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빅슬립

uragawa 2016. 1. 19. 22:56

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도 무겁다.




하현달은 달무리를 드리운 채 래번 테라스의 유칼립투스나무의 높다란 가지 사이로 은은하게 비쳤다. 언덕 아래 낮은 곳에 있는 어떤 집에서 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요란했다. 젊은이는 가이거의 집 앞 상자 모양 울타리 너머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 뒤 자기 앞의 운전대에 두손을 올려놓은 채로 앞을 똑바로 보면서 앉아 있었다. 가이거의 울타리에서는 아무런 빛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나갈까 생각하다가 삶이 아주 지루하고 술을 한잔 하더라도 여전히 지루할 것이고 하루 중 어떤 때라도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은 어쨌거나 재미가 없겠거니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가벼운 발걸음, 여자의 발걸음이 보이지 않는 샛길을 따라왔고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앞으로 움직였는데 마치 안개 속에 기대로 있는 듯했다. 처음에는 여자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조금 후에는 희미하게 분간이 되었다. 머리를 거만하게 젖힌 모양이 낯익었다. 남자가 매우 민첩하게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의 모습이 안개 속에서 섞여 안개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잠깐 동안 죽음과 같은 고요가 흘렀다.




“그러니, 당신은 뼛속까지 살인가인 거예요, 모든 경찰들처럼.”

“바보 같은 소리.”

“푸줏간 주인이 고기를 도살하는 정도의 감정밖에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음험하고 무섭게 말이 없는 남자 중 하나. 난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알았어요.”




“너 실제로는 나한테 아무 관심 없잖아. 그냥 나한테 스스로가 얼마나 못된 아이인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지. 그렇지만 보여줄 필요도 없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는 네가 그러고 있을 때마다…….”




한 남자가 거기 있으면 그 사람의 존재를 알지만, 거기 없으면 특별히 거기에 생각이 미칠 때까지 그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것.




내 마음은 잘못된 기억의 파도를 떠돌았다. 그 기억에서 나는 몇 번이고 같을 일을 반복했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같은 장소에 가서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같을 말을 했으며, 그럴 떄마다 그 일이 실제로 처음에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실감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