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잔예

uragawa 2016. 1. 13. 23:30

‘허망’은 불교용어로 진실의 반대말이다. 진실과는 다른 것, 번뇌에서 생기는 현상을 뜻한다. ‘허망견’은 잘못하여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라고 믿는 것이고, ‘허망체상’은 번뇌와 선입관에 사로잡힌 눈으로 본디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믿어버리는 상태나 모습을 이른다.



유령도 저주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재수가 없다’는 말에는 마음이 흔들린다.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 않는 ‘무언가’가 현상과 현상을 잇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론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한테만 한정된 일은 아닌 듯하다. 내 주위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합리주의자가 많지만, 그래도 ‘운이 따른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 ‘인연이 있다’, ‘인연이 없었다’ 같은 말은 자주 듣는다. 남편은 나보다 더한 심령현상 완전 부정론자지만, 마작에 관해서 만은 ‘운’과 ‘흐름’이라는 비합리적인 말을 아주 진지하게 입에 담는다.  

-금세기 中



저주, 점 종류는 전혀 믿지 않고, 따라서 집을 짓는 데도 방위나 풍수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역시 지진제만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지난 세기 中



“요새 사람치고는 이르죠. 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쓰러웠어요. 몸도 편찮은데 무슨 생각을 하며 누워 있었을까 싶더라고요. 우리 마누라는 아직 건강하지만 언젠가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죽고 한쪽이 남겨질 거 아닙니까. 혼자 집에 남겨져 병들어 누운 채 죽어서 그대로 방치되다니. 상상하니 견딜 수 없었지만, 나한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과거의 살던 사람을 더듬어가다 
‘죽음’이라는 현상을 맞닥뜨리면,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서 죽음에 어떤 의미를 느끼고 만다. 하지만 보통 우리는 과거에 살던 사람을 거의 파악하지 못한다. 자신이 지금 사는 이 집에 예전에 어떤 인물이 살았고, 이사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일은 거의 없다.



언론에서 
‘동반자살’은 ‘살인 및 살인 미수사건’과 다른 현상인 모양이다. ‘동반자살’은 자살의 일종이지 살인의 일종이 아니고, 자살은 살인보다 뉴스가 되기 어렵다. 옛날부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일본에서는 가족에 의한 강제 동반자살을 가볍게 다루는 경항이 있다. 가족은 일심동체라고 간주하는지도 모른다. 가족을 죽이고 자신이 죽는 것을 자신의 몸을 손상하고 죽는 것과 같은 의미인 양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재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타인을 죽이고 자살미수에 그치든 가족을 길동무로 삼고 자살 미수에 그치든 죄상은 똑같이 살인이지만, 일반적으로 후자의 양형이 가볍다.

-고도성장기 中



일본에는 예로부터 
‘촉예觸穢’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더러움에 접촉하면 전염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더러움―케가레란 꺼릴 만한 대상을 뜻한다. ‘츠미케가레罪穢れ’라는 말에도 나타나듯이 더러움은 죄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일본에서는 죄란 제사로 제거해야 할 범죄와 재해의 총칭이다. 옛날에는 아마츠츠미와 쿠니츠츠미로 나누었는데, 전자는 공동체인 농경과 제사에 대한 범죄, 후자는 개인적인 범죄와 천재지변으로 분류한다.

-전쟁 후 Ⅱ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