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참 개떡 같죠?”회전문이 해리의 얼굴을, 코를 정통으로 때렸다. 눈물이 찔끔 났다. 삼류 코미디도 이보다 더 형편없지는 않을 것이다. 해리는 코를 문지르며 노르웨이어로 욕을 내뱉었다. 앤드류가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런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하나.
흠, 이 나라는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서 하나의 통합된 사회를 이룬다고 떠들어대지만, 그게 누구를 위한 통합일까요?
“남들 인생은 그렇겠지.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어. 지금 여기서. 사랑이 죽으면 나도 죽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그들은 패딩턴 옥스퍼드 가를 달리다 작은 공터 옆에 차를 세웠다. 간판에 ’그린파크’라고 적혀 있었지만, 잔디가 누렇게 시들었고 초록색이라는 공원 한가운데 서있는 가건물뿐이었다.
“노르웨이에서 오신 동료가 잉게르의 방에서 발견된 편지를 해석했다. 특이사항이 있으면 말해주시죠, 호올?”
“호올-레.”
“미안해요, 홀리.”
“지구 어디에서건 사람들은 비슷한 상상이나 환상을 공유하는 것 같네요. 하드드라이브에 각인된 인간의 본성이라고나 할까요. 서로의 차이가 아무리 커도 머지않아 같은 답을 찾아내죠.”
“살인 사건을 하나 해결할 때마다 조금씩 타격을 입어요. 불행히도 인간사에서는 애거사 크리스티를 읽으면서 상상하는 것보다 비참하거나 우울한 사연이 더 많고 특별한 동기도 없거든요. 처음에는 나도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때는 그냥 쓰레기 수거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인범들은 대부분 불쌍한 인간들이고 그들이 그 지경에 이른 이유를 열 가지 이상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거든요. 결국 모든건 좌절감으로 귀결돼요. 그들이 타인을 같이 끌어내리지 않고 자기를 파멸시켜도 어차피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절망감. 아직도 감상적인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
“그럼 당신은 남자한테 뭘 기대하죠?”
비르기타는 한 손에 턱을 괴고 허공을 응시하면서 질문을 곱씹었다. “모르겠어요. 남자한테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고, 뭐가 싫은지는 잘 알아요.”
“싫은 게 뭔데요? 뺀질거리는 답변 말고.”
“나를 뜯어보는 남자들.”
“연쇄살인범이라면 어느 정도 잡히고 싶은 욕구가 있지 않나요?” 레비가 질문을 던졌다.
왓킨스가 헛기침했다. 이쪽은 그의 전문 분야였다.
“그건 범죄소설에나 나오는 얘기라고.” 왓킨스가 말했다. “살인범의 행동은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행동이라는 둥, 남들이 살인을 막아주길 바라는 무의식적 욕구 때문에 자잘한 암호와 증거를 남긴다는 둥, 하는 얘기. 물론 그런 사례가 있기는 하지. 그런데 불행히도 연쇄살인범은 대부분 보통 사람하고 비슷해. 잡히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 그리고 이번 사건이 진짜 연쇄살인범의 소행이라고 해도 범인은 단서를 많이 남기지 않았어. 마음에 안 드는게 한두가지가 아니야…….”
“직감은 단지 경험의 총합이에요. 내 생각에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일, 우리가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고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어요. 우리는 대체로 잠든 무의식을 알아채지 못하고, 무의식은 그냥 거기 머물러 코를 골면서 새로운 정보를 빨아 들여요. 하지만 이따금 눈을 깜빡이고 기지개를 켜면서 말을 걸죠. 이봐, 전에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어, 하고. 그리고 그 그림에서 어느 부분이 관련되어 있는지 말해주죠.”
“농담이 아니에요, 해리.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자신감이 생겨요. 상자 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멍청하게 구는지 보고 있으면 내가 똑똑한 사람이라는 기분이 드니까. 그리고 과학연구에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이 자기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수행능력이 뛰어나다고 밝혀졌어요.”
해리는 어머니를 땅에 묻었을 때 닷새가 지나도록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했고 다만 어떤 감정이라도 느껴야 한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소파에 주저앉은 채 눈물이 차오르고 목이 메는 스스로에게 무척 놀랐다.
평생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는 건 아니다. 바르두포스 부대에서 내무반에 혼자 앉아 크리스틴에게 온 편지를 읽으며 목이 멘 적도 있다. 편지에는 ‘내가 평생 경험한 일 중에서 최고의 사건이야’라고 적혀 있었다. 문맥상 해리를 떠나서 최고라는 건지 영국인 음악가를 만나 같이 여행하기로 해서 최고라는 건지 명확하지 않았다. 해리의 삶에서 경험한 최악의 사건 중 하나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울음은 거기, 목구멍으로 올라오다 중간에 딱 막혔다.
진실은 바로 아무도 진실하게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고, 그래서 아무도 진실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사실이야. 우리가 만들어낸 진실은 누군가를 이롭게 하는 노력이 그들의 힘으로 상쇄되고 남은 것 뿐이야.
“공포를 떨치지 못하면?”
“완전히 떨쳐내라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으라는 겁니다. 공포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거든. 선명하게 귀에 거슬리는 음처럼, 살갗에 닿은 찬물처럼.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건 추락 자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공포거든.”
“지옥에서 온 바람이야.” 목사가 설교하는 동안 왓킨스가 툴툴댔다.
해리는 왓킨스가 선택한 어휘를 곱씹으면서 그가 틀렸기를 바랐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두르는 건 분명했다.
비르기타가 웃었다. “당신이 말할 때가 좋아, 해리.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눈이 빛나는 것 같아. 꼭 그곳으로 돌아간 것 같거든. 돌아가고 싶어?”
“크리스틴한테?” 해리가 물었다. “우리가 함께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 같기는 해. 그렇지만 크리스틴에게로? 사람은 변해.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 사람은 더는 존재하지 않아. 젠장, 다들 변하잖아. 어떤 일을 경험하고 나면 이미 늦어. 처음 그일을 겪은 그때의 감정을 되찾을 수는 없어. 슬프지만 현실이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