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3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

“여자는 다른 여자의 존재에 민감해서 남자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지요. 밤에는 더 농밀해지고 더욱 정열적이죠. ……알죠? 남자는 기꺼이 그걸 누리고, 여자는 점점 도를 더해가고. 그런 식으로 되풀이 되는 거죠.” 배신의 정의는 무엇일까? 신뢰를 짓밟히는 것이 배신일까? 그러나 신뢰는 짓밟히는 바로 그 순간에 무너지고, 결국 남는 것은 자존심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존심이 바로 배신이라는 행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나 자신이 무섭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여자에게 실컷 이용당하고도 눈치 채지 못한 한심함. 스승이란 든든한 방패를 잃어버리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연구세계에서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 그런 현실이 눈앞에 들이닥쳤는데도 무감각한 채, 어떻게든 해보려는 기..

한밤의 도서관 2013.04.12

흰 뱀이 잠든 섬

왠지 뱃속이 묵직했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혹은 누군가가 자신을 찾는 듯한 불안한 기분에 무작정 걸었다. 문득 비린내가 나서 손가락으로 배를 더듬었더니 뭔가가 미끈거리고 축축했다. 흙탕물이 묻었나 싶어 손을 들어보니 피였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물컹한 내장 같은 물체가 비어져나와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 한 모퉁이가 하얗게 빛났다. 어떻게든 저기까지 가자, 저 하늘 아래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사토시는 그렇게 확신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는 감촉이 불쾌했지만,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싶어서,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걸었다. 다카가키에 있을 때 사토시는 가끔 고이치를 생각했다. 창밖으로 ..

한밤의 도서관 2013.04.10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 고스케는 자신이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잘못 섞여든 작은 강의 물고기인 것만 같았다. 이런 거대한 세상이 있다. 이런 곳에서 인생을 구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세계였다. 자신은 좁고 어두운 강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당장 내일부터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강 밑바닥에서 살아야 한다. 오늘 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올까. 나미야 잡화점의 존재가 자신의 인생에 큰 의미를 갖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지도 모른다. 사촌 오빠에게 구입하라고 추천해주고 나는 빌려 읽은 책 ㅋㅋ 페이지 수가 꽤 되는데 정말 술술 읽힌다.출퇴근 하루 만에 다 읽어 버렸네. 시간..

한밤의 도서관 2013.04.09

옛날 이야기

스물일곱 살이 되어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갑자기 내장 기능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거나, 밤길에 간발의 차로 폭주 차량을 피했다거나 하는 일 따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진이 좀 빠지긴 했지만 어쨌든 살아서 이 나이를 넘기고 싶었기 때문에 방심은 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파는 게 아니다. 대가에 걸맞은 서비스를 팔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음은 돈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돈과 얽힌 분쟁들이 그토록 많겠는가? 돈이 마음의 표현이라서 사람도 거기에 배신과 증오를 투영하는 게 아닌가? 너는 매일 아침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오늘의 운세 코너를 본다고 했지. 운명을 믿냐?……생각해보니 사랑을 믿느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쑥스러운 질문이네. 나는 믿고 싶지 않다. 운명..

한밤의 도서관 2013.03.28

비밀의 화원

아무리 좋아한다 말을 해도,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줘도 내겐 전혀 와 닿지 않는다. 피지도 못하고 저버린 개점축하 화환 속의 봉오리처럼, 냉장고 안에서 천천히 부패되어가는 생고기처럼, 내 마음속 한 부분이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 없이 꽁꽁 얼어붙은 화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까, 이따금씩 의미 없는 가정을 해본다. 식상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또는 친구들과 무의미한 수다를 떨면서. 낮 시간대 전철은 시원하고 밝다. 승객들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운반되는 인스턴트 식품마냥,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얌전히 앉아 있다. 태양은 높은 곳에서 전철의 스테인리스 상판을 집요하게 내리쬐고 있다. 하지만 에어컨이 가동 중인 실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

한밤의 도서관 2013.03.27

월어

그 책이 읽혀진 책인지 아닌지는 펴보았을 때 책장의 미묘한 저항감으로 알 수 있다. 세나가키의 손 안에서 책장은 부드럽게 넘어갔다. 하지만 찢어진 곳은 없다. 세나가키는 감탄했다. 가게에 있는 고서적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 책들을 쓴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여기에 남겨진 것은 이 세계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고요한 속삭임 뿐이다. 예전에 살아 있을 때 경험한 기쁨이나 슬픔, 사고, 고민의 일부이다. 마시키는 그 책들에게서 들리는 속삭임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책은 생명이 길다.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소중히 다뤄진 책은 낡은 것도 잊은 채 무궁당에서 한가롭게 다음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책을 지키는 데 바깥세상도, 시간도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었..

한밤의 도서관 2013.03.26

로맨스 소설의 7일

별이 아름다웠다. 공기는 무겁게 상반신에 척척 달라붙었다. 길가의 집 앞에 늘어선 화분의 초록식물은 이미 잠에 빠져있었다. 내 주변에는 한 가지 일에 몇 십 년씩이나 몰두하는 사람들만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칸나를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존재한다. 결정적으로 일에 대한 근성만 결여된 인간이 존재한다 이 말씀이다. 왜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일을 하는 거지. 여름휴가도 없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강박관념에 휩싸인 듯, 나도 모르게 일을 받게 된다. 칸나처럼 분방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모래성 쌓기에 열중했던 유치원생처럼 그라면 아무런 조바심도 없이 3년은 놀고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게 특정 인물과 이내 농밀한 관계를 구축하거나, 남자를 뒤돌아보게 할 만큼의 매력이 있다고 믿지..

한밤의 도서관 2013.03.25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그런 인기척의 잔재를 발견할 때마다 가케루는 왠지 겸언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달리면서 삼륜차나 비료 봉지를 살핀다는 사실을 주인은 모른다. 모르는 채 그런 것들을 움직이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케루는 왠지 유쾌해졌다. 상자 속의 평화로운 낙원을 살며시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처마 밑에 놓여진 삼륜차와 밭 한구석에 뒹굴고 있는 비료 봉지. 가케루는 그런 것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비 오는 날에는 삼륜차가 차양 밑으로 들어가고, 비료 봉지의 내용물이 서서히 줄어들다 마침내 새 봉지로 바뀌어 있기도 했다. 신동과 무사는 마작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다. “ ‘월요일 심야에 방송! 기대하세요!’라고 해놓..

한밤의 도서관 2013.03.21

변호 측 증인

지금 생각하면 그 서약 문구를 만들어낸 사람은 그리 섬세한 타입은 아니다 싶다.목사가 남편에게 나를 아내로 받아들이겠느냐고,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애정과 경의로써 아내를 대하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심하게 긴장한 상태였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다음은 목사의 물음에 내가 답할 차례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볼 여유가 없었다.목사는 우리에게 형식에 따라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표현으로 영원을 맹세케 했는데, 이 ‘죽음’이란 대체 누구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지금까지 자기가 얼마만큼 인생을 요령 있게 살아왔는지 미미 로이는 멍하니 생각해 보았다. 스기히코 부인은 노부의 표정에 단순한 의례적인 사양과는 다른 미묘한 주저가 어린 것을..

한밤의 도서관 2013.03.14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Why- 독서하는 습관을 붙이는 것은 일상의 온갖 비참한 일들로부터 피난할 방공호를 짓는 일이다. 서머셋 모옴 W. Somerset Maugham 더 많이 읽을 수록, 더 많은 지혜를 얻게 된다. 더 많이 배울수록, 더 많은 곳을 여행하게 된다.닥터 수스 Dr. Seuss, 『눈을 감고도 읽을 수 있어! I Can Read With My Eyes Shut!』 진실은 언제나 소수의 몫이고 소수는 늘 다수보다 강하다. 다수의 힘이란 의견이 없는 무리가 모여 숫자만 내세우는 허상일 뿐이지만, 소수 진영은 진정한 자기 의견을 가진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이다. 다수는 소수가 더 강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의견을 모으려 하지만, 진실은 이미 새로운 소수에게 눈길을 돌린 다음이다.키에르케로그 Soren..

한밤의 도서관 2013.03.12

그대는 폴라리스

“당신을 생각하면 난 왠지…… 오카다, 넌 어떨 때 외로워져?”“맛있는 음식을 다 먹었을 때.” “그래도 연애편지인데 뭐 다른 거 없어?” 왜 너한테 내 외로움을 털어놔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데라지마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하는 수 없이 머리를 굴려봤다. “글쎄…… 해질녘에 선로를 따라 길을 걸을 때 말야.” “응.” “전철 창문 너머로 집으로 가는 사람들 모습이 보이지만, 곧바로 스쳐 지나가지. 그렇게 전철이 몇 대고 내 옆을 지나가. 불 켜진 전철 안은 아주 조용하다는 걸 알 수 있어. 내가 걷는 거리도 조용해. 오로지 불꽃을 일으키는 전철만 사람들을 싣고 소리를 내며 달려. 그럴 때 난 왠지 외로움을 느껴.” -영원히 맺지 못할 두 통의 편지 中 난 늘 이 점이 신..

한밤의 도서관 2013.03.11

다크 존

“다크 존은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공간이다. 현실세계의 시간과 이곳의 시간은 완전히 다르다. 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같은 자리를 맴돈다. 그로 인해 다크 존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시간은 사실상, 혹은 감각상 영원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인생이란 늘 그랬다. 항상 이기는 일만을 생각했다. 대학 입시 준비도 그랬지만 우선순위는 낮았다. 무엇보다도 장기가 우선이었다. 장기에서 이기는 것만이 인생을 개척 해준다고 믿었다. 이기고, 이기고, 또 이기면 장기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 거기서 또 이기면 일류 기사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대기업 직장인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다. 그러고도 또 이기고, 이기고, 이기면……. 재능 차이라면 이제 와서 달리 뾰족..

한밤의 도서관 2013.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