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Q&A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죠. 실은 까마귀의 생태가 아직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고요. 뭐, 인간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죽음이 얼마 안 남은 사람은 독특한 냄새가 납니다.” 어떤 냄새입니까? “잘 표현을 못 하겠군요. 그야말로 시취屍臭랄지. 신체 기관이 이미 생명 활동을 중단해 안쪽에서 조금씩 썩어가는 냄새라고 하면 될까요. 나이를 먹으면 그 냄새에 민감해지거든요. 친구들을 만나도 누구한테 그 냄새가 나는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합니다. 그런 냄새는 맡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론 혹시 조금이라도 그런 냄새가 난다면 놓칠 순 없다고 혈안이 되고 말이죠. 그러다 그 냄새가 나는 녀석을 발견하면 다가서서 킁킁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어요. 입 밖에 내서 말하진 않아도 다들 같은 느낌일 겁니다. 서로 감시하는 ..

한밤의 도서관 2014.01.27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그날 이후로 나는 가슴이 설레는 일이 생길 때면 그것이 오래가지 못하고 처참히 끝나버릴까봐 불안해하곤 했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의 경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어둠 속에서 느꼈던 섬뜩한 차가움, 할머니의 젖은 얼굴에 함부로 흔들리며 들러붙던 검은 머리카락. 모든 축제는 결국 끝나버린다는 공포감, 결국 아무도 남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에 나는 몸을 떨었다. 모든 것은 떠나버린다, 시들어 버린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징어를 질겅거리는 율이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너도 언젠간 나를 떠나겠지. 하지만 내가 고백하지 않으면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억눌렀던 감정의 반발심일까. 율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어느새 기묘한 감정으로 숙성되고..

한밤의 도서관 2014.01.23

배를 엮다

얼핏 보아서는 무기질한 단어의 나열이지만, 이 막대한 수의 표제어와 뜻풀이와 예문은 모두 누군가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쓴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끈기인가. 얼마나 대단한 말에 대한 집념인가. 마지메는 1층 전체를 책으로 가득 메우고, 다케 할머니는 2층 전부를 사용하며 유유히 소운장에서 살고 있다. 만약 방이 조금이라도 거기에 살고 있는 이의 내면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면, 나는 말을 잔뜩 모으기만 하고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인간이겠지. 아무리 말을 못해도 상대가 책이라면 침착하게 깊고 조용히 대화할 수 있다. 또 하나. 학교 쉬는 시간에 책을 펴 놓고 있으면 친구들이 괜히 말을 걸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이불에 누워서 형광등 줄을 당겼다. 도라가 오지 않을까 싶어서 마지메는 잠들지..

한밤의 도서관 2014.01.20

미소짓는 사람

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요. 겉으로는 싱글벙글하면서 속으로 칼을 갈고 있던 게 아니냐는 거죠?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짜증 나는 녀석을 싫어하는 거랑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건 상당히 다르다고 봐요. 꾹꾹 눌러 참지 않으면 한마디가 아니라 온갖 욕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직장에서 서로 욕을 하며 싸울 수는 없기에 가능한 한 이치를 내세워 상대의 잘못을 따질 작정이었다. 역시 씨알도 안 먹히나. 이렇게 될 줄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자 헛고생했다는 생각에 힘이 쭉 빠졌다. 가지와라에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인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팀워크 같은 건 염두에 없을 뿐 아니라 염치도 없이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가지와라는 외계인이나 다름없다. 똑같이 일본어로 말했지만 상대에게..

한밤의 도서관 2013.09.17

격투하는 자에게 동그라미를

비 내리는 3월, 잘 맞지도 않는 구두를 질질 끌면서 역으로 향했다. 스타킹에 물이 튀겨서 기분이 나빴다. 나는 이 스타킹이라는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무르기 쉬운 피부를 이런 정체 모를 것으로 감싸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 면접관은 하기와라 쇼켄을 닮았다. 나는 그의 긴 손눈썹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기에 어떤 질문을 받고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저 그랬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때는 얼마든지 ‘무난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뚱뚱한 사람이 와구와구 먹고 있는 걸 보면, ‘아유, 그렇게 먹으면 안 되지’ 하고 걱정이 돼서 가슴이 아파. 영양사가 되어 식이요법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나 정말 뚱보를 좋아하는 성향일까?”-지망 中 4월이 ..

한밤의 도서관 2013.08.18

킹을 찾아라

자신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며 죽음의 충동에 시달리는 것은 자살성 사고라 불리는 전형적인 우울증 증상이었다. 처음에는 하소연이나 할 작정이었지만, 한번 물꼬가 트이자 수다스러운 택시기사처럼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아는 사람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이었지만 두 번 볼 일 없는 사람을 상대로 구태여 자신을 꾸밀 필요는 없었다. - 제 1부 A “검시하는 중에 시신의 양손 손톱이 깔끔하게 깎여 있는 것을 발견했지. 피해자가 스스로 깎은게 아니라 죽고 나서 범인이 깎은 거다.” “손톱에서는 생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데 어떻게 죽은 뒤에 깎은 줄 알죠?”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좌우 균등하게 깎여 있었거든. 스스로 손톱을 깎으면 오른손과 왼손에 뚜렷한 차이가 난다. 오른손의 손톱은 왼손으로, ..

한밤의 도서관 2013.08.07

원숭이와 게의 전쟁

아, 카페오레가 새로 나왔네. 175엔이면 스타벅스보다 싼데. 가만있자, 여기가 어디였지? 음, 패밀리 마트로군. 앞으로는 패밀리마트만 찾아다녀야겠어. 이 정도 크기 카페오레는 흔할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없단 말이야. 준페이에게 등을 떠밀려서 도모키도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준페이가 “찬찬히 설명할 테니까”라고 말을 꺼낼 때는 대체로 좋은 얘기가 아니다. 아무리 기분 좋게 연주해도, 아무리 멋진 곡이라도 악보에는 끝이 있고 마지막 음표가 그려져 있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미나토는 한동안 눈을 감은 채로 앉아 있었다. 마지막 선율이 홀 맨 끝까지 가 닿으며 그 선율이 서서히 홀에 흐르는 시간 속으로 녹아드는 순간, 폭발하는 듯한 박수 소리가 일었다. 사와가 안뜰용으로 준비해 둔 슬리퍼를 꿰신고 ..

한밤의 도서관 2013.07.29

자물쇠가 잠긴 방

하지만 타카자와의 말에는 인간적인 감정이 부족했다. 이렇게나 관대하게 대해주는데 왜 마음에 와 닿는 게 하나도 없을까 싶어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타카자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짜증 같은 것이 섞여 나왔다. 이렇게 감정이 없는 냉혈동물 같은 인간까지 짜증나게 할 정도니까 자신이 때때로 에노모토에게 짜증을 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준코는 묘하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자물쇠가 잠긴 방 中 “저도 그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 발견자가 범인일 경우, 밀실을 억지로 열기를 주저하거나 최대한 손을 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죠. 뭐, 당연한 이야깁니다. 시체를 발견하는 척하며 스스로 밀실을 깨뜨리면 애써 만든 트릭이 무의미해지니까요.” -삐뚤어진 상자 中 드디어 읽은 [자물쇠가 잠긴 방]드라마보다 먼저 ..

한밤의 도서관 2013.07.25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

1년 후, 5년 후, 어떠한 미래건 오늘이라는 날을 넘기지 못하면 영원히 오지 않는다. 걱정은 미래가 아니라 오늘, 지금 해야 한다.-신의 정원 中 이유가 수없이 많다는 말은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하고 똑같지 않을까, 하고. 자연은 명쾌해서 좋다. 카를로는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인간은 명쾌하지도 않고 단순해지지도 못해. 인간은 언제나 처음 일만 기억한다.첫 만남, 첫 데이트, 첫 키스. 처음 사랑을 나누었을 때의 일. 하지만 마지막 일은 언제나 흐지부지해진다. 그게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는 의식하지 못하는 일도 많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경우도 있다. 아아, 그때가 마지막이었구나 하고 우리는 언제나 멀리 있는 경치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회상할 뿐이다. -이유 中 어머니도, 바로..

한밤의 도서관 2013.07.22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 기 괴 환 상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엔 제정신인 거 같고, 또 남들도 그렇게 대해준 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진짜 제정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어쩌면 미치광이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너무 심하다면 정신병자일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저라는 인간은 정말 이 세상이 너무 시시해서 살아 있는 것이 지루하고 지루해서 아주 미칠 것만 같습니다. -붉은 방 中 돌아라, 돌아라, 시계바늘처럼 멈추지 말고. 네가 돌고 있는 동안은 가난도, 늙은 아내도, 코흘리개 어린애의 울음소리도, 월남미로 지은 도시락도, 우메보시 하나뿐인 반찬도 뭐도 모든 걸 잊는다. 이 세상은 즐거운 목마의 세계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저물고, 내일도 모레도 또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목마는 돌아간다 中 불현듯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어쩌면 영겁토록 이렇게 커다랗게 원을..

한밤의 도서관 2013.05.24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내가 뭔들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이런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강제로 이런 곳에 끌려와 망신만 당하다니, 괜히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한심했다. 후회든 분노든 사실은 한심한 나 자신을 비켜가기 위해 생겨난 감정일 뿐이었다. 햇살이 차츰 따뜻해졌다. 기온이 오르면 공기에 여러 가지 냄새가 섞이기 시작한다. 작은 강을 흐르는 맑은 물의 달콤함. 이제야 안간힘을 쓰며 흙을 뚫고 나오려는 연한 풀의 청초함. 어디선가 마른 가지를 태우는 고소함. 겨울 동안 깊은 산속 어디선가 죽은 동물의 썩은 냄새. 삼라만상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사내 이름은 요키 中 봄의 위력은 대단하다. 지금까지 단색으로 칙칙했던 화면이 순식간에 컬러풀하게 바..

한밤의 도서관 2013.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