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호텔 로열

uragawa 2015. 3. 4. 22:50

좌절, 패배자. 희망, 꿈.

대화할 때마다 툭툭 튀어나오는 그런 단어들은 지금까지 미유키가 그려온 미래―그저 무난한 일생을 보낼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라는―의 가느다란 심지를 뒤흔들었다. 드라마틱한 한때를 가진 남자 곁에만 있어도 그녀 자신까지 그 드라마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았다.




다카시가 말하는 ‘꿈과 희망’은 폐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먼지를 꼭 닮은 것이었다. 잠시 피어올랐다가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앉는다. 여기에서 탈출하는 일도 없고, 닦아낼 만한 계기도 찾아오지 않는다.

-셔터 찬스 中




미키코의 마음속에 고여 있던 물이 그때까지 일정했던 수위를 잃고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사이교의 자비심 깊은 눈빛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좌우로 흔들리다가 한 바퀴 빙글 도는 눈. 미키코도 함께 빙글 돌았다.

-금일 개업 中




“미야카와 씨, 결혼했었구나. 부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고지식하기만 한 남자가 당황하는 모습이 책상위에 가짜 페니스보다 훨씬 더 우스웠다.

“어떤 사람이냐니, 그냥 보통 아줌마야.”

“난 보통이라는 게 뭔지 잘 몰라요. 한마디로 뭐든지 다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마사요는 그가 웃는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입 끝이 균등하게 올라가서 상상 이상으로 온화한 인상이었다. 웃는 얼굴에는 남자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어느 책에선가 본 적이 있다.

“내 휴대전화 통화 내역이며 문자도 훔쳐보고, 업무 내용을 의심하기도 하고, 이래저래 바쁜 보통 아줌마야.”





괜찮다. 떠날 수 있다. 후련하게 메말라버린 가슴 안쪽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살랑살랑 내일을 향해 부는 구월의 바람이다.

-쎅꾼 中




이십 년 전 옛날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되새기는 건 죽은 시어머니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거품 속에 몸을 묻고 있으려니 메구미는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는 착각이 가능했던 그 시절의 자신이 지독히 슬프게 느껴졌다.

-거품 목욕 中




이런 식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나로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이 변화하고 도태하고 도태당한다. 나쁜 사람을 만들어내 공격하고 증오하면 분명 마음도 가라앉겠지만, 그래봤자 뭐할 건가.




노지마는 술도 마시지 않고, 이렇다 할 취미도 없었다. 블로그를 하지도, 남의 블로그를 읽지도 않는다. 컴퓨터는 업무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소소한 저항으로 아내가 싫어하는 폭력물 소설을 읽고 있지만, 그것조차 그녀 앞에서는 펼치지 않는다. 이런 정도만 열거해도 스스로 충분히 따분한 남자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노지마의 발걸음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못 박힌 듯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개표구로 빨려 들어가고 다시 토해져 나왔다. 그 모습이 노지마에게는 연휴가 끝나면 아무일 없었다는 얼굴로 일상으로 돌아갈 자격을 가진 사람들로 보였다. 자신은 그 흐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점점 일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어지기 시작했다.

-쌤 中 




평생 고생이라는 말일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건 잘 알지만, 무엇이 고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묵묵히 일하는 것이 고생이었는지, 일하지 않는 남편이 있는 게 고생이었는지, 그것만은 늘 안개가 낀 듯 흐릿한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애초에 자신의 감정이라는 것이 미코에게는 신기한 연못 바닥 같은 것이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이를 유산했을 때도 울었던 기억이라는 게 없다. 눈물이 나건 웃음이 나건 내 몸 움직여 일해야 하는 하루하루는 이어졌다. 묵묵히 일할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다. 시간이 돈이 되고 그 돈으로 입에 아슬아슬 풀칠을 한다. ‘아슬아슬’이라는 말은 남에게서 배웠다. 우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없지만 미코의 삶이 너무도 가난하다는 것은 만난 이들 모두가 무심코 입에 올리곤 했다.

-별을 보고 있었어 中





진심으로 화가 나. 사업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참에 이혼 서류에도 찍어서 냉큼 제출하게. 행복하게 해주겠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웠나? 그런 말은 제대로 먹고살게 해준 다음에 해야지. 행복이란 과거형으로 말해야 빛이 나는 거 아닌가. 앞일은 섣불리 입밖에 내지 말고 묵묵히 행동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어. 자네를 보고 있으면 나는 항상 구역질이 나려고 해.

-선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