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탐방서점 -금정연과 김중혁, 두 작가의 서점 기행

제가 언젠가 ‘책등포비아’라는 개념을 생각한 적이 있는데, 꽂아놨을 때 이게 어떤 책인지 규정이 안 되면 힘들어하고, 심지어 뭔가 헐겁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어떤 사람들한테는 책이라는 것이 무겁고 소중한 매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독립출판의 제작 방식을 가진 책을 유통할 때, 거기에서 생기는 충격파가 꽤 클 때가 있습니다. 배포하고 판매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점은 저희가 좋아하는 책이 기준점 이하로 판매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 이 책은 좋다, 이 책은 잘 팔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책들이 늘 호응을 받았던 것이 좋았습니다. 또 ‘아 이건 돈이 필요해서 하는 거야’라는 말을 안 해서 행복해요. 뭐 그런 멘트를 아예 할 수 없는 책들로 저희를 무장시키고 살고 있기 때문에,..

한밤의 도서관 2016.10.02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회의의 기술 회의석상에서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 들이밀거나, 다른 사람 의견을 자기 논리로 끌어들여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런 식으로는 비난과 반발을 일으킬 뿐, 일 진행에 전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이런 병맛 짓거리를 회의의 기술로 착각하는 멍청이들이 있다. 좋은 물건을 만드는 데 흥미가 있는 사람은 돈을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최대의 이윤이라는 떨떠름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은 경영자다. 현대 사회의 비극은 여기서 발생한다. 상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모든 중요한 결정을 경영자가 내린다. 당연히 경영자는 좋은 물건을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대략 이런 패턴을 따른다. 첫째 돈이 되네, 둘째 할 수 있네, 셋째 한다. 여기에 ‘왜 하지?’, ..

한밤의 도서관 2016.09.29

Littor 2016 8.9

중국집을 빠져나온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멀어지는 친구의 뒷모습이 자꾸 흔들리니까 슬펐습니다. 나를 뒤에서 보는 일도 저렇게 슬픕니까. 무엇보다 우리 집으로 가는 골목은 왜 또 이토록 멀고 복잡합니까. 가로등도 없이 어둡고 아득했습니다. 희망은 없고 장래만 남은 삶은 또 얼마나 지루합니까. “난 하루 종일 하기 싫은 일을 한단다. 왜 그런지 알겠니? 다 널 위해서란다, 열받게좀하지마알렉시야! 언젠가는 네가 나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날이 오겠지. 가족이란 그런거니까.” 어머니는 내가 이미 어머니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신다. 어머니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드린다. 난쟁이 만한 용돈에도 불평 안 하고 참는다. 하지만 우리가 가족이니까 이런 짓 안 하는 거다. 공중도덕에..

한밤의 도서관 2016.09.28

엿듣는 벽

호텔에서 일한 몇 달 동안 콘수엘라는 옷장을 상당히 풍성하게 재정비해오고 있었다. 남는 옷가지 몇 개 좀 가져온다고 절도라고 할 순 없었다. 그건 상식의 문제, 심지어 정의의 문제에 더 가깝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부자고 다른 사람들은 아주 가난하다면, 약간 균등하게 나눠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콘수엘라는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할 필요도 없어. 냄새가 나잖아. 썩었으면 냄새가 나는 법이지.” 지배인인 에스카미요가 말했다. “몇 방울 마셨을 뿐이에요. 기운을 차리려고.” “몇 방울은, 하!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돼지 자식에게 모욕당하고 내가 가만히 참을 줄 알아!” “지금 네까짓 게 나를 돼지 자식이라고 부른거야. 이 도둑년이!” 서른세 살인데 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한밤의 도서관 2016.09.22

레이먼드 챈들러 - 밀고자외 8편

그는 갑자기 미소를 띠었다가, 이내 평생 미소를 지어 본 적이 없다는 듯 거두었다. 그가 이죽거리듯 느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밀고자 中 “도박사는 차 버려.” 다이얼이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녀석은 당신을 수렁에 빠뜨릴 거야.” 그녀가 잔을 홀짝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얼이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내, 같은 자리에 입을 대고 마신 후 잔 두 개를 든 채 상체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다시 키스를 했다. -네바다 가스 中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몇 분 동안 꼼짝 않고 담배만 피웠다.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은 평온했고, 검은 두 눈은 다른 먼 세상을 향해 있었다. 마침내 그의 입꼬리에 단호한 미소가 걸렸다. 미소 속에 희미한 냉소가 배어 있었다. 미소를 지운 그는 묵묵히 집 안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신을 끌어..

한밤의 도서관 2016.09.10

미스테리아 7호

어드바이스가 필요합니까. 조립식 건물 옆에 세워놓은 간판의 글귀였다. 그 글자 아래에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도 적혀 있다. 저렴한 가격, 신뢰 가는 어드바이스, 라고 씌어 있지만, 애당초 상담이라는 것은 시세가 정해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데에 비해 얼마나 저렴한지 가격을 비교할 방도가 없다. “살아가는 우리들 앞을 늘 가로막아서는 게 무엇입니까?” 이나가키 씨가 물었다. “뭘까요.” “고민이나 문제지요. 그것뿐입니다. 저마다 고민을 끌어안고 있으면서 아무데에서도 그것을 풀 답을 얻지 못한 채 녹초가 되어 하루하루를 살고있다, 그겁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나가키 씨는 말할 때 자기 배의 군살을 손으로 움켜쥐면서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고민이나 의문에 대해 어드바이스를 해주고 싶어서 상담소..

한밤의 도서관 2016.08.18

미스테리아 6호

『나 홀로 부모를 떠안다』(이소담 옮김, 코난북스 펴냄)는 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난 ‘독신개호’(배우자가 없는 자녀가 부모의 개호를 도맡는 일)을 다루는데, 외부와의 일상적인 왕래가 단절되다시피 한 일대기 개호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날 밤 런던이 너무 더워 우리는 후텁지근한 공기를 식혀줄 한 줄기 바람을 기대하며 원룸 채광창을 활짝 열고 새까만 밤 하늘 아래 누워 잤다. 어둠에 잠긴 지평선 위 밤하늘은 열기로 가득하고 그 아래 자그맣게 자리한 이 도시도 숨막힐 듯한 더위에 몸부림 쳤다.-경계선 사건: 마저리 앨링엄 개인적으로 6호는 5호보다 컨텐츠가 별로... [나 홀로 부모를 떠안다] 이 책은 미래 내 이야기인줄.... 한 번 읽어 보고싶다.

한밤의 도서관 2016.08.07

64

사막에서 신기루를 본 것이다. 그런 기분이었다. 끝났다고 아쉬워할 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기자들에게 얻은 믿음은 불면 날아갈 만큼 가벼웠다. 미카미 역시 홍보 개혁을 통해 기자들에 대한 혐오감이 사라졌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64’ ‘14년전’ ‘아마미야 쇼코 유괴 살인사건’을 가리키는 기호로, D현경 관내에서 처음 일어난 강력 범죄사건이었다. 몸값 2천만 엔을 고스란히 빼앗겼고, 납치된 일곱 살배기 소녀는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직 범인은 붙잡히지 않았다. 바깥에는 자극이 있다. 빛이, 계절이, 사람들의 생활이 있다.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불안과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새로운 발견이 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얼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아마미야가 빼앗긴 ..

한밤의 도서관 2016.07.01

너를 놓아줄게

어쨌든 오늘이 그날이다.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영영 떠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여행 가방에 들어가는 만큼만 짐을 꾸린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렵고도 자유롭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현재 삶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곳에 남아 있을 수는 없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 수 없어서 걷기 시작한다. 자신과 게임을 하기로 한다. 어디로 향하든 다음 골목에서 왼편으로 꺾은 다음 다시 오른편으로 꺾어 처음 나오는 교차로에서 곧장 앞으로 갈 것이다. 도로 표지판을 보지 않는 대신 교차로마다 가장 좁은 길을 택한다. 사람들이 가장 덜 다니는 길을 간다. 어지러움을 느끼다 못해 발작을 일으킬 것만 같다.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 어..

한밤의 도서관 2016.06.14

창백한 잠

“다쓰미 씨,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나랑 나이가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지 않습니까. 이 나이가 되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이 어느 정도 상상이 되어서 다양한 사람들을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요. 어려운 건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느낌으로 ‘아, 이 사람은 이런 인간인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게 있어요. 이건 특별히 당장 눈앞에 있는 상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에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됩니다. 옛날에는 이해할 수 없다고 목청 높여 싸우곤 했지만 지금이라면 그 남자도 이해가 간다. 그렇게 된달까요. 그렇지만 내 부친만은 아무리 해도 그게 안 되더라고요. 그 사람만은 아들 입장에서 봐도 여전히 어딘가 속을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러나 사람이라는..

한밤의 도서관 2016.04.28

어서오세요, 오늘의 동네서점

경남도지사에게 여러 가지 책을 추천했는데 그중 가장 추천하는 책은 단연 ‘개념원리’입니다. 물론 ‘개념을 가져라’라는 1차원 적인 뜻에서 추천한 건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계실거라 믿습니다. 그럼 뭐냐고요? 알아서 판단하세요. “판단은 당신의 몫.”-진주문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함께 행복하기’, ‘함께 즐기며 살아가기’ ‘사라져 가는 것’등 평범하지만 쉽게 잊고 살아가는 가치들을 고민하며 살아요.-도시여행자 동네 서점에서 은근 득템한 기억이 많은 나로서는 굉장히 반가운 책.펀딩 받은 책이더라. 표지 디자인도 예쁜데다 가격도 착함.앱도 출시 된단다.(4월 26일) 사용성 좋은 앱이라면 항상 지니고 볼 듯함. 검색해보니 안드로이드는 있던데 ios는 못 찾았어. 금요일 밤의 서점도 가보고 싶음 ..

한밤의 도서관 2016.04.22

기억나지 않음, 형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이토록 천박한 도시다. 살인, 강도, 납치, 강간, 뭐든지 나와 상관없으면 시민들은 방관자적 입장에서 사건을 감상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모두 냉혈동물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대사회의 인간은 공감능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이성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냉혹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보는 더 쉽게 유통되고, 우리는 세상일에 점점 더 마비된다. 어쩌면 세상에 나쁜 일이 너무 많아서 냉혹해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합 겹 또 한 겹의 갑옷으로 자신을 감싸고서 이 ‘번화한 사회’에 적응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방관자적 입장에서 사물을 보아야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인간의 마음은 몹시 연약하다. 지금 이런 감각을 ‘미시감’이라고 하는 거겠지? 낯선 사물을 익숙하게 ..

한밤의 도서관 2016.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