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신의 카르테

이럴 때일수록 내 입에서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는다.“짧은 만남이었지, 학사님.” 나는 쓸데없는 말을 거듭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빛바랜 단행본 한 권을 책상 위에 두었다. 시마자키 도손의 『동트기 전』. “박식한 학사님에게 줄 책이 좀처럼 없어서 말이야.” “저한테요?” “읽은 적은 있겠지만.” “꽤 옛날입니다.” 학사님의 흰 손이 『동트기 전』의 낡고 붉은 표지에 닿았다. 몇 번을 넘겼는지 알 수 없는 표지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때가 묻고 마모되어 너덜너덜해졌다. 상하권으로 나뉘어져있었을텐데, 수중에 남은 건 상권뿐이다. “괴로운 이야기야.” 내 말에 학사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재밌는 이야기도 아니고 기분 좋은 이야기도 아니야. 갈등과 고뇌가 한없이 계속되는 이야기지. 그 괴로..

한밤의 도서관 2014.11.03

탐정은 바에 있다

“모르겠어. 뭔가 있으면 전화할게.”“이제부터 어떡할 거야?” “그래. 언제든지 연락해. 이봐, 기운이 없어 보이는군.”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마쓰오는 히죽 웃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봐, 나는 알코올중독은 아니라고. 그냥 알코올의존증이야. 알코올중독이 아니라고. 그 둘은 큰 차이가 있어.” “그건 몰랐네.” “모르는 녀석이 꽤 있지. 그리고 말이야. 아무리 마셔도 간이 상하지 않는 비법이 있어. 그거 알아?” “몰라.” “당신도 술꾼이라면 알아두는 편이 좋아. 단백질이야.” “오호.” “단백질을 먹으면서 마시면 말이지. 간은 불사신이라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전화의 좋은 점은 친한 친구가 손을 흔들거나 등을 돌리거나 걸어서 떠나가거나 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도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밤의 도서관 2014.10.24

1의 비극

내 마음 속에 죄책감을 가리키는 미터기가 달려 있다면, 이 순간 바늘이 크게 왼쪽으로 꺾이며 일단 제로를 가리켰을 것이다. 하지만 바늘은 금세 오른쪽으로 돌아가 임계점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나는 내 생각과는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시게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식이 형용할 수 없는 뭔가에 의해 흐려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미우라를 쉬지않고 가격한 오른손이다.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이 들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폭력 그 자체에 대한 혐오가 아니었다. 오히려 폭발의 방아쇠가 된, 내면에 존재하는 스스로에 대한 위화감이었다. 목격_부상한 남자 “밀실이란 추리소설에서 쓰는 기법의 하나로, 닫힌 공간에 타살 시체가 있지만 범인이 없고 심지어 침입이나 탈출 흔..

한밤의 도서관 2014.10.21

그 무렵 누군가

“들어봐. 다중 인격자인 척하면서 범죄를 저지른 건 나의 ‘또 다른 인격’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그러면 이런 건 어떨까. 원래 성격이 광폭한 인간이 사람을 죽인 뒤에 온화한 인간인 척하는 것. 그리고 광폭한 짓을 한 건 다른 인격이었다고 주장하는 것.” -레이코와 레이코 中 “바로 그거야, 머시. 요즘 범죄자들은 어찌나 독창성이 없는지 한다는 수법이라는 게 고작 선배들 흉내고, 심지어 트릭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사람을 죽인다니까. 내가 현역일 때는 범죄자들에게도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었어. 물론 그들의 작품에도 결함은 있었어. 그래서 결국에는 나에게 간파당해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런 결함도 화려함을 추구하느라 생긴 필요악 같은 것이었어.” -명탐정의 퇴장 中 올해 초 구입한 ..

한밤의 도서관 2014.10.20

열대야

―흥, 뭐가 간호사야. 백의의 천사가 듣고 놀라서 자빠지겠네.나는 간호사야. 하기야 의사와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간호사가 됐으니까. 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 병원에서 일해보니 의사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는 없었다. 영감탱이, 몰상식, 마더 콤플렉스, 불결. 의사라는 직업을 빼면 아무 쓸모도 없는 남자뿐이었다. 게다가 간호사일은 상상보다 훨씬 고됐다. 환자는 제멋대로든지 더럽든지, 아니면 양쪽 다다. 감사하기는커녕 우리를 종처럼 부려먹었다. 열대야 中 “토라노스케, 타고난 재능을 썩히는 아까운 짓은 하지마라. 옛날처럼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 보상받는 시대는 지났어.” 토라노스케는 가까이에 있는 잔교로 향했다. 콘크리트 ..

한밤의 도서관 2014.10.15

몽환화

“할아버지, 정말 행복해 보여요. 꽃을 진짜로 좋아하시나 봐요.” 슈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어울리기가 힘들어. 그런데 꽃은 거짓말을 안 하지. 마음을 담아 기르면 꼭 거기에 응해주거든.” “하지만 그거야,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잖아. 재능이 있는 사람은 한 줌이야. 있는 척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능력 자체도 대단한 거잖아.”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가 말했다.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히가시노 게이고 아저씨는 무슨 책을 쾅쾅 찍어내는 듯. ㅋㅋ번역하시는 분도 바쁘시겠어 끝도 없이 쏟아지네 ㅋㅋㅋㅋㅋ 출간하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작품이라고 ..

한밤의 도서관 2014.10.14

헬로 뉴욕

브루클린 파크 슬로프에서 남편 맷과 우리집 멍멍이와 함께 산다. 고전적이며 아름다운 적갈색 사암 건물들이 가득한 이곳을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주민들이 다 읽은 책을 이웃과 나누려고 현관 입구 층층대에 책을 올려두는데 이것이 우리 동네 도서관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여름에는 지역 주민들이 파티를 여는데, 파티에 온 아이들은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는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논다. 누군가 열어놓은 도로 소화전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올 때도 있다.나는 삼 대째 여전히 뉴욕에 살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을 때는 언니와 함께였다.내가 아홉 살, 언니가 열세 살이었는데언니는 몹시 강경한 어조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아무하고도 눈 마주치지마!” 아, 일러스트 충만한 에세이 책은 ..

한밤의 도서관 2014.09.26

줄리언 웰즈의 죄

“어디서 들은 말인데,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는 건 처음 채찍을 휘두르기 전이 아니라 휘두르고 나서래.” 마을 외각으로 빠지는 도로를 향해 걸어가면서 줄리언이 말했다. 그러고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정작 중요한 건 채찍질을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 아니겠어? 죄책감은 사치야, 필립.”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는데.” 줄리언이 부드럽게 말했다. “인생은 그림자 게임이라고, 친구.”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줄리언에게로 내려갔어야 했다. 인생에 해피엔딩만 있다면, 친구라면 마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다가 어스름한 불빛 속에 앉아있는 자신의 친구를 발견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친구는 자신..

한밤의 도서관 2014.09.04

불연속 세계

벚꽃은 기묘한 꽃이다. 벚꽃이 핀 것을 보면 굉장히 득 본 기분이 든다. 다른 꽃은 이 정도는 아니다. 벚꽃이 피면 좌우지간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드는 건 왜일까.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일본인과 벚꽃의 관계에는 어딘가 영적인 면이 존재한는 것 같다. 무엇보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도 벚꽃이 있지만, 외국에서 피는 벚꽃은 가령 일본인이 좋아하는 왕벚나무 꽃이라도 전혀 다른 꽃이다. 벚꽃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일본 풍토에서 나고 자랐을 때 벚꽃은 비로소 벚꽃이 된다. 다몬은 골똘히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발은 제2의 심장이라는 말이 있다. 걸으면 걸을수록 뇌에 산소가 공급되어 사고 활동이 활발해진다고 한다. 예로부터 철학자와 과학자는 산책 중에 사색의 실마리를 얻었다. 그러나 다몬은 그..

한밤의 도서관 2014.08.28

내 남자

이 사람과 함께라면, 하고 나는 결혼을 결심했을 때 생각했다.이런 남자와 함께라면, 절망적으로 뒤얽히지 않고,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하지도 않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불행의 그림자라고는 한 점도 없는 그의 젊음에 안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일까. 아니 어쩌면 행복 따위는 딱히 바라지 않는 것 아닐까. 어른이 된 지금도 나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1장 2008년 6월 하 나 와 낡 은 카 메 라 하나는 등 뒤에 마치 폭풍우를 거느리고 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일기 예보에서 태풍 소식을 들은 초등학생처럼 이제나저제나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불안감을 느꼈다. -2장 2005년 11월 요 시 로 와 오 래 된 시..

한밤의 도서관 2014.08.25

인질의 낭독회

가족들의 혼란과 걱정, 병상에 누운 운전사와의 인터뷰, 게릴라 조직의 실태 등이 한차례 보도되고 사건 직후의 충격이 가시면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간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머나먼 어느 산속에 갇혀 있다는 여덟 명을 어느새 서서히 잊어갔다.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차분히 생각하는 것과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게다가 생각할 것은, 언제쯤 풀려날까 하는 미래가 아니다. 자기 안에 간직한 과거, 미래가 어떻게 되든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과거다. 그것을 살며시 꺼내 손바닥으로 보듬어 덥히고 말[言]의 배에 태운다. 그 배가 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익숙한 곳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차라운 돌들에 둘러싸이고 촛불 불빛 밖에 없는 폐옥에 자신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한다. 범인들조차 그런 자..

한밤의 도서관 2014.08.23

비정근

유감스럽게도 나는 천성이 일하기를 싫어한다. 돈은 없어도 괜찮으니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고 싶다. 말이 나온 김에 털어 놓자면 교사라는 직업도 좋아하지 않는다. 대학 3학년 때 취업활동에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뱡향전한을 했던 것뿐이다. “저기, 얘들아. 인간이란 약한 존재야. 그리고 교사도 인간이고, 나도 약해. 너희들도 약해.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가면서 살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어.” “사람이란 말이야, 당연히 호불호라는 게 있는 법이야. 하지만 확실한 건, 사람을 좋아해서 얻을 수 있는건 아주 많지만, 싫어해서 얻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거야. 그런데 굳이 싫어하는 사람을 찾아낼 필요는 없지 않겠어?” 나쁜 일은 한 번에 몰려온다고 어른들이 자주 말하더니 그말, 진짜더라. 나..

한밤의 도서관 2014.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