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러는 제일 좋아하는 배우가 잭 일럼 같은 악역 배우라는 사실이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 말해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002 말을 탄 사나이 켈러 中
개를 보고 싶었다.
켈러는 몇 년 동안 혼자였다. 혼자만의 길을 찾고, 생각을 남에게 털어놓지도 않았다. 혼자인 데 익숙했다. 어린 시절부터 본성이 고독하고 비밀스러웠는데 그가 선택한 직업에서는 이런 특징이 전문가의 요건이 되었다.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에게 이미 직업경력이 생겨 있더군. 그게 사람들을 없애는 일이었던 거야. 그런 일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소질도 없었는데 알고 보니 관심이나 소질은 필요가 없더라고. 할 수만 있으면 돼. 처음에는 누가 하라고 해서 했고, 두번째에도 누가 하라고 해서 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게 하는 일이 되어 있었어.
-004 개를 산책시키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中
“안녕, 존.”
그는 2번가를 걸으면서 영원히 안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번 다시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을 테고, 그녀도 전화가 오리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공통점이라고는 북유럽 요리에 대한 혐오뿐이었는데 관계를 형성할 기반으로는 부족했다. 화학작용이 없었다. 그녀는 매력적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고 불꽃도 튀지 않았다.
홈쇼핑 채널 중 하나에서 어떤 여자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우리 둘 다 아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귀고리는 아무리 많아도 넘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죠.”
켈러는 그 대사를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었다. 그게 문자 그대로 사실일까? 귀고리가 천 쌍, 아니면 만 쌍 있다고 해보자. 백만 쌍이 있다고 해보자. 그래도 너무 많다고 여겨지지 않을까?
-005 켈러의 카르마 中
인간의 성숙도는 만족의 순간을 미루는 능력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읽은 적이 있었다.
가끔 하는 짓이었다. 낯선 도시의 전화번호부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정말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희귀한 이름이 아니다 보니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다른 도시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자기 자신, 진짜 자신을 찾았다.
-006 빛나는 갑옷을 입은 켈러 中
“있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들어봤는데, 도무지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애초에 자기 자신을 어떻게 잃지? 어디에서 자기 자신을 찾을지는 어떻게 알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요. 그래도 일단 집에 개를 한 마리 두는데 익숙해지면 포기하고 싶어 하질 않아요.”
“상관없어요. 난 익숙해진 적이 없고, 그런 말 알죠. 가져본 적이 없으면 그리워할 일도 없다.”
-007 켈러의 선택 中
어떤 식으로든 일은 이루어질 테니까. 청부업자가 마음을 바꾼다면 청부업자를 바꾸기 마련이다. 켈러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면 다른 누가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삶에 매달리는지 생각하면 우습지. 새뮤얼 존슨이 이런 말도 했다네. 자기 삶에서 다시 살고 싶은 시간은 단 일주일도 없다고. 마이크, 난 나쁠 때보다 좋을 때가 더 많았고, 나쁜 때라고 해도 그렇게 지독하지는 않았네만, 난 내 삶을 한순간도 반복하고 싶지 않지만, 기꺼이 잃어도 좋은 순간이 있다는 뜻은 아니라네. 다음에 오는 순간도 잃고 싶지 않아. 존슨 박사도 그랬을 거야. 우리는 그래서 계속 살아가는 거야. 그렇지 않나? 다음 물굽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지 알고 싶어서.”
-008 현장의 켈러 中
인정해야겠는데,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는 아마 악당일 것이다.
별로 악당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뉴욕 독신남의 표본 같았다. 혼자 살고, 외식을 하거나 음식을 사 들고 집에 가서 먹고, 세탁물은 빨래방에 가져가고,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서 《타임스》십자말풀이를 하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여자들과 끝이 뻔한 관계를 시작하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고, 이 벌거벗은 도시에는 팔백만 가지 이야기가 있었고 대부분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으며 그의 이야기도 그랬다. 화이트 플레인스에 있는 남자에게 전화를 받고, 가방을 싸고 비행기를 타고 가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점만 빼면.
반박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악당이다. 사건 종료.
그는 통화를 끊고 혼자 할 일을 생각할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지하철을 타고 브롱크스로 가서 동물원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동물원에 가본 지도 몇 년 만이었다. 그 정도면 동물원에 가면 언제나 슬퍼진다는 사실을 잊을 만한 시간이었다.
여전히 슬퍼졌고,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에 갇힌 짐승들을 본다고 괴로운 건 아니었다. 그가 이해하기로 짐승들은 야생에서 살기보다 감금되어 살면서 더 좋은 삶을 누렸다.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하게 지냈다.
-009 켈러의 마지막 피난처 中
“괜찮아질 거에요.”
“알아. 사실 지금도 괜찮아. 이제 내가 할 일은 남은 인생에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것뿐이야.”
-010 켈러의 은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