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소멸세계

uragawa 2017. 11. 9. 23:23

‘더럽혀진’ 나를 위로해주는 건 어릴 적부터 사랑해온 ‘저쪽세상’의 연인들뿐이었다. 그 연인들의 존재가 나를 정화해주었다. 속이 울렁거려서 앞으로 인간과의 연애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연인들과 무균실에서 살아가리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잿빛 거리는 비가 내리면 검게 물든다. 나는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길을 걸었다.
밤이라 물웅덩이가 먹물처럼 보였다. 가로등이 비친 곳만 뿌옇게 밝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마치 수묵화 속을 걷는 듯했다.



“당신은 역시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이야. 봐, 당신과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잖아.”
“부부니까 당연하지. 기다려봐, 금방 차 줄게.”



인간과의 연애는 자칫하면 금세 정형화되고 만다. 지금쯤 손을 잡아도 되겠다. 키스를 하면 다음에는 무얼 해야겠다, 서로의 육체가 정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박힌 매뉴얼을 따르게 된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사랑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노력이 필요하다.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지, 어떻게 키스할 수 있을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여 상대에게 접속하려 애쓴다.



“애가 어리면 정말 힘들지. 우리 회사는 육아휴직도 신청하기 어려운 분위기니까…….
“아침부터 조례 같은 거 하지 말고 사원 복지에나 힘쓰면 얼마나 좋아.



“그러니까 안전한 발정 같은 건 없다니까. 인간은 점점 진화를 거듭해서 영혼의 형태며 본능도 바뀌어가잖아. 완성된 동물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으니 완성된 본능도 존재하지 않지. 누구나 진화의 과정에 있는 동물일 뿐이야. 그러니까 세상의 상식과 부합하든 하지 않든 그건 우연에 불과하고, 다음 순간에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어지는 거지.”
“…….”
“우리는 진화의 순간을 살아가는 거야. 언제나 그 길을 가는 ‘도중’이라고.”



“그딴 게 잘 되겠어?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만 태어나는 세상이 잘 돌아가겠느냐고. 그리고 아이가 있든 없든, ‘나와 인생이 얽혀 있는 사람’이 인간에게는 필요해. 우리 몸과 마음은 그런 걸 필요로 하게끔 만들어져 있어. 그러니까 다들 그런 세상에선 도망쳐 나올 거야. 가족이 필요해,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 하면서.



나는 왜 ‘가족’을 원하게 된 걸까.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가장 큰 동기는 ‘고독’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모두가 홀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 감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다 틀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남편도, 이 세상을 너무 많이 먹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다.
정상이라는 것만큼 소름 끼치는 광기는 없다. 이미 미쳐있는데도 이렇게 올바르다니.



“엄마는 인간이 괴물 같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
“뭐?”
“인간뿐 아니라 이 세상의 존재하는 생명체는 모두 괴물일지도 몰라. 바다에서 살던 생물이 육지로 올라오거나, 하늘을 날거나, 꼬리가 날리거나. 그러다 이족보행을 하게 되었고, 동물적인 교미가 아니라 ‘과학적인 교미’로 번식하게 되었잖아. 모든 생명체는 괴물이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어. 그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