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3

{북숍 스토리}

나는 제리의 말을 들으며 언젠가 결혼하게 되면 결혼식은 꼭 서점에서 올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전에는 왜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제리가 말했다. “사랑 이야기로 가득한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맞는 말이다. 영화는 나이 제한 때문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책은 뭐든 읽고 싶은 것을 읽을 수 있었어요. 흥미진진했죠. 어른들의 세상이 보여주지 않는 것들도 책에서는 볼 수 있었어요. 12세 때 크리스마스에는 받고 싶은 선물로 《대부》,《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있었어요. 영화는 나이 제한 때문에 볼 수 없으니 책으로라도 읽고 싶었기 때문이죠. 15세 이상이나 18세 이상 관람가인 영화는 책으로 구해서 읽으며 ‘아하! 이 부분 때문에 애들은 못 보게..

한밤의 도서관 2017.11.16

소멸세계

‘더럽혀진’ 나를 위로해주는 건 어릴 적부터 사랑해온 ‘저쪽세상’의 연인들뿐이었다. 그 연인들의 존재가 나를 정화해주었다. 속이 울렁거려서 앞으로 인간과의 연애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연인들과 무균실에서 살아가리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잿빛 거리는 비가 내리면 검게 물든다. 나는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길을 걸었다. 밤이라 물웅덩이가 먹물처럼 보였다. 가로등이 비친 곳만 뿌옇게 밝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마치 수묵화 속을 걷는 듯했다. “당신은 역시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이야. 봐, 당신과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잖아.” “부부니까 당연하지. 기다려봐, 금방 차 줄게.” 인간과의 연애는 자칫하면 금세 정형화되고 만다. 지금쯤 손을..

한밤의 도서관 2017.11.09

저체온증

왜 이런 집을 놔두고 죽었을까? 그는 궁금해졌다. 이곳에 의지하고 살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경험상 자살의 동기들은 예측 불가능하고 개인의 재정 상황과도 관련이 없었다. 대부분의 자살은 남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다.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청소년, 중년층과 노년층.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끝내기로 결심한 사람들. “알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노동자였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더 가난하게 살다 가셨지. 어머니 역시 매한가지였고, 우린 아무것도 가져본 적이 없었어. 쥐꼬리만한 것도. 난 다른 인생을 원했어. 가난에서 도망치고 싶었어. 좋은 집을 사고 싶었어.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었어. 당신이 그 남자라고 생각했어. ..

한밤의 도서관 2017.10.27

전진하는 날도 하지 않는 날도

나는 어릴 때부터 남에게 의지하거나 응석 부리는 것이 서툴러서 뭐든 스스로 짊어지려 하는 면이 있다. 도와주세요, 가르쳐주세요, 말하면 될 텐데, 어째선지 말하기가 어렵다. 귀찮은 일을 부탁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나중에 은혜 갚기를 강요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은혜를 입느니 차라리 혼자 하겠다는 마음. - 응석 부리기 中 글을 쓰는 것과 남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은 같은 주제라 해도 표현이 상당히 달라진다. 아무래도 글쪽이 찬찬히 시간 들여 사고할 수 있으니 내 생각에 훨씬 가깝다. -망상 中 이렇게 친한 친구들과 공연을 같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제각기 고민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공연을 보고, 돈가스를 먹고(그후 케이크도), 올해도 좋은 한 해..

한밤의 도서관 2017.10.23

서울 3년 이하 서점들을 인터뷰

생활비 정도 남는 데 만족하나? 연봉 1억 받는다고 쳐보자. 하루에 대충 30만원 버는 거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하루 30만원 보다 가치 있다고 본다. 얼마의 돈이면 내 하루를 바꿀까. 얼마면 만족할 만하겠나. 서점 오픈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딱히 답변할 필요를 못 느낀다. 하고 싶으면 그냥 하시라. 어차피 이거저거 따지는 사람 치고 서점 여는 경우가 드물다. 진짜 서점 여는 사람은 열고 나서 연락한다. 퇴사도 마찬가지다. 퇴사 고민한다고 연락하는 사람 치고 퇴사하는 사람 못 봤다. 진짜 퇴사하는 친구들은 실업 급여 끊겼다고 술 사 달라 연락 온다. 인터넷 서점과의 경쟁에 대한 부담은 없나? 퇴근길 책 한 잔 김종현 대표 주변에서 서점을 열겠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가? 읽는..

한밤의 도서관 2017.10.20

유령탑

나는 망연자실 혼자 남겨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투성이다. 의문은 수십 겹의 구름에 싸여 그 진상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아키코 씨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약한 여자의 몸으로 얼마나 큰 짐을 지고 있으려나. 유일한 자기편인 쿠로카와 씨조차 지금처럼 그녀의 무시무시한 적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아키코 씨는 정말 외톨이였다. 외톨이의 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난제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에도가와 란포의 국내 미공개 장편 소설이라니! 책 앞쪽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그림도 있다. 근데 일본 만화가 우리랑 반대편이지 않나, 책은 오른쪽으로 읽는 책인데 만화는 방향이 반대라 처음에 좀 헷갈림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올까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무섭다기 보다, 인간개조 기술..

한밤의 도서관 2017.10.19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만약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 자신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는 어떤 삶(만약 그런게 있다면), 어떤 세계, 어떤 자아가 남게 될 것인가? “그는 순간 속의 존재이다. 말하자면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과거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순간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각 ..

한밤의 도서관 2017.10.14

달빛 아래 가만히

그것뿐이다. 삶이 나와는 관계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태연히 견뎌야 한다. 혼자 밤을 걸으며, 결국 나는 하나의 생각에 도달한다. 속상하지만 하는 수 없다. ‘나 지금 뭐하고 있지..?’ 요즘은 맨날 그 생각이다. 친구들은 다 제자리 찾아가는데. 밤이다. 자려고 누웠는데 밀물처럼 걱정이 밀려온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밀려오는 걱정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예전엔 사랑에 빠져 있었는데 이제는 사랑이 빠져 있다. 행복에 집중하지 않으니 행복하다. 창문 틈에 부는 서늘한 바람에 잠이 깼지. 바람결에, 솨아아, 하고 나뭇잎들이 흔들리는데 잠결에 들으니까 꼭 파도 소리 같았어. 적요한 해변에 속상이듯 밀려오는 그런 파도. 벌써 가을이 온 걸까. 이런 밤 누군가 내 곁에 있다면 정말 좋을..

한밤의 도서관 2017.10.13

비하인드 도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끄는 동안 절망감에 휩싸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쓴다. 다 같이 웃고 농담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내 삶이 어쩌다가 여기 사람들 아무도 상상조차 못하는 생지옥이 되었는지 이해해보려 애를 쓴다. “아하, 선은 언제나 악을 이긴다고? 아니면 백마 탄 기사가 와서 너와 밀리를 운명으로부터 구해줄 거라고?” “그런거지.” 나는 약간 울먹였다. “하지만 그럴 리 없잖아? 밀리는 결국 우리랑 같이 살게 될 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 “매일매일 먹고 싶은 것도, 먹을 때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사는 게 어떤 건지 알기나 해? 그야말로 모든 것을 의존하고 살면서, 벌을 준다며, 아니면 귀찮다며 이삼 일씩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알아? ..

한밤의 도서관 2017.10.11

마지막 의식

토라는 거듭 고마움을 전하며 조만간 신세를 갚겠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서 ‘조만간’이란 해가 서쪽에서 뜰 때를 가리켰다. 부모의 사랑이 없는 어린시절보다 더 비참한 운명은 없으리라. 아이들은 애정 없이는 온전히 성장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때문에 아이들에게 애정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범죄나 다름 없다. [부스러기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바로 [마지막 의식] 읽음. 하이고 복수 한번 되게 힘들게 한다잉... 읽다 보면 결말이 보이는데, 아이슬란드 마녀사냥 공부하면서 ㅋㅋ 따라가게 됨. 아 등장인물 이름 되게 어려움. + 이게 토라 변호사 첫 번째 시리즈였음. 그래서 왜 벨라를 비서로 고용 했는지, 매튜랑 어떻게 만난건지, 길피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이야기 짜임새가 진짜 탄탄하다. 두 번째 시리즈도 읽어봐야지!

한밤의 도서관 2017.10.09

꿀벌과 천둥

‘연주할 수 있는’ 것과 ‘연주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너새니얼은 둘 사이에 깊은 골이 있다고 생각한다. 까다로운 것은 ‘연주할 수 있어서’ 연주하는 사람 중에도 ‘연주하는’ 재능이 숨어 있을 때가 있고, ‘연주하는’ 일에 열의를 불태우는 사람이라도 마음이 헛돌아 실속 없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둘 사이의 골은 깊지만 거기에 골이 있다는 것만 알면 우연한 계기를 통해 골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콩쿠르는 기묘한 행사지만 재미있다. 이렇게 많은 소리에 젖을 수 있다니 꿈만 같다. 소리에 젖는다, 소리가 몸속으로 퍼져나간다, 음악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몸속에 머금었다가 밀어낸다……. 그러다 보면 시간의 감각이 사라지고 마음은 언제나 어디론가 날아간다. 내 일에 그토록 행복을 느껴본 적이..

한밤의 도서관 2017.10.07

노르웨이의 숲

아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생각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나 소중해 보인 것들이, 그녀와 그때의 나,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래, 나는 지금 나오코의 얼굴조차 곧바로 떠올릴 수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도 없는 풍경뿐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며 문장을 쓰다 보면 때때로 격한 불안에 빠지고 만다. 불현듯, 혹시 내가 가장 중요한 기억의 한 부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몸속 어딘가에 기억의 변경이라 할 만한 어두운 장소가 있어 소중한 기억이 모두 거기에 쌓여 부드러운 진흙으로 바뀌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

한밤의 도서관 2017.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