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살인자의 기억법

uragawa 2015. 3. 24. 20:53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사막이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습기라곤 없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어린 날도 있었다. 내겐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나는 늘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그들은 나를 소심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거울을 보며 표정을 연습했다. 슬픈 표정, 밝은 표정, 걱정하는 사람의 표정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다. 남이 찡그릴 때 찡그렸고, 남이 웃을 때 웃었다.

옛사람들은 거울 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지. 그들이 거울에서 보던 악마, 그게 나일 것이다.




여자들의 표정은 풀기 어려움 암화와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법석들은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울면 짜증이 났고 웃으면 화가 났다. 시시콜콜 얘기를 늘어놓을 때는 참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다.죽이고 싶을 때고 있었지만 꾹 참았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은 언제나 첫번째 용의자가 된다.




은희는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이 자기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한다. 네, 제가 거기에 있기는 하지요. 그리고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날마다 어던 일들이 일어나지요. 하지만 그것들은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고 저에게 별 영향을 주지 못해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살인자로 오래 살아서 나빴던 것 한 가지: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친구,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있는 건가?




나는 타인과 어울려 함께하는 일에서 기쁨을 얻어본 기억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갔고, 그 안에서 오래 지속되는 쾌락을 찾았다. 




나는 철학은 모른다. 내 안에는 짐승이 산다. 짐승에게는 윤리가 없다. 윤리가 없는데 왜 이런 감정을 느낄까. 늙어서일까. 내가 지금까지 붙잡히지 않은 것은 운이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 그것이 행복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날마다 살인을 생각하고 그것을 도모하던 때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바짝 조인 현처럼 팽팽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오직 현재만이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