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3

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

하지만 나는 요즘 들어 진실을 완전히 알아버렸다. 원자력은 미래의 에너지 따위가 아니다. 증기기관에 속한 낡은 기술이자 이미 끝장난 과학이다. 그 증거로 대학에 원자력 학과가 없어졌다. 학생이 없어진 것이다. 이 과학은 학문적으로도 더는 미래가 없다. 모든 것이 안개 밑으로 가라앉으면 좋겠다. 깊고 깊게 잠겨버렸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이 불결하고 고약하고 외설스럽고 피와 배설물의 악취로 가득한 어리석고 용렬한 세상.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나의 인생. 그것들이 무엇 하나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안개에 깊이 잠기면 좋겠다. 그리고 그대로 소멸해 사라져버리면 좋겠다. 흔적도 없이. 비명을 지른 건 덩어리 주위 돌 위로 비어져 나와, 퍼져가고 있는 검붉은 액체 때문이었다. 엄청난 ..

한밤의 도서관 2014.03.11

라이온하트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절망을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쾌활함을 상실하고 울적하고 나른한 표정이 된다. 한 걸음 밖으로 내딛는 순간, 후끈 하고 몸에 들러붙을 것 같은 고온다습한 공기에 압도당한다. 그것은 언제나 배부른 짐승이 얼굴에 대고 숨을 내뿜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지금은 배가 부르니까 살려주지만, 언젠가 배가 고프면 한입에 물고 날카로운 이빨로 찢어발겨 주겠다. 고 선고라도 받는 느낌이다. “그래요, 살아있는 인간처럼 무서운 것도 없지요, 사람을 잡아먹는 건 인간뿐이니까.” 같은 속도로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바늘이 하루의 8분의 5를 지나면 갑자기 하늘은 흐려지고, 창가의 화분에 물 줄 시간이나 된 듯 쏴아 하고 세면기를 뒤집은 것처럼 비가 쏟아진다...

한밤의 도서관 2014.03.08

질풍론도

사과하면서 이게 다 누구 탓이냐! 하고 따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애초에 구즈하라가 좋지 않은 일을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 내버려둔 것이 원인이지 않은가. 그런데 자기는 도쿄에서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 부하한테 전화로 질타만 하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한 번 더 구시렁거리면, 도고에 대한 악담이 봇물처럼 터질 것 같다. “알아. 있지, 네즈 씨, 이론은 전부 알아.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몸이 움직이지 않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아지경으로 탈 수가없게 돼 버렸어. 이런 나, 어쩌면 좋을까?” “어쩔 수 없는 경우란 게 있는 법이다.” “무엇을 위해? 세상을 위해? 국민을 위해? 아니잖아.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것뿐이잖아.”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 책은 거의 다 읽지만 읽히지 않는 건 과감하게 버..

한밤의 도서관 2014.03.04

숙명

유사쿠는 생각했다. 죽음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일까? 미사코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키히코를 잃는 것도, 그의 고통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키히코가 살인범으로 체포됐을 때 자신이 당하게 될 여러가지 피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아키히코가 체포되어 지금 생활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프다는 것이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것은 뒤숭숭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뭔가에 쫓기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는 쫓아오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잠에서 깨자 씁쓸한 뒷맛만 남았다. 무엇에 쫓기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그럴수록 괜히 불쾌감만 더해져 꿈에 대해서는 그만..

한밤의 도서관 2014.02.12

K·N의 비극

인간이라는 생물이 구제불능인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이소가이 자신도 포함해서 말이다. 돌계단을 오르기 전에 슈헤이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어둠에 삼켜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퇴로가 가로막힌 것만 같았다. 몸을 앞으로 되돌리고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마치 엄폐물이 없는 무방비한 공간에 내던져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괴가 있다면 아무런 걸림돌 없이 자신을 덮쳐 올 터였다. 등 뒤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슈헤이는 고개를 돌려 몇 번이고 돌아봤지만 그러고 있는 중에도 등 뒤는 항상 존재했다. 뒤를 보면 앞이, 앞을 보면 뒤가 요괴 소굴로 변해 슈헤이의 등 뒤로 달라붙었다. 지금 나쓰키 슈헤이는 아내를 향한 양가적인 감정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애정과 증오, 자비와 무지비의 틈바..

한밤의 도서관 2014.02.11

회귀천 정사

사람의 목숨이, 그 한 송이 꽃을 묻기 위한 의식이라면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뒷모습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스치는 것이라면, 대필가와 오누이가 말 없는 뒷모습으로 저승의 어둠 속으로 가져가려 했던 그 진상을 저 역시 뒷모습으로 배웅하고 싶습니다. - 등나무 향기 中 한번 말라 시들어버린 꽃은 그저 모든 것이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평소라면 다양한 색채의 화사한 네온사인들이 한데 얽혀 연기처럼 부옇게 일어나 밤거리를 비추었을 텐데 그날 밤은 어둠이 바닥을 핥고 있었다. 등불이 꺼지면 사라져버리는 거리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도라지 꽃 피는 집 中 형님은 짙은 어둠을 칠한 우산처럼 침묵을 활짝 펼치고 언제나 그 안에 쏘옥 들어가 자신의 진짜 얼굴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때..

한밤의 도서관 2014.02.10

당신 인생의 이야기

그리고 이렇게 느낄 때도 있었다. 천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게 솟아 있는 수직의 깎아지른 절벽이며, 배후에 있는 흐릿한 대지도 이와 똑같은 절벽이고, 탑은 이 두 절벽 사이로 팽팽하게 쳐진 밧줄이다. 아니, 가장 끔찍했던 것은 한순간 위아래의 구분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육체가 어느 쪽을 향해 끌리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던 순간이었다. 높은 곳에 대한 공포를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뒤숭숭한 잠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고, 자면서 벽돌 바닥을 움켜쥐려고 했던 탓에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는 광산의 갱도 안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두려움을 맛보았다. 천장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힐라룸은 물이 천장에 닿기 직전에 마지막 숨..

한밤의 도서관 2014.02.04

Q&A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죠. 실은 까마귀의 생태가 아직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고요. 뭐, 인간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죽음이 얼마 안 남은 사람은 독특한 냄새가 납니다.” 어떤 냄새입니까? “잘 표현을 못 하겠군요. 그야말로 시취屍臭랄지. 신체 기관이 이미 생명 활동을 중단해 안쪽에서 조금씩 썩어가는 냄새라고 하면 될까요. 나이를 먹으면 그 냄새에 민감해지거든요. 친구들을 만나도 누구한테 그 냄새가 나는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합니다. 그런 냄새는 맡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론 혹시 조금이라도 그런 냄새가 난다면 놓칠 순 없다고 혈안이 되고 말이죠. 그러다 그 냄새가 나는 녀석을 발견하면 다가서서 킁킁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어요. 입 밖에 내서 말하진 않아도 다들 같은 느낌일 겁니다. 서로 감시하는 ..

한밤의 도서관 2014.01.27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그날 이후로 나는 가슴이 설레는 일이 생길 때면 그것이 오래가지 못하고 처참히 끝나버릴까봐 불안해하곤 했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의 경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어둠 속에서 느꼈던 섬뜩한 차가움, 할머니의 젖은 얼굴에 함부로 흔들리며 들러붙던 검은 머리카락. 모든 축제는 결국 끝나버린다는 공포감, 결국 아무도 남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에 나는 몸을 떨었다. 모든 것은 떠나버린다, 시들어 버린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징어를 질겅거리는 율이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너도 언젠간 나를 떠나겠지. 하지만 내가 고백하지 않으면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억눌렀던 감정의 반발심일까. 율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어느새 기묘한 감정으로 숙성되고..

한밤의 도서관 2014.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