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그대는 폴라리스

“당신을 생각하면 난 왠지…… 오카다, 넌 어떨 때 외로워져?”“맛있는 음식을 다 먹었을 때.” “그래도 연애편지인데 뭐 다른 거 없어?” 왜 너한테 내 외로움을 털어놔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데라지마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하는 수 없이 머리를 굴려봤다. “글쎄…… 해질녘에 선로를 따라 길을 걸을 때 말야.” “응.” “전철 창문 너머로 집으로 가는 사람들 모습이 보이지만, 곧바로 스쳐 지나가지. 그렇게 전철이 몇 대고 내 옆을 지나가. 불 켜진 전철 안은 아주 조용하다는 걸 알 수 있어. 내가 걷는 거리도 조용해. 오로지 불꽃을 일으키는 전철만 사람들을 싣고 소리를 내며 달려. 그럴 때 난 왠지 외로움을 느껴.” -영원히 맺지 못할 두 통의 편지 中 난 늘 이 점이 신..

한밤의 도서관 2013.03.11

다크 존

“다크 존은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공간이다. 현실세계의 시간과 이곳의 시간은 완전히 다르다. 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같은 자리를 맴돈다. 그로 인해 다크 존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시간은 사실상, 혹은 감각상 영원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인생이란 늘 그랬다. 항상 이기는 일만을 생각했다. 대학 입시 준비도 그랬지만 우선순위는 낮았다. 무엇보다도 장기가 우선이었다. 장기에서 이기는 것만이 인생을 개척 해준다고 믿었다. 이기고, 이기고, 또 이기면 장기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 거기서 또 이기면 일류 기사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대기업 직장인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다. 그러고도 또 이기고, 이기고, 이기면……. 재능 차이라면 이제 와서 달리 뾰족..

한밤의 도서관 2013.03.07

탐정영화

나는 원래 추리력이 뛰어난 편이 못 된다. 추리소설을 좋아해 자주 읽기는 해도 돌이켜보면 범인을 맞힌 적은 없다. 하지만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르다. 작품 속 단서가 아니더라도 연기하는 배우나 영화이론 등을 생각하면 대개 범인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드는 사람도 관객을 속이는 일에 중점을 두고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 추리소설을 별로 읽지 않지만 기본은 알아요. 첫째, 범인같지 않은 인물이 범인이다. 그렇죠? 그렇다면 바로 저죠. 다들 제가 범행을 저지를 수 는 없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가끔 전화선이 전선이 아니라 비닐 튜브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스..

한밤의 도서관 2013.02.26

N.P

‘슬퍼서 운 건지, 아니면 슬픈 일로부터 해방되어 운 건지, 어느 쪽이 됐든 아직 깨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 전화선 이쪽과 저쪽, 쇼지가 있던 공간과 내가 있던 장소 사이의 거리, 천국과 지옥보다 더 멀고 복잡한, 아무리 좋아해도 결코 전해지지 않았던 것, 전하려 하지도 않았고, 전할 재주도 없었고, 수신 능력이 없어, 알 길 조차 없었던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시시하다. 그리고 조금은 쓸쓸하다. 뒤로 멀어져 가는 하얀 가로수 길과 저무는 하늘 아래서, 그녀가 하는 말을 정말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난, 그 기분 알 것 같아. 난 말이지, 사물을 보는 방식이 상당히 근시안적이거든. 그냥 내버려두면, 평생 여기에 살면서 매일 똑같은 나날을 보내고..

한밤의 도서관 2013.02.06

엔드게임

그리운 학생 시절의 감각. 이런 시절도 있었다. 세계는 단순하고, 눈앞에는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자기는 젊고 총명하고 매력적이며, 그런 자기를 기다리는 것은 틀림없이 빛나는 미래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이 넘치고 있었다. 그리운 어리석음. 사랑스러운 어리석음. 실제 세계는 모순과 타협, 곤란과 좌절로 가득하건만. 기묘한 기분이었다. 초조감과 긴박감은 있는데, 왜 그런지 마음은 무척 차분했다. 이 세계는 어차피 이미 종반에 접어들었다. 나는 그것을 마지막까지 지켜보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언제부터 이런 얼굴을 하게 됐을까. 마치 죽은 사람 같은 눈이다. 유리 너머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어, 그쪽에 사는 에이코는 몹시 고통스러워 보인다. 이쪽에 있는 나는 이렇게 행복하고 만족하고 있는데. 드..

한밤의 도서관 2013.02.05

민들레 공책

자기가 행복했던 시기는 그 당시에는 모르는 법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처음으로 아아, 그때가 그랬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수많은 돌멩이를 주워 짊어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계절이 지나간 뒤에, 지친 손으로 바구니를 내려놓고 지금까지 주운 돌멩이를 살펴보면 그중에서 몇 개인가 작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그 몇 번의 계절. 그 저택에서 보낸 계절이 그 보석이었습니다. -창가의 기억 中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걱정하지 않는 법이야. 자기가 손에 넣었다가 잃을지도 모르는 것.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먼저 손에 넣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지금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명확하지 않나.” -빨간 연 中 저..

한밤의 도서관 2013.02.04

빛의 제국

복 받은 사람은 종종 오만하다. 복 받은 상태가 당연한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라도 빠졌을 때 맨 먼저 느끼는 감정은 노여움이다. 아이코가 집을 나갔을 때도 야스히코가 처음 느낀 것은 불편하게 됐군, 하는 불유쾌한 감정이었다. 시트를 세탁해 줄 여자를 찾아야겠어. 늘 결여된 인간, 늘 달리면서 무언가에 목말라하는 인간이고 싶다.-다루마 산으로 가는 길 中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를 하게 내버려 둔다. 부하직원들도 바보는 아니라 자신이 실패한 부분, 허술했던 부분을 교묘하게 에누리 하기도 하고 책임 전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빠짐없이 철처하게 보고를 시키면서 한두 곳 세세한 부분을 지적하면, 점점 실체가 들통 나면서 결국에는 처음과는 90도쯤 다른 보고가 된다. 머릿속에서 고무장갑을 낀 차가운 손이 슬슬 어..

한밤의 도서관 2013.02.01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우리 셋은 서로의 결속을 다지는 상징으로 손목시계의 앞면을 손목 안쪽으로 돌려서 차고 다녔다. 당연히 허세였지만,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있으면 시간이 사적인 것으로, 심지어는 내밀한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에이드리언이 그 제스처를 눈여겨 보고 그대로 따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우리는 ‘벨탄샤웅’이니 ‘슈투름 운트 드랑’이니 하는 용어를 즐겨 썼고,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상상력의 첫 번째 의무는 위반하는 것이라고 서로에게 다짐하듯 확언했다. 우리의 부모들은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는데, 자식들이 갑자기 유해한 세력에 노출돼버린 순진무구한 존재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콜린의..

한밤의 도서관 2013.01.30

네버랜드

어쩐지 짜증나는 녀석이라고 느꼈던 것은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일일이 자기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라고 깨달은 게 그때였다. “나 말이야, 이 열차에 타는 꿈을 자주 꾼다.” 느닷없이 미쓰히로가 입을 열었다. “이거?” 요시쿠니는 기분이 울적해지는 차창 밖 풍경을 보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잿빛 논밭. “응. 꿈속에서는 늘 다른 승객은 한 사람도 없고 나 혼자 타고 있어. 그럼 어느새 창밖이 바다가 되어 있는 거야. 아, 맞다, 여기 바다였지. 하고 생각해. 창밖 어디를 봐도 죄다 수평선이고, 쏴쏴 파도소리가 들려와.” “오오. 그러고?” “그걸로 끝.” “그게 다냐?” “그게 다야.” 이야기는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끝나고, 두 사람은 또다시 열차의 리듬 속에 몸을 잠갔다. 흔들리고 있..

한밤의 도서관 2013.01.26

매스커레이드 호텔

어쩔 거냐는 말을 구리하라가 입에 올린 게 두 번째였다. 그 말에 닛타는 그제야 구리하라가 생트집을 잡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사소한 일로, 라고 닛타는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어떤 일로 인간이 상처를 입는지, 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원래 결혼식은 행복을 상징하는 의식이지만 신랑 신부에게나 행복한 것일 뿐, 세상 모두가 진심으로 축복해주는 것만은 아니다. 평생의 반려자로 단 한 명의 이성을 선택한 이상, 당연히 다른 누군가는 그 선택에서 제외된다. 그중에 왜 내가 아닌가, 라는 불만을 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불만을 품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괜찮지만 그것이 무서운 증오로 바뀔 경우에는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사람들이란 한번 맛있는 음식을 내놓으..

한밤의 도서관 2013.01.24

제노사이드

불행이라는 존재는 그것을 보는 타인 입장인지, 직접 겪는 당사자 입장인지에 따라 완전히 견해가 달랐다. 마냥 어리던 시절은 이제 아마도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는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모라는 존재는 죽음을 통해서 자식에게 마지막으로 가장 큰 교육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좋게도 나쁘게도. 루벤스가 보기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경쟁의 원동력은 단 두가지 욕망으로 환원되는 듯했다.식욕과 성욕. 인간은 타인보다 많이 먹거나 혹은 저장하고, 보다 매력적인 이성을 획득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고 발로 차서 떨어뜨리려 했다. 짐승의 본성을 유지한 인간일수록 공갈이나 협박 같은 수단을 쓰며 ‘조직’이란 무리의 보스로 올라가려 안달했다.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 경쟁이야말로 이러한..

한밤의 도서관 2013.01.21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희망이 훨씬 더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다. 종국. 끝.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결승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화려한 관과 잘 관리되는 묘지도 그 사실을 바꿔주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 모든 사람에겐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쯤 있다. 세상에는 법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 없다. 하루하루가 파멸의 전날 밤 같다. 우리는 매일 위기와 씨름하며 살아 간다. 인간이 짐승보다 낫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다. 인간은 원래 야만적이다. 잘 먹고사는 사람들은 그저 게으를 뿐이다. 음식을 위해 남을 죽일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옷..

한밤의 도서관 2013.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