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침저어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듯 형사의 감이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넌 갑옷을 두르고 남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지. 한 마리 외로운 늑대인 척 행동하지만 너 자신을 드러내는게 두려울 뿐이야.” 새삼 스스로에게 말해보았다. 역시 내 마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네 케이스케 작품이 2권이나 더 출간했다는 사실을 그동안 나는 왜 몰랐을까?? [코]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한번 더 읽어 볼까 하는 참에두 권 다 사버렸다. 다른 작품 먼저 보려고 했는데 [침저어]가 데뷔작이라고해 먼저 읽어 보았음. 스케일이 작은 사건인가 했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커짐. 한마디로 정리하면 재미있었다.ㅋ(끝이야?ㅋ)

한밤의 도서관 2014.03.20

그녀에 대하여

버티는 인생만 살다 보면 자신이 뭐가 하고 싶어 이곳에 있는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아무튼 살아 보자고,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때로 이렇게 사는 것은 느린 자살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앞이 없고 허전해서 선뜩한, 그런 때가 가장 즐겁다. 언제나 비행기든 차든 전철이든 타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떠다닌다는 것을 잊을 수 있다. 이동을 시작할 때만 좋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조금은 우울해진다. 또 지상으로 내려가 그 속의 시간에 발을들여놓아야 한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소용돌이치고 있고, 나는 그곳에 조금씩 포박되어 무언가를 받기도 하고 또 빼앗기기도 한다. 그런 것이야말로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이 싫다. “..

한밤의 도서관 2014.03.15

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

하지만 나는 요즘 들어 진실을 완전히 알아버렸다. 원자력은 미래의 에너지 따위가 아니다. 증기기관에 속한 낡은 기술이자 이미 끝장난 과학이다. 그 증거로 대학에 원자력 학과가 없어졌다. 학생이 없어진 것이다. 이 과학은 학문적으로도 더는 미래가 없다. 모든 것이 안개 밑으로 가라앉으면 좋겠다. 깊고 깊게 잠겨버렸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이 불결하고 고약하고 외설스럽고 피와 배설물의 악취로 가득한 어리석고 용렬한 세상.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나의 인생. 그것들이 무엇 하나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안개에 깊이 잠기면 좋겠다. 그리고 그대로 소멸해 사라져버리면 좋겠다. 흔적도 없이. 비명을 지른 건 덩어리 주위 돌 위로 비어져 나와, 퍼져가고 있는 검붉은 액체 때문이었다. 엄청난 ..

한밤의 도서관 2014.03.11

라이온하트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절망을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쾌활함을 상실하고 울적하고 나른한 표정이 된다. 한 걸음 밖으로 내딛는 순간, 후끈 하고 몸에 들러붙을 것 같은 고온다습한 공기에 압도당한다. 그것은 언제나 배부른 짐승이 얼굴에 대고 숨을 내뿜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지금은 배가 부르니까 살려주지만, 언젠가 배가 고프면 한입에 물고 날카로운 이빨로 찢어발겨 주겠다. 고 선고라도 받는 느낌이다. “그래요, 살아있는 인간처럼 무서운 것도 없지요, 사람을 잡아먹는 건 인간뿐이니까.” 같은 속도로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바늘이 하루의 8분의 5를 지나면 갑자기 하늘은 흐려지고, 창가의 화분에 물 줄 시간이나 된 듯 쏴아 하고 세면기를 뒤집은 것처럼 비가 쏟아진다...

한밤의 도서관 2014.03.08

질풍론도

사과하면서 이게 다 누구 탓이냐! 하고 따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애초에 구즈하라가 좋지 않은 일을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 내버려둔 것이 원인이지 않은가. 그런데 자기는 도쿄에서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 부하한테 전화로 질타만 하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한 번 더 구시렁거리면, 도고에 대한 악담이 봇물처럼 터질 것 같다. “알아. 있지, 네즈 씨, 이론은 전부 알아.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몸이 움직이지 않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아지경으로 탈 수가없게 돼 버렸어. 이런 나, 어쩌면 좋을까?” “어쩔 수 없는 경우란 게 있는 법이다.” “무엇을 위해? 세상을 위해? 국민을 위해? 아니잖아.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것뿐이잖아.”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 책은 거의 다 읽지만 읽히지 않는 건 과감하게 버..

한밤의 도서관 2014.03.04

숙명

유사쿠는 생각했다. 죽음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일까? 미사코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키히코를 잃는 것도, 그의 고통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키히코가 살인범으로 체포됐을 때 자신이 당하게 될 여러가지 피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아키히코가 체포되어 지금 생활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프다는 것이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것은 뒤숭숭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뭔가에 쫓기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는 쫓아오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잠에서 깨자 씁쓸한 뒷맛만 남았다. 무엇에 쫓기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그럴수록 괜히 불쾌감만 더해져 꿈에 대해서는 그만..

한밤의 도서관 2014.02.12

K·N의 비극

인간이라는 생물이 구제불능인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이소가이 자신도 포함해서 말이다. 돌계단을 오르기 전에 슈헤이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어둠에 삼켜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퇴로가 가로막힌 것만 같았다. 몸을 앞으로 되돌리고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마치 엄폐물이 없는 무방비한 공간에 내던져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괴가 있다면 아무런 걸림돌 없이 자신을 덮쳐 올 터였다. 등 뒤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슈헤이는 고개를 돌려 몇 번이고 돌아봤지만 그러고 있는 중에도 등 뒤는 항상 존재했다. 뒤를 보면 앞이, 앞을 보면 뒤가 요괴 소굴로 변해 슈헤이의 등 뒤로 달라붙었다. 지금 나쓰키 슈헤이는 아내를 향한 양가적인 감정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애정과 증오, 자비와 무지비의 틈바..

한밤의 도서관 2014.02.11

회귀천 정사

사람의 목숨이, 그 한 송이 꽃을 묻기 위한 의식이라면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뒷모습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스치는 것이라면, 대필가와 오누이가 말 없는 뒷모습으로 저승의 어둠 속으로 가져가려 했던 그 진상을 저 역시 뒷모습으로 배웅하고 싶습니다. - 등나무 향기 中 한번 말라 시들어버린 꽃은 그저 모든 것이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평소라면 다양한 색채의 화사한 네온사인들이 한데 얽혀 연기처럼 부옇게 일어나 밤거리를 비추었을 텐데 그날 밤은 어둠이 바닥을 핥고 있었다. 등불이 꺼지면 사라져버리는 거리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도라지 꽃 피는 집 中 형님은 짙은 어둠을 칠한 우산처럼 침묵을 활짝 펼치고 언제나 그 안에 쏘옥 들어가 자신의 진짜 얼굴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때..

한밤의 도서관 2014.02.10

당신 인생의 이야기

그리고 이렇게 느낄 때도 있었다. 천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게 솟아 있는 수직의 깎아지른 절벽이며, 배후에 있는 흐릿한 대지도 이와 똑같은 절벽이고, 탑은 이 두 절벽 사이로 팽팽하게 쳐진 밧줄이다. 아니, 가장 끔찍했던 것은 한순간 위아래의 구분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육체가 어느 쪽을 향해 끌리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던 순간이었다. 높은 곳에 대한 공포를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뒤숭숭한 잠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고, 자면서 벽돌 바닥을 움켜쥐려고 했던 탓에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는 광산의 갱도 안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두려움을 맛보았다. 천장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힐라룸은 물이 천장에 닿기 직전에 마지막 숨..

한밤의 도서관 2014.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