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순수의 영역

uragawa 2015. 2. 7. 00:24

레이코는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불만은 없다. 수입에 대해서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라는 아내의 말을 빌미로, 쌓이는 부채감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깊은 내면에는 고마움을 감싼 엷은 질투심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번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든 내면의 모래언덕이다.



갇힌 세계에서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나쁜 버릇이란 건 안다. 애써 얻어 소중히 품어온 것을 무작정 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대외적인 얼굴과 내면에 지닌 모습에 괴리감이 있는 남자였다. ‘괴리’라는 말을 레이코는 속으로 되뇌어본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느냐고 스스로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곁에 잠들어있는 남편을 생각한다. 




모든 일에 대해 내가 선택하고 책임도 지는 삶.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혼자라는 외로움조차 호사롭게 누릴 수 있는 삶. 혼자 시들어가는 삶. 혼자 잠들고 혼자 눈뜨는 삶. 내 내면에는 혼자이기를 원하는 본성이 잠들어 있다. 류세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껏 고독을 만끽하며 살았으리라.




문자로 주고받는 연락은 간편한 대신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전달되지 않는다. 일단 열기 직전의 긴장감이 거슬린다. 지극히 평범한 문장의 행간에서 에둘러 말한 의도나 심정을 알아내려는 한편 그런 건 없다고 딱 잘라 말할 떳떳함도 없다.




이제 와서 뻔뻔하긴 하다. 끝말잇기에도 규칙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조건을 달고 결혼해서 행복해질 사람이 있을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결말은 사실 아무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걸음을 내딛지 않고도 그냥 시간만 흘러갔으면 좋으련만.




깊은 감명을 받은 부분에 붙여둔 가느다란 접착식 메모가 태엽처럼 둘둘 말려 하드커버 위로 들쭉날쭉 나와 있다. 여러번 읽은 책이었다. 결코 읽기 편한 번역이 아닌데도 읽을 때마다 메모지가 늘어났다. 메모지에는 일일이 날짜를 적는 습관이 있다. 노부키는 제일 오래된 날짜의 페이지를 펼쳤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나른함과 후회 속에 침대로 파고든다.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없는 밤의 이곳저곳에서 잠기운을 끌어 모은다. 하나 둘 오늘의 기억을 지워나간다. 세 잔째로 마신 칵테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도 이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사라져버려라. 옆자리에 있던 베개에 손을 뻗자 레이코의 냄새가 났다.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성실함과 불성실함의 사이를 오가며 이도저도 아닌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다. 마치 쌓일지 녹을지를 땅에 닿기 전까지 고민하는 철 지난 눈이다. 결국 이런 애매모호함이 자아내는 속 편한 시간에 의지하고 있었다. 조금도 움직임이 없다. 여행자가 아니었다. 다시 돌아오는 관광객이다.




“나 이제야 깨달았어. 행복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 게으름뱅이야. 앞으론 아무도 안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지도 않을 테야. 내 방식대로 살겠어.”




언제부터 이렇게 밋밋한 감정으로 살아왔을까. 어쩌면 애초에 인간의 따스한 감정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질투란 멈출 듯 반복해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백 명이면 백 가지 형태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세기로, 혼자만의 시간을 괴롭힌다.’

책을 덮었다. 질투도 후회도 아닌 이 한 문장이 앞으로 노부키를 오랫동안 괴롭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