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3

침묵의 거리에서

죽은 소년에게서 아들로 걱정이 옮겨 갔다. 우리 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를.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들에게 피해가 갈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지. 아니면 아들이 뭔가 알고 있는게 아닐지……. 두려워서 그 뒷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게이코는 몸을 돌려 누우며 형언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웠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중학생은 잔인하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시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잔인함은 혼자 서는 과정에서 터지는 고름 같은 것이다. 다들 더는 어른들에게 울면서 매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들끼리 생존게임을 시작한다. 정말이지 남자란 권력에 약한 동물이다. 게이코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에게 실망..

한밤의 도서관 2014.08.09

시리얼리스트 연재물을 쓰는 작가

소설은 첫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 어쩌면 마지막 문장은 별개일 수도 있겠다. 복도를 걸을 때 등 뒤에서 닫히는 문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소설을 덮었을 때 독자의 마음에 여운을 남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소설을 다 읽었기 때문에 뭔가를 해보기에는 너무 늦은 셈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서점에서 새로운 책을 집어들 때마다 책장을 급히 넘겨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기 위해 안달하곤 했다.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만 했다. 선물 포장을 급히 벗기거나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손가락 틈으로 공포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 같은 어린애 같은 충동이었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지도 않고 보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사람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한밤의 도서관 2014.06.25

롱 굿바이

그는 흘낏 나를 보더니 다시 비에 젖은 차도로 시선을 돌렸다. 두 개의 와이퍼가 앞 유리를 조용한 소리를 내면서 닦고 있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미안해. 쓸데없는 말을 해서.” “돈은 얼마든지 있네. 누가 행복해지고 싶댔어?” 그의 말에 나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비웃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술에 취하고, 굶주리고,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도 긍지를 지니고 있는 그가 좋았다. 아니, 정말 그랬을까? 단지 우월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죽은 인간만큼 말썽을 피우지 않는 존재는 없다. 무슨 말을 들어도 항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웨이드 부인, 나의 의견 같은 것은 아무 뜻도 없습니다.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듯한 인간이, 도저히 믿을 수 ..

한밤의 도서관 2014.06.18

납치 당하고 싶은 여자

“역추적하려면 일정한 통화 시간이 필요합니다. 범인이 전화를 걸어오면 가능한 한 길게 얘기해주세요.”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틀에 박힌 듯한 대사를 한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이 대사가 진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역추적 같은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뭐라뭐라하며 질질 끌어도 상대해주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재빨리 끊으면 된다. 나는 망각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재수학원에서의 2년도, 회사의 도산도, 약혼자를 잃은 것도 모두 잊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기록으로 내 안에 남아 있을 뿐이다. 수험생이 ‘태평양전쟁’이라는 글자를 기호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의 수많은 불행을 한없이 질질 끌었다면 나는 정신병자로 지내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을 거다. 아침 풍경은 ..

한밤의 도서관 2014.06.10

달의 뒷면

그는 스무 해도 더 전에 아내를 여의었다. 고독이 오래 입은 재킷처럼 등에 익었다. 하기야 고독은 당사자가 자각해야 고독이지, 교이치로처럼 그것이 본래부터 거할 곳인 듯한 이에게는 그런 생각 자체가 공연한 간섭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배우자를 잃은 남자는 어째서 하나같이 등이 똑같을까. 다몬은 그런 기묘한 감개를 느꼈다. 그가 보기에 그런 남자는 등에 독특한 각도가 있다. 아주 약간 구부정하고 한 쪽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이유가 뭘까. 사막도 유전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탐나고, 경품에 당첨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싸구려 아이스크림도 매력적이다. 수수께끼가 있는 거리는 분명 기분 전환에 안성맞춤이리라.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과 ‘이미 나는 물러난 몸이니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

한밤의 도서관 2014.06.02

스노우맨

그의 경험상 가장 좋은 아이디어는 엉뚱하고 설익은 추측과 성급한 오판에서 나왔다. 요나스는 볼펜이 싫었다. 볼펜으로 그리면 지울 수가 없다.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 한 번 그린 그림이 영원히 남는다. “이제 뭘 하죠?” “찾아야지.” “뭘요?” “뭘 찾을지는 생각하지마.” “왜요?” “뭔가를 찾는다고 생각하면 다른 중요한 걸 놓치기 쉬우니까. 마음을 비워. 발견하고 나면, 자기가 뭘 찾고 있었는지 알게 될거야.” 타인들의 충동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왜 늘 저렇게 번들거리는 땀으로 한 곂 덮여 있는지 궁금했다. 마치 자신들의 파렴치함을 거짓으로 부끄러워하는 가식 같았다. “일종의 아프리오리 a priori 조사를 나온 거요?” 스퇴프가 가장 작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싱글 몰드 플라스틱으로 만든..

한밤의 도서관 2014.05.25

세번째 제물의 야회

절망이란 자신이 변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누군가 타인의 손에 생사여탈권이 쥐어진 채, 자신에게는 자기 자신도 환경도 바꿀 힘이 무엇 하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오늘과 같은 내일이 계속 온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것이다. 2월의 비에는 물독을 쏟아 붓는 것 같은 격심함은 없었지만, 유리가루처럼 차가운 작은 물방울들이 북풍에 밀려와 오코우치의 볼이나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난관 中 소중한 것은 지속되지 않아. 지속이란 오히려 무참한 것이지. 거기에 무엇 하나 깃들지 않는다. 지속되는 가운데 사람은 멸시당하고 평범함으로 떨어지지. 무리지어 모이고 분류되어 누군가와 같은 얼굴로 계속 살아가기를 강요받아. 너도 알겠지. 다만 지속될 뿐인 생은 기만에 가득차고 그것이 부정을 불러와 인간을 보신에 얽매이게 해...

한밤의 도서관 2014.05.12

가솔린 생활

“호소미 씨가 전에 교사들한테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인간에게는 다른 이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도움이 되고자 하는 욕구, 칭찬받고 싶어 하는 욕구, 이렇게 세 가지 욕구가 있대. 그러니 돈이 있으면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니야. 인간은 누구든 도움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아. 그리고 아무리 단순한 작업이라도 괜찮으니 할 일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발상도 사실이 아냐. 그것만으로 인간은 행복해지지 않으니까. 정신은 점점 메말라 갈 뿐이지”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고들 하는데……” 자파는 내 이야기를 들은 후, 흐흐 웃으며 말했다. “원래 인간이란 모름지기 그런 속성이 있잖아. ‘자기가 제일 중요하고’ ‘늘 자기 사정이..

한밤의 도서관 2014.04.24

어제의 세계

인구가 줄었다고 하는데, 전국 어딜 가도 교통량이 많은 것은 어째서일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차를 타고 어디로 가는 걸까? 한걸음만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고요하기 그지없는데, 국도에는 끊임없이 많은 차들이 달려간다. 당신은 가끔 저 차들은 그저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어디로도 돌아가지 않고, 실은 일 년 내내 전국 방방곡곡을 계속 달리기만 하는 차가 상당수 존재하는 게 아닐까? 모두 묵묵히 핸들을 잡고 오로지 달리기만 할 뿐, 일본의 모든 마을을 지나가기만 할 뿐으로 그저 도로를 달리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닐까? - 제1장 버려진 지도 사건 밤의 자동판매기, 그것도 호텔 안에 있는 자동판매기는 어째서 이렇게 무서운거지? 당신은 그런 생각을 ..

한밤의 도서관 2014.04.11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마지못해 일을 하면 시간이 좀처럼 가지 않으므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최고다. 그것이 오랜 시간의 단조로운 작업을 견딜 수 있는 비결임을 경험으로 배웠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샤워를 한 후 미나는 슈퍼드라이 맥주 캔을 땄다. 예전에 슈퍼의 제비뽑기에서 당첨된 5등 경품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마시려고 냉장고 구석에 보관해두었는데 두 달이나 꺼낼 일이 없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서러운 일도 많지만 만약 행복한 순서대로 사람을 줄 세우면 뜻밖에도 자신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자리에 서지 않을까.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물론 그렇기도 했지만 그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대답을 잡으려 했지만 마치 무의식이 거부하듯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갔다. “번거롭게 해..

한밤의 도서관 2014.03.27

침저어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듯 형사의 감이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넌 갑옷을 두르고 남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지. 한 마리 외로운 늑대인 척 행동하지만 너 자신을 드러내는게 두려울 뿐이야.” 새삼 스스로에게 말해보았다. 역시 내 마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네 케이스케 작품이 2권이나 더 출간했다는 사실을 그동안 나는 왜 몰랐을까?? [코]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한번 더 읽어 볼까 하는 참에두 권 다 사버렸다. 다른 작품 먼저 보려고 했는데 [침저어]가 데뷔작이라고해 먼저 읽어 보았음. 스케일이 작은 사건인가 했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커짐. 한마디로 정리하면 재미있었다.ㅋ(끝이야?ㅋ)

한밤의 도서관 2014.03.20

그녀에 대하여

버티는 인생만 살다 보면 자신이 뭐가 하고 싶어 이곳에 있는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아무튼 살아 보자고,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때로 이렇게 사는 것은 느린 자살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앞이 없고 허전해서 선뜩한, 그런 때가 가장 즐겁다. 언제나 비행기든 차든 전철이든 타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떠다닌다는 것을 잊을 수 있다. 이동을 시작할 때만 좋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조금은 우울해진다. 또 지상으로 내려가 그 속의 시간에 발을들여놓아야 한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소용돌이치고 있고, 나는 그곳에 조금씩 포박되어 무언가를 받기도 하고 또 빼앗기기도 한다. 그런 것이야말로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이 싫다. “..

한밤의 도서관 2014.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