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3

신참자

“고부간의 문제는 남자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야. 녹록지 않다고.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각자의 말을 들어 주는 것, 그저 묵묵히 들어 주는 것뿐이야. 절대 반론을 제기해서는 안 돼. 그건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니까. 다 듣고 나서 그렇구나, 지당한 말이다,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기회를 봐서 내가 전하겠다고 대답하는 거야.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진짜로 전하면 안돼. 어떻게 되었느냐고 나중에 추궁을 당하겠지만, 그때는 그냥 견디면 돼. 여자들의 분노의 화살이 자네를 향하도록 하는 것, 해결책은 그뿐이야.” 3 사기그릇 가게 며느리 中 어째서 중년 아저씨라는 작자들은 상대가 좀 젊어 보이면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고우키는 우에스기를 쏘아보았다. 5 케이크 가게 점원 ..

한밤의 도서관 2012.09.12

히다리 포목점

나는 포치코를 생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너무나 넓었다. 문득 내 존재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불안해져 손바닥으로 눈앞을 가렸다. 태양열로 녹을 것 같은 내 손바닥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서글펐다.하지만 나는 도대체 왜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분명 지금일 것이다.흙과 풀의 뜨뜻한 냄새, 조용히 우는 벌레 소리, 통통한 붉은 달, 땀이 살짝 밴 소녀의 손, 스커트 속으로 들어오는 여름밤의 바람. 나는 두근대는 가슴으로 하나하나를 느끼고 있었다. - 모리오 中 요코 씨는 평소에도 30초라는 단위를 중요하게 여긴다.모든 결단은 30초면 충분하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어째서 인간은 한없이 좌우대칭에 가까우면서도 완벽한 좌우대칭은 없는 ..

한밤의 도서관 2012.09.05

악의 교전

예를 들어 어떤 말이 차별어 인지 아닌지는 거기에 포함된 인간의 생각에 의해 결정될 따름이죠. 귀중한 문화유산인 언어를 일부 인간의 방자한 생각으로 말살하는 행위는 당치도 않은, Outtageous한 얘기입니다. 하스미는 그가 시간낭비를 가장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간파했다. 이런 사람은 교사의 급여로 따지자면 상상도 하지 못할 시급으로 움직인다. 그 때문에 시간은 곧 돈이라고 생각하며 하찮은 문제에 필요 이상으로 시간 쓰는 일을 두려워한다. 결국 어려운 상대이기는 하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부류들과는 달리 조기에 결말을 짓기 쉬운 상대이기도 하다. 학교는 아이를 지키는 성역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창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

한밤의 도서관 2012.09.04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드러커를 읽는다면

요즘은 매니저의 자질로 붙임성이 있을 것, 남을 잘 도와줄 것, 인간관계가 좋을 것 등을 중시한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잘나가는 조직에는 손을 잡고 도와주지도 않고, 인간관계도 좋지 않은 보스가 한 명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보스는 가까이하기 힘들고 깐깐하며 고집스럽긴 하지만 종종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인재를 키워낸다. 부하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보다 더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다. 늘 최고의 실적을 요구하고, 자신도 최고의 실적을 올린다. 기준을 높게 잡고 그걸 이루기를 기대한다. 무엇이 옳은가만 생각하지 누가 옳은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적인 능력보다는 진지함을 더 높게 평가한다. 1장-미나미,드러커의를 만나다 ‘우리 제품이나 서비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이다’가 아니..

한밤의 도서관 2012.08.28

마리아비틀

“밀감, 너한테 가르쳐줄 게 있는데, '까다롭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야.” “귀신같이 알아챘네. 밀감, 넌 왜 그렇게 신중해?” “네가 경솔한 거야. 스위치가 있으면 누르고, 끈이 매달려 있으면 잡아당기지. 이메일이 오면 닥치는 대로 열어서 바이러스에나 감염되고.” “가는 것처럼 살아보다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그건데.” “아니죠, 의외로 모두들 목적도 없이 막연하게 살아가지 않나요? 물론 얘기도 하고 놀기도 하지만, 뭐랄까 좀 더.” 인간에게는 자기 정당화가 필요하다. 자기는 옳고, 강하고,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언동이 그런 자기인식과 괴리되었을 때,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변명을 찾아낸다.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 바람피우는 성직자, 실추된 ..

한밤의 도서관 2012.08.27

유리고코로

유리고코로는 제 속에서, 저만의 언어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니까요. 정정할 수도 없고, 이제 어찌할 도리도 없습니다.그것은 평소의 제게 부족한 모든 것,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누군가의 목숨이 사라질 때 생기는, 그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나타내는 데 그보다 좋은 단어가 있을까요. 저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잠자코 서로의 눈을 보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지만, 둘 다 선명한 각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어릴 때 혹이 있었던 제 목덜미는 딱딱해지고 심장은 두근두근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미쓰코도 저도 인간으로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탁한 연못 밑바닥에 사는 추한 메기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때만큼은 수면에 떠올라 깨끗한 공기를 마시..

한밤의 도서관 2012.06.29

스트로베리 나이트

생각해 보면 현대인은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어. 누구도 ‘죽음’을 생생하게 느낀 적이 없어. 분명히 누구나 느끼고 싶어 해. 보고 싶어 하지. 그래서 내가 그걸 보여 준 거야. 생생한 ‘죽음’을, 그 반대편에 자리 잡은 ‘삶’을. 2010년 스페셜 드라마 중 최고였던 [스트로베리 나이트] 그리고 연속 드라마로도 방영해서 (중반에는 좀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끝까지 다 보게 되면 "이건 정말 최고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 작품. 엄마가 보고 싶은 책이 있다고 하셔서, 주문 하는 김에 사버렸다.도서관에도 들어올 듯 싶은데 (요새 도서관을 전혀 갈 수가 없어서 ㅠ)출퇴근 시간 2일 걸렸으니까 넉넉히 4시간 정도에 다 읽었다. 잔인한 부분이 있다고, 한 3군데 정도?(드라마에서는 없었던 내용들)..

한밤의 도서관 2012.06.23

도망자

요즘 말하는 소위 번아웃 증후군(탈진 증후군.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피로감으로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증후군)에 가까웠다는 식으로 본인은 말하더군. “인생 최대의 결단.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어.”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후후, 대체 몇 번이나 결단을 해야 하는 걸까. 할 때마다 ‘최대’가 되어가. 그 왜, 항생물질이 병원균을 죽이면 항생물질에 지지 않는 균이 생기잖아? 내성균이라고 하던가. 그거랑 마찬가지야. 인생 최대의 결단은 내 인생에 수없이 찾아오고, 그때마다 난이도가 높아져서 나한테 힘든 결단을 요구하지.” 무거운 절망감이 바닷가에 밀물이 밀려들 듯 철썩대며 가슴으로 밀어닥쳤다.내인생, 변변찮은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네. 정말로 종막. The..

한밤의 도서관 2012.04.23

두번째 크림슨의 미궁

결국 참기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도, 밤이 되면 찾아오는 추위도, 목욕을 할 수 없는 불편함도 아니었다.“그럼 뭐였어요?” 아이가 물었다. “다리였어.” “다리리고요?” “눈앞을 지나가는 숱한 사람들의 무관심한 다리, 행선지가 분명한 사람들의 다리... 또박또박 견고하게 걸어가는 구둣발 소리가 마치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 나는 살기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는데, 그 발소리는 마치 “너는 실패자다. 네가 하는 일은 모두 무의미하다’고 끊임없이 외치는 것만 같았지.” “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느냐는 얼굴이군. 내게 딱히 그런 취미는 없어. 다만 네가 좀 더 무서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야. 너는 우리의 도시락이니까. 도시락은 도시락답게 더 더 더 공포를 느껴야 마..

한밤의 도서관 2012.04.17

두번째 천사의 속삭임

지금 카미나와 족 청년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이게 뭐냐고 묻네요. 반짝거리는 판 위에 개미 같은 글자가 점점이 널려 있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은가 봅니다. 자꾸만 손을 대려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들의 손에 컴퓨터를 맡길 만한 용기는 생기지 않는군요. 통역에게 부탁해서 자격이 있는 주술사가 아닌 사람이 손을 대면 재앙을 가져온다는 식으로 말해주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쪽 눈을 가리고 액정 화면을보고 있네요. 새삼 인간만큼 호기심이 강한 동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카마쓰 선생은 카미나와 족이 애완동물로 기르는 오셀롯(Ocelot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산고양이의 일종입니다)을 보면서도 종종 겁먹은 표정을 짓더군요. 언젠가 그 일로 놀렸더니 불끈해서 반론을..

한밤의 도서관 2012.04.06

이별 후의 고요한 오후

올림픽을 ‘관람’한다는 건 매번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올림픽이 열렸던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 소란과 적막을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생활은 계속되는 것이다. - 삿포로의 빛 中 “만약, 만약 말이야, 우리 둘이 헤어지면 그 후엔 어떻게 지내게 될까?”...... “모르겠는데.” 나는 대답했다. “그냥, 굉장히 조용한 오후가 찾아올 것 같아.” “조용한 오후?” “그래. 바람도 물결도 없는, 완전히 평온한 우주 공간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시간.” 돌이킬 수 없는 나날을 그리워하고 필사적으로 끌어 모아도 결국은 공허한 적막만이 남을 뿐이다. 추억이란 아무리 열심히 짜 맞춘다고 해도 한 장의 퍼즐과는 비교할 수 없다. - 이별 후의 고요한 오후 中 달리 무엇을 하면 좋을지..

한밤의 도서관 2012.04.05

여형사 유키히라의 살인보고서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시한부 인생이 선고될 날을 상상해본다.화창하게 갠 날이라면, 오히려 서글플 것 같다. 비가 내린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다. 물론 날씨를 맘대로 선택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런 건 생각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바라건대, 그날은 가능한 한 먼 미래이기를. 기분 좋게 잠든다면, 밤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인간에게는, 밤은 끝없이 길 뿐이다. 자기가 죽은 다음 날의 신문을 남자는 상상했다. 한 줄도 안 실리겠지. 만일 실린다고 해도, 사진도 없이 깨알 같은 조잡한 기사로, 동업자라면 모르지만, 그 누구도 읽어주지 않겠지. 그리고 한 인간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모두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겠지. 그 정도의 목숨. 그 정도의 존재. 최..

한밤의 도서관 2012.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