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유리 갈대

uragawa 2016. 10. 21. 14:33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이만큼 구체적으로 조건을 제시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 흔들릴 일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니 뭐니 운운하지 않는 만큼 결혼생활은 담담했다.



테이블 너머에서 웃는 입술이 좌우 똑같이 올라갔다. 아무리 감추어도 입가에는 마음이 드러난다. 눈꼬리를 향해 정직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사와키의 이목구비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보다 한번 무덤에 묻는 편이 서로를 위한거야. 당신은 앞으로도 살아갈 테고.”
한 권으로 정리하는 일에 대해 기이치로는 ‘묻는다’라느 표현을 쓰고, 다시 고칠 수 없는 곳까지 가지 않으면 새로운 것도 태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바다, 좋아했던가.”
“좋다, 싫다 생각한 적이 없었지 않을까요. 새삼 보니 너무너무 예뻐서 깜짝 놀랐어요.”
“그렇구나. 다음에 안내해줘.”
“나요. 어릴 때 여기서 뼈를 뿌리는 사람 본 적 있어요. 남편을 잃은 할머니였는데요. 할머니는 자기 뼈는 누가 바다에 뿌려줄까 걱정했어요. 자식도 친구도 없다고요. 아, 나는 선생님한테 부탁할래요.”



“대마는 이제 안 피우니?”
고즈에는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 눈에 거짓은 없어 보였지만, 진짜라고 믿을 수도 없었다. 행복도 불행도 생각지 못한 거짓말을 하게 한다. 고즈에는 지금 조금 행복할 것이다.



세쓰코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기이치로가 눈 뜰 날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들고, 어떤 계기로 눈을 번쩍 뜰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귀만은 들릴지도 모른다는 말이 이 병원에 다니는 가족의 마음을 가볍게도 무겁게도 할 것이다. 숨을 쉬는 시체보다 움직이지 못해도 의사를 가진 육체쪽이 간호하는 보람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아무런 의사 같은 건 없었으면 싶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부담은 의식이 있는 이의 마음을 여러 형태로 바꾼다.



기다는 우편함에 꽂힌 석간을 책상에 갖다놓은 뒤 장난기 담긴 인사를 하고 4시 35분에 사무실을 나갔다. 집까지 1킬로미터,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무 생각도 안합니다. 그냥 걸어요, 그것뿐이에요. 기쁨도 슬픔도 없어요. 아, 벚꽃이 폈네. 이 집 진달래가 예쁘네, 작년보다 정원이 황폐하네 등등. 본 것을 본 대로 느낄 뿐, 생각을 하는 일은 없어요.”



“점심때부터 줄곧 여기서 고다 씨 얼굴을 보고 있었어요. 이 사람, 언제나 남을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 결국 자기 생각만 했던 것 아닐까요. 사실 남한테 관심 없고, 아무것도 무서운 것 없고, 어떤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가自信家. 그러나 마음이 내키면 욱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바닥 모를 낙천주의자.”



미치코도 자신도 그리고 리쓰코도 죄의식을 갖는 데 필요한 무엇인가가 부족하다. 이렇게 타고났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흘렸는지. 어쨌든 있으면 있는 대로 귀찮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누가 마음을 흔드는 걸 싫어하죠, 선생님도 나도.”



세쓰코는 엄마가 한 말을 떠올렸다.
“맞을때라도 울어. 맞으면서 웃는 건 귀신뿐이야.”



성인방송 관리며 셔터 올리고 내리기. 진상 손님 다루기, 에어슈터 조작하기, 파트타이머 지도 등등 도시코가 있으면 모든 것이 원활하게 흘러간다. 쾌락의 뒷면을 완벽하게 아는 여자는 인간의 뒷면도 보일 것이다. 도시코와 있으면 기이치로가 날마다 편안하게 자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일이 질릴 적은 없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질려서 그만둘 수 있다면 질리기도 하겠지만요. 그런 건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죠. 사장님도 나도 뼛속까지 호텔인이니까요. 섹스를 돕는 데는 끝이 없다는 걸 안답니다.”
“돕는다는 개념이군요. 처음 알았어요, 그런 것.”
“남자도 여자도 몸을 써서 놀지 않으면 개운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호텔은 그런 걸 돕는 일을 하죠. 관광지 호텔은 한번 가면 만족하지만, 섹스로 도달한 곳은 한 번 더 가보지 않으면 불안해진다고 해요. 우리 남편이 그랬어요. 사람은 한번 좋은 경험을 하면 같은 장소에서 또 하고 싶어진다고. 그런 동물이라네요.”



나는 가난한 집 출신이어서요. 나한테 이득 되는 이야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아요. 내게 필요 없는 것은 남한테도 필요 없어요. 거꾸로 해도 마찬가지예요. 줄곧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사모님이 홀가분해지는 건 상관없어요. 아직 젊고,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요, 홀가분해지는 건 무서운 거예요. 속박이 없는 생활의 무서움, 아세요? 의지할 데도 없고 구속하는 곳도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필요 없어져요. 부탁이니 한동안 더 나한테 잔소리 들으면서 힘내세요.”






2015/05/25 - [먼지쌓인필름] - 유리 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