아무리 그래도 진짜 끔찍해요. 옛날 『여공애사』의 경영자들과 기본적으로 달라진 게 전혀 없어요. 부정(不正)은 방편일 뿐이고 법률은 족쇄로 써먹고, 아무튼 자신들이 하는 일은 국가를 위한 것이니까 찍소리 하지 마라, 우울증도 과로사도 노동자의 자기 책임이다, 마음대로 앉지 마라, 마음대로 쉬지 마라, 마음대로 밥 먹지 마라, 마음대로 살지 마라, 마음대로 죽지마라, 그런 식이에요. 놀고 있죠. 놀고 있고, 진짜 저질이고 천박해요 별것도 아니다. 칭찬해주고 허영심을 살살 긁어주면 금세 좋아 죽는 게 중년이다. 거꾸로 추어주지 않으면 외로워하고 부루퉁해지고, 중년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아가씨, 돈이 없으면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해. 그런 걸 평화 치매에 걸린 이 나라 소시민들은 전혀 모르고..

한밤의 도서관 2016.01.11

걸 온 더 트레인

아름다운 햇빛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함께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할 일도 전혀 없다. 바로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사는건 여름에 더 힘들다. 햇빛이 넘쳐나 어둑한 곳은 찾기 어렵고, 모두가 밖에 나와 눈꼴사나울 만큼 정력적으로 행복한 기운을 내뿜으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진 빠지는 일이다. 그들 틈에 끼지 못한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다. 가끔은 내가 다른 사람과 의미 있는 신체 접촉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던가 기억하려 애쓰다가 멈칫하기도 한다. 단순히 껴안거나, 누군가가 진심으로 내 손을 꽉 잡아준 적이 언제였던가. 가슴이 아려온다. 난 몇시간 전부터 깨어 있었다. 잠이 오질 않는다. 며칠 동안 통 자지 못했다. 불면증은 질색이다. 그것만큼 싫은 게 없다. 누워 있기는 하지만 머릿..

한밤의 도서관 2015.12.31

저물어 가는 여름

“하여튼, 스기노 사장에게 사실만 정확히 말해. 지금처럼 뻣뻣한 태도는 사장이 두 번째로 싫어하는 거야. 생각해서 말해 주는 건데, 장황하게 듣기 거북한 핑계 따위는 대지 마. 그건 사장이 제일 싫어하는 태도니까. 사과해야 한다면 확실하게 사과해. 지금까진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지만 네 대응 방법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몰라. 군자표변君子豹變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아주 빠르고 뚜렷함이야.” 미궁에 빠진다는 말을 하면 정말 그렇게 돼 버린다. 치요는 자주 ‘시각장애인의 마음은 눈을 감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라는 말을 한다. 마찬가지로 히로코의 마음이나 처지는 다른 사람이 짐작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인질을 돌려주고 몸값을 받는, 몸값을 목적으로 한 유괴는 성공할 가능성이 제로에..

한밤의 도서관 2015.12.19

종이달

닭날개살과 삼겹살, 돼지고기 다짐육이 든 팩 포장을 바구니에 넣은 뒤, 유코는 다른 진열대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는 붐볐다. 유코는 앞에 선 젊은 여자의 바구니를 무심코 들여다보았다. 스파게티, 야키소바, 인스턴트 파스타 소스가 두 종류, 건포도 빵, 팥빵, 푸딩, 양파, 카레 루, 비엔나소시지에 컵라면. 그야말로 딴 데 한눈팔다가 이렇게 됩니다, 하는 전형 같은 쇼핑 목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뭐든 장바구니에 넣는 데서 벗어난 해방감과 쾌감을 문득 떠올렸다. 마키코를 울린 이후, 가즈키는 마키코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로 했다. 마키코의 이야기에는 출구가 없고, 단순히 월급 면에서 다그치는 것 같아서 화가나고 주눅이 들었다.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과 식사..

한밤의 도서관 2015.12.16

가면산장 살인사건

“즉, 범인은 계획이 성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도모미는 이미 약을 먹었지만 범행이 발각될 일은 없으니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는 거죠. 만일 범인이 노리는 바대로 죽어 주면 행운이고, 범인의 심리는 그렇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을 견뎌 가면서까지 무언가를 성취하려 하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 처하면 우선 책임을 전가하고, 그다음에는 포기를 하든지 무기력해질 뿐이다.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인 양한다. 당신네들은 하나같이 좋은 사람인 척하고 있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가면을 쓰고 있어. “아니죠, 아버님. 그건 몰상식하다거나 정숙하지 못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이란 절실히 갖고 싶은 것을 위해서 때로는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행동도 하는 법이죠.” “3억을 위해서는 사람..

한밤의 도서관 2015.12.10

환상의 여자

스스로를 둘러싼 시간이 부드럽게 녹은 사탕처럼 늘어날 듯이도, 탱탱하게 당겨진 가는 실처럼 조금이라도 힘을 더 주면 끊어져 버릴 듯이도 느껴졌다. 부모자식 관계는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어진 듯 보일 때에는 언제나 본인들밖에 모르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끊지 않는 편이 마음의 부담은 훨씬 적다. 친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향도 그렇다.-제1장 재회 中 이렇게 창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온다. 아버지와 아들. 특히 서른을 넘은 뒤 내 얼굴은 아버지와 무척 닮아졌다. 그 무렵 아이였던 나는 몰랐다. 어른의 마음이 그리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어른이라는 게 사실 그렇게 확고한 존재가 아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은 발붙일 곳이 위태위태하다는 것을. 인..

한밤의 도서관 2015.12.07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잔인무도한 살인귀라면 얼마나 편할까요? 아마 사람을 아무리 죽여도 마음 아플 일 없이, 그야말로 자가용 범퍼가 조금 찌그러진 것보다도 못한 일처럼 차례로 죄를 저지르겠지요. 사람 가리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죽여 연쇄살인범, 살인귀, 이상범죄자라고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경멸당하겠지만, 그는 태연하겠지요. 어쩌면 그런 사람일수록 붙잡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동기도 분명치 않고, 피해자하고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경찰이 그런 사람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을까요? “확실히 타인의 관대한 마음을 갈가리 짓이겨 국수 양념으로 쓰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요.”“그게 무슨 소립니까?”“세상에는 타인의 생활을 망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이 꽤 많다는 소립니다.”-누명이야기 中 그녀의 여동생 이야기의 뒷부분은 이러했다..

한밤의 도서관 2015.11.30

두번째 열대야

내게도 현금 1000만엔 을 호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다니는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 의 음악을 착신음으로 쓰는 센스와 뚱뚱한 체형은 취향이 아니지만 돈이 많다면 참을 수 있다. 왜 이렇게 뒤룩뒤룩 살이 찐 거야, 이 뚱땡아. 맛있는 걸 잔뜩 처먹어서 그렇겠지. 날마다 병원 식당에서 350엔 짜리 정식이나 사 먹는 내 기분을 네가 알겠어! 코이치는 몇 년 전에 어머니를 잃었다. 최신 의약품과 치료법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 보니 수명도 지갑 두께에 좌우되는 시대다. 자신에게 돈이 없어 어머니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코이치는 늘 한스러웠다. 지난달 옆 동네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켰을 때는 시체가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등에 바구니를 메고 쓰레기를 줍는 집게로 살점을 회수했다. 약 20킬로그램을 ..

한밤의 도서관 2015.09.28

마사 & 겐

겐지로는 쾌활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구니마사는 순순히 수긍할 수 없었다. 젊을 때보다 죽음이 가까워진 만큼 두려움도 커진 탓인지 모른다.지금까지 만나고, 먼저 떠나간 사람들의 기억도 내가 죽으면 깨끗이 지워지는 걸까. 혼자 지내는 밤은 느리게 흘러간다. 화장실에 가느라 두 번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도대체 날은 언제 새나’하고 진저리를 쳤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해서 활력이 샘솟는 것도 아니면서.이건 뭐,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야. 구니마사는 반듯하게 드러누운 채 컴컴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나이 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화가 나는지 우스운지 개운한지 모를 복잡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아침까지 요의 때문에 깨지 않고 잠들기를 빌었다. 허무함은 삼키면 되고, 쓸쓸함은 습..

한밤의 도서관 2015.09.17

레드브레스트

“왜 미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거야?” 다니엘이 물었다.“대공황 때문에. 조선소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직장을 잃었거든.”“그거 봐. 그게 자본주의라니까. 소시민은 죽어라 일하고, 부자들은 점점 배를 불리지. 경제가 호황이든 불황이든.”“세상일이 다 그렇지 뭐.” “세상에는 언제나 재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죠. 그게 세상사예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요. 매해 바위종다리의 60퍼센트가 죽는 거 알아요? 무려 60퍼센트나요! 우리가 일손을 놓고 그 통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다가는 결국 우리도 그 60퍼센트에 속하게 될거라고요, 해리.” 우리는 젊고 연약한 나라요, 해리.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이 나라에서도 법과 질서가 중요하다는 것..

한밤의 도서관 2015.09.13

캡틴 선더볼트

이번에도 또 나는 중요한 대목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판단 미스만 연발하는 쓰레기 인생. 언제나 이 모양이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나는 매번 실수만 한다. 어디까지고 자신에게 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이 터졌을 때,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선택을 해야만 돼. 대책을 세우든, 아무것도 안 하고 어떻게 되나 지켜보든.” 복사기는 다기능 PC와 같다. 스캔도 가능하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메일도 보낼 수 있다. 상태를 감시하다가 고장이 났거나 토너가 다 떨어질 때쯤이면 자동으로 담당자에게 메일을 전송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복사기’라는 이름 때문인지 복사기는 똑같이 찍어 내는 기계이지 그 외의 기능은 덤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살림이 내리막으로 돌아선 것은 진작부터였고, 이제..

한밤의 도서관 2015.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