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꿀벌과 천둥

‘연주할 수 있는’ 것과 ‘연주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너새니얼은 둘 사이에 깊은 골이 있다고 생각한다. 까다로운 것은 ‘연주할 수 있어서’ 연주하는 사람 중에도 ‘연주하는’ 재능이 숨어 있을 때가 있고, ‘연주하는’ 일에 열의를 불태우는 사람이라도 마음이 헛돌아 실속 없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둘 사이의 골은 깊지만 거기에 골이 있다는 것만 알면 우연한 계기를 통해 골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콩쿠르는 기묘한 행사지만 재미있다. 이렇게 많은 소리에 젖을 수 있다니 꿈만 같다. 소리에 젖는다, 소리가 몸속으로 퍼져나간다, 음악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몸속에 머금었다가 밀어낸다……. 그러다 보면 시간의 감각이 사라지고 마음은 언제나 어디론가 날아간다. 내 일에 그토록 행복을 느껴본 적이..

한밤의 도서관 2017.10.07

노르웨이의 숲

아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생각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나 소중해 보인 것들이, 그녀와 그때의 나,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래, 나는 지금 나오코의 얼굴조차 곧바로 떠올릴 수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도 없는 풍경뿐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며 문장을 쓰다 보면 때때로 격한 불안에 빠지고 만다. 불현듯, 혹시 내가 가장 중요한 기억의 한 부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몸속 어딘가에 기억의 변경이라 할 만한 어두운 장소가 있어 소중한 기억이 모두 거기에 쌓여 부드러운 진흙으로 바뀌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

한밤의 도서관 2017.10.04

부스러기들

토라가 요리보다 귀찮게 여기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주제에 있어서 그녀는 지난 몇 년 사이 부쩍 음식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대부분의 친구 부부들과 성향이 갈렸다. 심지어 한 친구는 토라와 토라의 남자친구 매튜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요리교실 수강증을 끊어주고는 본인의 결정에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토라와 매튜는 ‘중동의 마법’이라는 이름의 요리교실에 의무감으로 참석했지만, 강사는 두 사람에게 요리의 즐거움이라는 마법까지 전파해주지는 못했다. 토라는 어째서 지금까지 아름답고 젊은 여자와 돈 한 푼 없는 늙은 남자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지 신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토라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것에 끌리기 마련이고, 의도가 무..

한밤의 도서관 2017.10.02

지독한 하루

인턴은 숙련돼 있지 않아 살아 있는 사람의 살을 꿰맬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죽은 사람의 상처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불태워질 것이므로 어설픈 인턴이 맡는다. 나는 심상치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터무니없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원래 세상 일이란 인간들의 육신이 이토록 부서지고 시들어가는 과정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행의 변주를 의연하게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받아들이곤 했다. 그들이 그날 전 지구에서 가장 불행해지는 꼴을 보면서, 괜찮으냐는 말 따위를 건네야 했을까. 세상에는 자신의 말이 쓸모없음을 깨닫고도 꼭 그 말을 해야 하는 멍청이가 있다. 그것이 그날의 나였다. 외과 인턴의 업무 중에는 수술방에서 ..

한밤의 도서관 2017.09.09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선생님, 저도 남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 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모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착각한다.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中 그중에서 가장 자유를 잘 표현한 것이 플라톤의 동굴 비유가 아닌가 한다. 자기 발의 족쇄를 끊고 아무리 힘들어도 참으며 동굴의 가파른 벽을 기어올라 마침내 정의의 태양을 보겠다는 노력이 없다면 자유가 존재할까? 태양을 본 철학자가 동굴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본 것은 환영이라고, 진정한 자유는 진리의 인식에서..

한밤의 도서관 2017.09.07

검은 고양이

우리는 절벽의 끝에 서 있다. 거기서 절벽 아래의 심연을 바라본다. 어지럽고 메슥메슥 해진다. 우리가 느끼는 최초의 충동은 위험을 피해 뒤로 물러서는 것이지만, 또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그냥 거기 서 있고 만다. 우리의 구토증과 현기증과 공포는 서서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구름에 휩싸인다. - 변덕이라는 심술쟁이 中 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사악하거나 어리석은 행위를 저질러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법에 어긋나는 짓임을 알면서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최상의 판단력을 무시하고 그 법을 위반하려는 충동에 끊임 없이 사로 잡히는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던가? 이 도착적인 마음이 마침내 나를 결정적인 파멸로 몰고 간 것이다. 바로 이 갈망, 스스로의 본성을 거슬러 혼..

한밤의 도서관 2017.08.16

로재나

“사색에 빠지지마. 그러면 사기가 꺾여.” “사기가 꺽여?” “그래, 생각해 봐. 시간이 넘치는 사람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들을 잔뜩 몽상해내는지. 지나친 사색은 비능률의 어머니야.” 미스테리아 매거진에서 보고 체크해 두었던 책. 북유럽 소설은 이름이 너무 어려워 힘든데, 이 책은 이름이 하나도 안 헷갈림! (책이 얇아서 안 쉬고 읽어서 그런 것 같음. ㅋㅋㅋ) 최고였다 핸드폰 없는 옛날 배경인 거 빼고, 배를 타고 여행했던 사람이 죽어버린 거라,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범인 후보다. 라고 시작하는 것부터 지림. 게다가 국적도 여러 군데얔ㅋㅋㅋㅋ 국내 최초 출간이라서, 포장도 되어있고, 엽서랑 메모지도 줬다. 다른 시리즈도 기대된다.

한밤의 도서관 2017.08.01

과정의 발견

“무엇을 좋아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 이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꿈이 없다.” 당신의 이름을 브랜드라 생각하고 당신의 일을 프로젝트로 바꿔라. 일을 일로써 하지 말고 놀라운 프로젝트로 바꿔서 일하면 휴먼 브랜드가 된다. 일을 나를 나 되게 만드는 일종의 삶의 프로젝트로 바꾸라는 것이다.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답게 만드는 프로젝트로 일하라. - 톰 피터스 초연결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지식이 아니라 실전 경험이고,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뢰지수다. 이 사람이라면 최소하 ㄴ어떤 수준 이상으로일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 이 사람이라면 정해진 데드라인 안에 맡겨진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한밤의 도서관 2017.07.06

책들이 머무는 공간으로의 여행

독립출판물에 대하여- 독립출판물이란? ‘독립’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출판사나 편집자 등 누구의 도움이나 통제도 받지 않고 오로지 본인의 기획의도에 따라 글을 쓰고, 편집하고, 책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국립중앙도서관의 독립출판 특별전시회에서는 독립출판을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상업출판의 지배적인 책 형식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독립출판물의 스펙트럼은 일반(상업) 출판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다. 주제는 물론, 형식과 판형까지 제각각이다. 수요를 따져 발간 여부를 결정하는 상업출판과 달리 독립출판은 개인의 관심사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책이 출간되고 있다. 7,8년 전부터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해 현재 100여 개의 독립출판 전문 서점이..

한밤의 도서관 2017.06.22

사이드트랙

이따금 자신의 모습은 오목거울이면서 동시에 볼록거울이기도 한 어떤 거울에 비친 이미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다. 사람들은 표면에 비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유명 법관, 존경 받는 법무부 장관, 스코네의 해변을 거니는 다정한 은퇴자. 그 누구도 이면에 있는 그의 또 다른 모습은 짐작할 수 없다. “왜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뉘베리가 물었다. “죽어야 할 이유가 정말로 크면, 이렇게 자기에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주며 삶을 끝내버릴 수 있는 걸까요?” “나도 똑같은 질문을 해봤어.” 발란데르가 말했다. 뉘베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랬더니요?” 발란데르는 할 말이 없었다. 본노와 침묵은 같은 기질에서 나오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다. “왜 사람들은 전..

한밤의 도서관 2017.06.20

도서관람

마포평생학습관의 휴관일은 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과 공휴일이다. 2017년 의 첫번째 수요일이었던 1월 4일 오전 11시 경 홍대입구역에서 내렸다. 지도 앱은 홍대입구 역에서 도서관까지 걸어가는 길을 검색하면 9번 출구로 나가야 최단 거리라고 알려주는데, 이는 유동인구 수와 거리의 혼잡도를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네이버가 시키는 대로 나갔다간 사람을 피해 다니느라 1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를 수없이 반복하며 걸어야 한다. 사실 내가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글을 소설인데,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사실 내가 진짜로 쓰고 싶은 건 소설인데”라거나 “사실 제가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건 소설인데요”라는 식으로 이 문장의 도입부와 똑같은 말을 입 밖으로 내면서부터 그 말을 하는 행위만 습관적으로 되풀이 했다...

한밤의 도서관 2017.06.06

기사의 편지

8월의 어느 무더운 밤, 할아버지와 해변에서 야영을 할 때였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전쟁에 관해 가르치면서 꼭 알려 주고 싶은 게 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살고 있는 두 마리 늑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투쟁 말이다.” “두 마리 늑대요?” 나는 불 가까이 놓인 낡은 통나무에 걸터앉아 물었다. 밤공기 속에서 어지럽게 일렁이는 불꽃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마리는 악이다. 분노, 질투, 탐욕, 오만, 자기 연민, 죄의식, 원한, 열등감, 거짓, 그릇된 자존심이지.” 할아버지는 손수 깍아 만든 긴 막대기로 잉걸불을 쑤시느라 잠깐 말을 멈췄다. “다른 한 마리는 선이다. 기쁨, 사랑, 희망, 평온, 겸손, 자애, 용서, 공감, 관대함, 진실, 연민, 믿음이지.” 나는 잠깐 생각해 본뒤 머뭇거리며 물었다..

한밤의 도서관 2017.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