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이별 후의 고요한 오후

올림픽을 ‘관람’한다는 건 매번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올림픽이 열렸던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 소란과 적막을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생활은 계속되는 것이다. - 삿포로의 빛 中 “만약, 만약 말이야, 우리 둘이 헤어지면 그 후엔 어떻게 지내게 될까?”...... “모르겠는데.” 나는 대답했다. “그냥, 굉장히 조용한 오후가 찾아올 것 같아.” “조용한 오후?” “그래. 바람도 물결도 없는, 완전히 평온한 우주 공간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시간.” 돌이킬 수 없는 나날을 그리워하고 필사적으로 끌어 모아도 결국은 공허한 적막만이 남을 뿐이다. 추억이란 아무리 열심히 짜 맞춘다고 해도 한 장의 퍼즐과는 비교할 수 없다. - 이별 후의 고요한 오후 中 달리 무엇을 하면 좋을지..

한밤의 도서관 2012.04.05

여형사 유키히라의 살인보고서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시한부 인생이 선고될 날을 상상해본다.화창하게 갠 날이라면, 오히려 서글플 것 같다. 비가 내린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다. 물론 날씨를 맘대로 선택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런 건 생각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바라건대, 그날은 가능한 한 먼 미래이기를. 기분 좋게 잠든다면, 밤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인간에게는, 밤은 끝없이 길 뿐이다. 자기가 죽은 다음 날의 신문을 남자는 상상했다. 한 줄도 안 실리겠지. 만일 실린다고 해도, 사진도 없이 깨알 같은 조잡한 기사로, 동업자라면 모르지만, 그 누구도 읽어주지 않겠지. 그리고 한 인간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모두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겠지. 그 정도의 목숨. 그 정도의 존재. 최..

한밤의 도서관 2012.04.03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어쩔 수 없이 나는 과자 판매 코너에 가서 신제품을 확인 하기로 했다. ‘초콜릿에는 폴리페놀이 함유되어 건강에 좋습니다.’ 라는 멋진 광고지가 붙어 있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세상을 구제하는 것은 초콜릿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초콜릿 동호회를 만들어도 될 정도이다. 나는 그 이후 인간은 필사적으로 달려들면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믿고 있다. 될 리 없다고 부정적으로 만사를 보는 인간의 대부분은 스스로 뭔가를 달성한 적이 없는 자이다. 밤의 어두움은 사람의 감각을 이상하게 만든다. 이모가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밤은 인간을 잔혹하게도 만들고, 정직하게도 만들고, 센티멘탈하게도 만들어. 결국 경솔하게 만드는 거야.' 스스로를 타이르듯 말했다. 이런 건 별 거 아냐. 그러고는 숨..

한밤의 도서관 2012.03.22

두번째 제물의 야회

낙원이란 대체 어딜까. 그는 푸르스름한 달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런 곳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미안하군. 당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이번에도 잘해줬어. 하지만 사정이 좀 변해서 말이야.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게 됐네.”까닭 없는우월감을 품은, 골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 까닭이 없는 게 아니다. 죽어가는 인간에 대한 산 자의 우월감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도 무서운 건 뭐지?”“고독이야. 바닥을 알 수 없는 고독.” -결단 中 문제는 두 가지, 이렇게 자신을 몰아가는 방향이 올바른가 어떤가, 그리고 몰아간 끝에 있는 인간을 정말로 비난하고 싶은가 하는 것이었다. -통곡 中 사람은 허망하게 죽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누군가에게 살해되어 자신의 인생을 마쳐야만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갑자기 ..

한밤의 도서관 2012.03.21

차가 달리는 소리. 구급차의 사이렌. 공사 소리. 사람은 근처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난 中 나는 오늘도 한 집 한집 착실하게 돌아다닌다. 오늘도 신발 밑창이 닳는다. 딩동. 할망구가 지껄인다. 내 앞에서 기관총처럼 지껄인다. 평일 낮. 집에 있는 사람이라곤 할 일 없는 노인네들뿐, 할망구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지껄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한다. 여편네들이 모여있다. 애새끼들이 주변에서 떠든다. 수첩을 꺼내 보인다. 여편네들이 얼굴을 마주 본다. 처음으로 본 형사. 드라마 배우와 비교한다. 젊은 여편네가 이것저것 지껄인다. 애새끼가 다리에 들러붙는다. 시끄러, 거추장스럽단 말이다. 하지만 나는 미소를 짓는다. 몇 짤이야? 어린애들 말로 묻는 나. “무섭..

한밤의 도서관 2012.02.13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인간.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은 미치도록 선량을 동경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불량에 이끌리고, 그리하여 결국, 선량과 불량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평생 선량을 동경하고 불량에 이끌리면서 살아간다.-선잠 中 간다가 예약한 가게는 차이나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언덕 위의 전망 좋은 장소이긴 했지만 가게는 초라했다. 원래는 화려했을 다 낡은 간판도 빛바랜 색조만큼이나 허허롭다.- 포물선 中 "모두 곧 죽을 텐데, 땅 같은 걸 사고 싶어 하는 그 심리를 모르겠어." -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中 우주냥이님께서 빌려주신 에쿠니 가오리 책.단편집인데, 러브 미 텐더, 밤과 아내와 세제 이 두 작품이 제..

한밤의 도서관 2012.02.01

새벽거리에서

“죄송합니다. 편리한 말이죠. 그 말을 들으면 대개는 상대 편도 기분이 풀려 어느 정도의 실수는 용서해 주게 마련이거든요. 옛날에 내가 살던 집 옆에 공터가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자꾸 거기서 공을 갖고 놀았어요. 그 공이 우리 집 담에 맞기도 하고 때로는 담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오기도 했죠.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초인종을 누르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죄송합니다. 공 좀 던져 주세요. 그러면 어머니는 평소에는 아이들 공놀이에 대해 투덜거리셨으면서도 막상 아이들에게 대놓고는 별말씀 안 하셨어요. 물론 아이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쉽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거였고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는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는 한마디로 만능 언어 같은거죠.” 즐거운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린다. 그 시..

한밤의 도서관 2011.12.13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

“이 길은 왜 막히는 거지?" 교텐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창문을 닫았다. "밤 아홉 시에 대체 모두 어딜 가는 거야?”“아무 데도 안 가.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다다는 마호로 역 앞에서 30분 정도 어슬렁거렸다. 폐점 시간이 가까운 백화점도 들여다보지 않았고, 호객 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땅만 보고 걸었다. 혼자 있고 싶어. 누가 있으면 외로우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몹시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정처없이 걷다가 사무실에 도착한 다다는 응접 소파에 내놓은 교텐의 타월 이불을 담요로 바꾸었다. 칸막이커튼을 치고 자명종 시계를 맞춘 후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내달리는 차 소리를 들으며 124대 까지 셌다.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다다는..

한밤의 도서관 2011.12.05

플래티나 데이터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다르다는 것 외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마음이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일까? 뇌라는 물질이 만들어낸, 행동을 조종하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것이 곧 마음인 것은 아닐까? 그 증거로, 뇌가 고장이 나면 정신에도 지장이 발생한다. 아사마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여 있는 자명종 시계는 오전 7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람은 7시 정각에 맞추어놓았다. 그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자명종이 울리기 직전에 눈을 뜨는 것은 자신의 집에 있을 때도 흔히 있던 일이다. 체내시계가 정확하기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의사와 상담을 해본 결과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지적..

한밤의 도서관 2011.09.29

도깨비불의 집

이 세상에 밀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분명히 선입관에 사로잡혀서 눈이 흐려졌을 것이다. -도깨비불의 집 中 “예전에 베테랑 형사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범인이 범행을 숨기기 위해 현장에 물건을 놔두었을 때는 한눈에 알 수 있다고요. 뒤가 켕기기 때문인지, 신중해야 한다는 의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기도 모르게 살며시 놓아둔다고 하더군요. 케이 씨도 실제로 보면 알겠지만 그 핀셋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검은 이빨 中 그녀는 턱에 검지를 대고 신중한 모습으로 도어체인 문제를 생각하는 듯했다. 요즘은 뇌를 움직이지 않고 입만 움직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그 모습은 케이의 눈에 매우 신선하게 보였다. 준코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케이 씨가 성악설의 신봉자라는 건 알고 있지만요…….” “전 성악설을 좋아..

한밤의 도서관 2011.08.09

명탐정의 저주

그때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의외로 정확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뻐꾸기 시계란 으레 망가져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전에 살던 세계에서 내가 해 왔던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대체 무엇을 그리도 열심히 해 온 것일까. 소설을 통해 매력적인 세계를 구축해 보려고 했지만, 매력적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 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세계? 그렇다면 언제쯤 만족하게 되는 걸까.-위원회 中 쓰노야마와 협의하면서 나눴던 대화가 생각난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리얼리티, 현대적 감각, 사회성. 이 세 가지를 큰 축으로 삼고 싶어요.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추리 소설계는 살아 남을 수 없어요. 트릭이라든지 범인 알아맞히기 따위로는 어렵습니다." -에필로그 中 도서상품권으로 서점에 가서 산 ..

한밤의 도서관 2011.08.02

명탐정의 규칙

“흔히 말하는 ‘다잉(Dying) 메시지’라고.” “골치 아프지요, 그 패턴은." “그렇지, 뭐.” 나도 얼굴을 찌푸린 채 동의했다. “작가 입장에서는 손쉽게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서스펜스를 높여 주는 효과도 있으니 편리하겠지.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스토리 전개가 부자연스러워져.” “당연히 부자연스럽죠. 도대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메시지 따위를 남길 여유가 있겠어요?” “자, 자, 우린 그저 참고 또 참으며 인내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어. 현실 세계에서도 죽기 직전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리려는 피해자가 한두 명 정도는 있을 수 있잖아.” “그런 것까지는 봐줄 수 있어요. 하지만 왜 죽기 직전에 남기는 메시지가 암호여야 하지요? 범인의 이름을 정확히 써 놓으면 안되나요?” 최후의 한마디-..

한밤의 도서관 201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