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종이달

uragawa 2015. 12. 16. 22:33

닭날개살과 삼겹살, 돼지고기 다짐육이 든 팩 포장을 바구니에 넣은 뒤, 유코는 다른 진열대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는 붐볐다. 유코는 앞에 선 젊은 여자의 바구니를 무심코 들여다보았다. 스파게티, 야키소바, 인스턴트 파스타 소스가 두 종류, 건포도 빵, 팥빵, 푸딩, 양파, 카레 루, 비엔나소시지에 컵라면. 그야말로 딴 데 한눈팔다가 이렇게 됩니다, 하는 전형 같은 쇼핑 목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뭐든 장바구니에 넣는 데서 벗어난 해방감과 쾌감을 문득 떠올렸다.




마키코를 울린 이후, 가즈키는 마키코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로 했다. 마키코의 이야기에는 출구가 없고, 단순히 월급 면에서 다그치는 것 같아서 화가나고 주눅이 들었다.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과 식사하고, 사람과 웃는 것이 얼마 만인지, 방심하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추억 때문에 좀 전까지 단단하게 뚜껑을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물이 새듯 어느덧 리카의 마음속에 추억이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날마다 바쁘지만 충실하고, 자신의 재량으로 갖고 싶은 것을 살 수 있고, 이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고 있고, 전남편과 그 부모와 사는 외동딸과도 잘 지내고 있다. 지금 애인을 만들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다. 앞으로 몇 달 뒤에 마흔한 살이 되지만, 그 사실에 특별히 초조함도 없다.




“그런데 좋은 남편이네. 일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일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들은 외로워. 아내가 의지하지 않으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누가 먹여 살리는지 아느냐는 소릴 듣는 여자도 있다니까. 그런데 지금 리카 모습을 보니 아이는 아직 한참 멀었을 것 같네. 일하는 게 즐거워 보여.”




공기는 완전히 봄처럼 따듯하고 하늘에는 아직 석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리카는 머릿속으로 저녁에 요리할 메뉴를 짜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시간제 사원 일을 계속하다가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문득, 리카는 생각했다. 지금 이 생활을 앞으로 5년, 10년, 아니, 20년, 30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왁자지껄한 회식 속에서 문득 학생 시절을 떠올렸지만, 사실은 다르다. 나는 학생 시절에도 그런 식으로 떠들었던 기억이 없다. 기분 좋게 취해서 웃기만 했던 기억밖에 없다. 나는 학생 시절을 떠올린게 아니라, 학생 시절 상상했던 풍경을 떠올렸을 뿐이다.




역의 플랫폼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카는 긴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렸다. 파르스름한 하늘에 하얀 달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리카는 손가락 끝까지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萬能感에 가까웠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리카는 죄책감도 불안감도 전혀 느끼지 않고, 인적 없는 플랫폼에서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만능감의 쾌락의 잠겼다.




리카는 무수한 ‘만약’의 끝에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거야’라는 생각을 계속했지만, 그러나 그 몇 개의 ‘만약’을 선택했다고 해도 ‘이렇게’ 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망연해지다가 이어서 천천히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생각해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리카는 조그맣게 웃으며 “그걸로 됐어. 나 늘 생각하지만, 뭔가 하려면 철저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어. 잠깐 손을 댔다가 이내 빼버리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장 옳지 않다고 생각해”라고 했다.




리카는 그래서 출근을 위해 역에 갈 때나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붐비는 전철을 탈 때면, 주위에 자각 없이 뿌려진 채 방치된 악의에 새삼 놀랐다. 먼저 가기 위해 노인을 밀치고 가는 여자가 있고, 그 인간 뒈졌으면 좋겠어 하고 깔깔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금발의 여자아이들이 있고, 가방에 손을 찔러 넣고 정액권을 찾는 리카에게 혀를 차며 어깨를 부딪치고 가는 젊은 남자가 있고, 할머니를 밀어내고 빈자리에 앉는 중년 남자가 있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잔돈을 던지는 역내 매점의 판매원이 있었다. 전봇대 아래에 토사물이 펼쳐져 있고, 약국 계산대에는 긴 줄이 있고, 번화가 보도에는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꿈같아요.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맞은편에 앉은 고타가 말했다.

어째서 사람은 현실보다 좋은 것을 꿈이라고 단정 지을까. 어째서 이쪽이 현실이고, 내일 돌아갈 곳이 현실보다 비참한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까.




지진도 독가스도, 참을 수 없이 잔혹한 수많은 사건도, 소비세도 불경기도, 시간과 함께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선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게 당연해진다. 100만 엔이 있으면 그것은 1만 엔이 100장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의 안정을 지나치게 생각하느라, 현재는 돈에 휘둘려 사는 거 너무 한심하지 않아?”




역으로 이어지는 상점가가 나왔다. 오렌지빛 거리에 가게마다 켜놓은 백열등이 환했다. 생선가게와 채소가게가 호객행위를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가족 동반으로 나온 사람들이며 주부, 젊은이 무리가 저마다의 속도로 오가고 있다. 가즈키와 마키코는 건널목을 건너, 여전히 묵묵히 그 혼잡함 속을 걸었다. 가즈키는 이렇게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세상에 두 사람만 남겨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빛과 소음 속을 무엇 하나 보지 않고, 무엇 하나 동요하지 않고 걷고 있으면, 리카는 때때로 소리를 지르고 싶은 흥분을 느꼈다. 억눌러도 억눌러도, 그것은 모공에서 분출되는 땀처럼 끊임 없이 흘러 넘쳤다.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에 넣었다. 아니, 갖고 싶은 것은 이미 모두 이 손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