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녹스 머신

uragawa 2015. 3. 12. 22:28

5.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

정확한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인의 두뇌는 너무 많은 지식을 쌓은 반면 도덕은 전혀 익히지 않았다”라는 궤변에 가까운 오래된 서양 속담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책을 펼쳐 ‘친루의 찢어진 눈’ 식의기술이 보인다면 바로 책을 덮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 책은 졸작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런 관점에서 판단할 때 졸작이 아니었던 것은 해밀턴 경의 《멤와스의 4개의 비극》뿐이다.



“자네가 이 원고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건가?

“네. 어쩌면 사제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제님께서 기록하신 십계를 근거로 박사논물을 썼을 정도니까요. 1. 범인은 소설 앞부분에 반드시 등장할 것. 단, 독자가 간단히 짐작할 만한 인물이어서는 안된다. 2. 온갖 초자연적인 현상은 일절 배제해야 한다. 3. 비밀의 방이나 통로는 복수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4. 미발견된 독극물 또는 마지막 장에서 장황한 과학적 해설을 필요로 하는 장치나 설비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의 규칙입니다.

-녹스 머신 中



타운센드의 속이 빤히 보이는 언행에 나는 다시금 불쾌감을 느꼈다. 아니, 이것은 단순한 불쾌감이 아니다. 마치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어리석은 모습을 확대경을 통해 억지로 보고 있는 듯한 혐오스런 느낌이랄까.

-들러리 클럽의 음모 中



일본계 남미인의 피를 이어받은 할아버지는 일본어 문자와 음운이 가진 관능적인 매력에 사로잡혀 유네스코가 운영하는 ‘전멸 위기 언어 보존 도서관’의 사서로서 사라져가는 일본어의 최후를 지켜본 인물이다。할아버지가 지켜본 것은 일본어의 죽은만은 아니다
。종이에 문자를 인쇄한 책이라는 낡은 매체도 수명이 다하려 하던 시절이었다。전자책의 보급으로 종이책이 시장에서 쫓겨난 것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철든 무렵에는 박물관의 전시나 골동품 가게의 카탈로그에 실린 그림으로밖에 볼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

-바벨의 감옥 中



유안은 동양식 작별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어두운 심연을 향해 뛰어들었다. 순간 몸이 둥실 가벼워지고 위아래는 물론 전후좌우도 전혀 구별되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이 교체되고 거꾸로 이어 붙인 전 우주가 자신의 내부에서 비눗방을처럼 튀는 것을 느꼈다.

블랙홀을 역방향으로 통과할 때 유안의 물리적 실체에 발생한 현상은 No Chinaman 변환을 실시한 녹스장의 시뮬레이션 이었다. 가우스 평면에 흩뿌려진 유안의 의식은 다시 입체 투영된 리먼구의 무한원점으로 수렴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귀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프라티바가 서둘러 말했다.

“옛날 책을 손수 옮겨 적고 있는 것은 전자화된 텍스트와 ‘오토포에틱스’에 실망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알렉산드리아 사중주단’처럼 다시금 종이책 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해서 인가요?”



10년 전 유안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커 블랙홀의 특이점을 빠져나와 이론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양방향 시간여행에 성공했다. No Chinaman으로 세계의 갈라짐을 막고 이 세계에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육체, 즉 물리적 실존으로서의 몸이 블랙홀을 통과하면서 허수의 값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근 15년 동안 나는 내내 1929년의 옥스퍼드에서 로널드 녹스에게 받았던 축복의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왔어요. 그는 작별할 때 ‘당신 앞에 열린 길이 진실의 고향에 다다르기를’이라고 말했죠. 그러나 내게 진실의 고향이란 어디일까요? 로마 가톨릭의 신자가 되고 뉴 노시아의 수도원에서 체스터턴의 서적을 옮겨 적는 동안에도 늘 그 물음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죠.”

“140년 전에 쓰인 탐정소설의 세계가 당신의 진실의 고향이라는 건가요?”
“맞아요!”
유안은 미소지었다.



“일기예보를 들었는데, 내일도 날씨가 좋대요.”

“그렇다면 내가 기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겠군요.”

-논리 증발 녹스 머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