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종이 여자

uragawa 2015. 1. 28. 22:49

나는 파도가 집어삼키기 직전, 잔양으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과 입맞춤을 하는 석양의 가두리를 눈을 뜰 수 없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토록 장엄하게 느껴졌던 광경인데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나는 비축해놓은 감정을 모두 소진해버린 사람처럼 무감각해졌다.




나는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는 도리어 차 안의 긴장감을 높였다.

They tried to make me go to Rehab

I said No, No, No




“제발 괴로움을 핑계 삼아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짓 좀 그만둘 수 없어요? 당신 스스로 무기력의 사슬을 끊지 못하면 패배의 구렁텅이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돼요. 하긴 새롭게 용기를 내는 것보다 서서히 자신을 파괴해가는 게 훨씬 쉬운 일이긴 하겠죠.”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리믹스의 리믹스, 형편없는 힙합, 어딘가 모르게 복제한 듯한 R&B 여가수들의 노래 따위는 대체 왜 듣는 거죠?”

“꼭 우리 아빠처럼 말씀하시네.”

“그리고 이 쓰레기들은 다 뭐예요?”

빌리가 어이없다는 듯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쓰레기라니? <블랙 아이드 피스The Black Eyed Peas>라는 그룹이죠.”




오로르와 내가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내게 사랑은 산소 같았다. 우리의 삶에 빛과 광채, 강렬한 에너지를 줄 수 있는게 사랑이라 믿었다. 하지만 오로르는 아무리 멋진 사랑이라도 결국 환상이며 위선이라 여겼다.

오로르가 눈을 허공으로 향한 채 자신의 생각을 보다 구체적으로 피력했다.

“인연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게 바로 우리 인생이야. 하루아침에 이별을 통보하고, 또 통보 받기도 하지. 우리는 간혹 헤어지는 이유도 모른 채 헤어지기도 해. 디모클레스의 칼이 언제 내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르는데 내 모든 걸 상대에게 걸 수는 없어. 나는 내 변화무쌍한 감정들을 믿고 내 인생을 설계하고 싶지 않아. 감정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볼확실한 것이니까. 당신음 감정이란 믿을만하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방금 옆을 지나치는 여자의 치맛자락에, 그녀의 매혹적인 미소 한 번에 당장 흔들릴 수 있는 게 바로 인간의 감정이야. 내가 음악을 하는 건 왠지 알아? 음악이 내 인생을 버리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야. 책도 영원히 그자리에 있으니까, 나는 책을 사랑하지. 평생 사랑하는 사람들, 난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고비를 넘겼다고 믿었는데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 틀렸어. 우리가 원하는 걸 얻는 것보다 얻은 걸 지키는 게 가장 힘들다는 걸 몰랐어.”




“근본적으로 책이란 게 뭘까? 종이 위에 일정한 순서에 따라 글자를 배열해 놓은 것에 불과해. 글을 쓰고 나서 마침표를 찍는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내 책상 서랍에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미완성 원고들이 몇 개나 들어 있어. 난 그 원고들이 살아 있는 거라 생각 안 해. 아직 아무도 읽은 사람이 없으니까. 책은 읽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 거야. 머릿속에 이미지들을 그리면서 주인공들이 살아갈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것, 그렇게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가 바로 독자들이야.”




향수, 에셀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단어였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살아야한다고 다짐했었다. 그녀는 다짐대로 항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 왔다. 추억이 될만한 물건들을 간직하려 애쓰지도, 기념일을 챙기지도 않았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직착하는 건 부질없다고 생각해 이삼 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했다. 




삶은 여러 번의 선택이 있는 비디오게임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 삶도 시간과 더불어 흘러갔다.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걸 하며 사는게 인생이었다. 행운은 양념처럼 살짝 곁들여질 뿐, 나머지는 모두 운명이 주관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었다.




창작의 영감은 어디서 얻으시죠?

독자들과 기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아주 고답적인 질문이다. 솔직히 나는 이 질문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었다. 글쓰기는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요구한다. 하루에 네 페이지씩 글을 쓰려면 나는 하루에 꼬박 열다섯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창작의 마술이나 나만의 비밀, 창작 비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도둑맞는 시간이다.

지하철 안이 세상에서 제일 큰 도서관인 것은 분명 그 때문이다.

-프랑수아즈 사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