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채텀 스쿨 어페어

uragawa 2015. 3. 30. 23:04

“새 환경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채닝 선생님. 하지만 여기서 금새 행복해질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얘기한 “행복”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따분한 일상과 제한된 활동 반경, 끈덕진 갈망을 조금도 채워줄 수 없는 쪼들리고 생기 없는 삶.



그들은 거창하게 로맨틱한 삶을 꿈꾸지 않았다. 특별히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없이 따분한 것들에 집착하고, 진정한 열정 한 번 불태워보지 못한 채 청춘을 허비했을 뿐이다. 채텀 스쿨을 졸업하면 그들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야 했다. 결혼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아이를 낳고. 내게 그것은 따분하고 활기 없는 삶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당연하고 바람직한 삶이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가 채텀 스쿨의 커다란 이중문을 벌컥 열고 확 트인 밖으로 나갔다. 학교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학교는 교도소가 아니었고, 아버지도 폭군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학교에 들어와 있으면 마치 족쇄를 차고 있는 듯한 답답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제약과 구속은 무시무시한 채찍처럼 나를 위협했고, 밤이면 내 인생이 하찮은 의무와 낡아빠진 규칙에 깔려 짓이겨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이가 들면 이런 느낌을 잊게 된다. 태어나 처음으로 어른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던 달콤하고 흥분된 순간. 그게 바로 내가 그 순간 느낀 것들이었다. 달콤함과 흥분. 유년 시절의 일부가 벗겨져나가고 안에 갇혀 있던 어른이 처음으로 불안한 숨을 내쉰것 같은 느낌.



“아버지는 자기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공부라고 하셨어.”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훗날 내가 선생님 아버지 책에서 본 문구를 덤덤히 읊어주었다. 
“예술가는 오직 자신의 열정만을 따라야 해. 그 밖의 모든 것은 목에 감긴 올가미일 뿐이야.”



그날 오후, 벼랑에서 나는 아버지의 인생관, 채텀과 채텀 스쿨의 통치적 분위기, 지금껏 세상을 봐온 내 방식과 너무나도 다른 그의 인생철학에 흠뻑 빠져들었다. 마치 새로운 은하계로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채닝 씨가 이야기한, 규칙에 제약받지 않는, 억제할 수 없는 열
정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삶 속으로.




모든 감정은 흔들렸다

자부심, 세상에는 굽히지 않지만

당신에게는 고개를 숙인다. 당신은 저버릴 뿐이고

이제 내 영혼조차도 나를 저버린다


하지만 이제 끝났다. 모든 말은 의미가 없다

내게서 흐르는 말은 더욱 그렇고

하지만 생각에는 굴레를 씌울 수 없다

의지 없이 밀고 나가기에




“인생은 한 번뿐이야, 헨리.” 창밖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시선은 만과 그 너머의 탁 트인 바다에 못 박혀 있었다. “딱 한 번. 다음 기회는 없어.”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한 가지 결심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아니?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결정은 없단다. 인생이나 진로에 대한 문제이니 대충 할 순 없잖아. 결혼도 마찬가지고.” 그러곤 갑자기 무척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너도 항상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해, 헨리.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아주 바침해져.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고.” 

지금껏 누구도 내 미래의 행복을 위해 그토록 진심 어린 충고를 해준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인생의 규칙만을 강조했을 뿐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곧고 고른 길을 걸었지만 리드 선생님은 구덩이와 덫이 득실거리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걷고 있었다. 내가 절대 들어서면 안 되는 길. 하지만 어느새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닌,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사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반농담으로 말했다. 
“내가 다시 돌아오거든 날 죽여줘.”

사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 얘기 하지 마, 헨리, 농담으로라도.” 그러곤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냥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세상을 살짝 스쳐 지나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덧붙였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옆을 살짝 지나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채.”



“왜 그렇게 우울한 거야, 헨리?”

나는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답을 내놓았다. “우리 중 누구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야, 사라.”

사라의 질문이 이어졌다. “우리가 자유로우면 어떻게 될 것 같니?”

내 대답은 방종한 시대의 여명기를 암시하고 있었다. “행복해지겠지.” 나는 씩씩대며 말했다. “우리에게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행복하지 않겠어?”



나는 목적지도 없이 절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상에서 도망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인간은 사고나 질병이나 보이지 않는 시간의 치명성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그저 희미한 빛줄기에 불과할 뿐이다. 의식의 연약한 기둥. 부서지기 쉽고, 짧으며, 지속 불가능한 삶. 아무리 위대한 인생이라도 아슬아슬 이어지는 호흡에 안쓰럽게 매달려 있기는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