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3

내 영혼을 거두어주소서

“안녕, 우리 딸. 보고 싶어.” 토라는 인사한 뒤 전화를 끊었다. 토라는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생각했다. 결혼생활은 눈 깜빡할 새에 무너져 내렸고, 그녀 스스로 그 일을 천천히 되새겨볼 시간을 갖지 않았다. 전 남편과 함께한 첫 11년은 애정전선에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리고 1년 반 뒤 토라는 한스와 이혼했다. 전 남편과 자신의 집을 오가야 하는 아이들을 보며 양심의 가책이 들었지만 이제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설령 한스가 캐러밴 후진의 대가라고 해도 이제는 그를 받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토라는 길피의 방으로 전화를 걸어 로비에 있는 투숙갠 전용 컴퓨터에서 유기물의 뜻을 검색해달라고 부탁했다. “조금 있다가 찾아보겠대요...

한밤의 도서관 2018.03.01

미스테리아 16호

타살은 다른사람의 행위에 의한 죽음을 의미하며, 살인(murder)과 치사(manslaughter,예컨대 폭행 치사가 이에 포함된다. *히스테리성 성격 장애(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특징 ―극적인 감정표현, 타인의 관심을 끌려는 과도한 행동 양상 ―감정적 · 외향적 · 자기주장적 · 자기과시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하며 타인의 주의를 끌고자 외모에 신경씀 ―자기 외에 관심이 대상이 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시기와 질투, 강한 경쟁심을 느낌 ―자신을 과장하는 이면에는 의존적인 성격과 무능력감이 내재 ―관심과 애정, 보살핌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해나 자살로 타인을 위협 2017년에는 미스테리아에 나온 책 소개 보고기존보다 넓은 폭으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잡지이기에, 모든 컨텐츠를 ..

한밤의 도서관 2018.02.28

무한화서 2002-2015

언어 42 입말에 가깝게 쓰세요. 그래야 자연스럽고 리듬과 어조가 살아나요. 첫 구절만 봐도 머리로 썼는지, 입으로 썼는지 알 수 있어요. 입술로 중얼거리고 혀로 더듬거려보세요. 내용은 하나도 안 중요해요. 아니, 그렇게 해야 내용도 살아나게 돼요. 대상 111 내 얘기만 하려 하면 과장이 되고, 말에 힘이 붙지 않아요. 다른 사람 얘기를 잘하면 그 안에 내 얘기가 다 들어있어요. 시는 남 얘기를 통해 자기 얘기 하는 거예요. 126 특이한 것들은 내가 더 보탤 게 없어요. 항상 평범한 것들을 비범한 쪽으로 가져가세요. 누구나 평범하게 태어나고 죽어요. 그것 말고 특이한 게 뭐 있겠어요. 178 한달음에 쓰세요. 생각이 들어가면 시간과 장소가 흩어지고, 사건의 흐름이 깨져요. 생각은 평소에 하고, 글 쓸..

한밤의 도서관 2018.02.02

오늘의 인생

쇼핑센터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변기 뚜껑이 순서대로 올라가며 엄청난 환영. 재미있어서 제일 안쪽 칸막이까지 걸어갔습니다. 전철 안, 옆자리의 젊은 여성 2인조. 회사 연수였는지 정장 차림에 많은 짐.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잔뜩 벌고 싶어.“ 왠지, 내 마음이 크게 흔들렸고, 그리고 얼마 전에 읽은 오야마다 히로코의 소설 『구멍』 여주인공의 “이제 올해로 서른이잖아. 인생에서 한 번은 정직원이 되고 싶었어.“ 라는 대사가 문득 떠올라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습니다. 지지 말렴, 지지 말렴. 이렇게 응원하면서 전철에서 내린 오늘의 인생. 전철을 탔는데 옆에 선 여성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쩜, 첫 페이지 였습니다. ‘막 읽기 시작한 순간에 참여하다니 왠지 기쁘다.’ 제목은 보이지..

한밤의 도서관 2018.01.28

마인드헌터

행동은 인성의 반영이다. 살인범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또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 부하와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해당 살인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되풀이 했다. * 인적자원 스카우터를 헤드헌터라고 하듯 범죄자의 심리 상태를 이용, 검거를 지원하는 수사관을 마인트 헌터라 부름. 여러 해 뒤 우리는 범죄자의 인성을 좀 더 깊이 연구한 끝에 범죄자의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나기를 요구하는 사람은 분명 자신을 나쁜 길로 인도한 원흉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인물을 범인과 대질시키는 것은 또 다른 살인을 유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

한밤의 도서관 2018.01.07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썩어가는 거지. 개선될 여지가 없어. 쓰레기 같은 직업만 생겨나고 희망 따위는 죽 써먹을 것도 없지. 체질이 악화된 도시는 결국 개션책을 찾지. 이 도시가 담배 값이 가장 싼 건 알지? 등록금 지원도 많이 해주고. 하지만 길게 보면, 그것 모두 사람들을 압박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예전에 우리도 그랬잖아. 대학을 졸업하면 등록금 대출금을 갚기 위해 몇 년을 썩어야 해. 사회 초년생이 자기 개발을 위한 시간이나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리는 거지. 그리고 대출을 다 갚을 때쯤 또 일이 터져. 결혼도 그 일 중에 하나고. 다시 빚을 지게 되는 악순환이지. 요즘 사람들은 결혼 잘 안 하잖아. 그들이 생각하는 게 뭐겠어? 빨리 자립해서 여기를 뜨는 거라고. 이 빌어먹을 도시를 뜨는거.” - 천장제 ..

한밤의 도서관 2017.12.19

그대 눈동자에 건배

공장은 작년 가을부터 문을 닫은 상태였다. 공장을 돌려보려해도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직원들 월급은 몇 달 치나 밀렸다. 불어날 대로 불어난 빚을 갚을 전망 따위, 전혀 없었다. 회사는 이제 곧 도산할 터였다. 이 집도 저당이 잡혀 있다. 즉 거처할 곳도 없어지는 것이다. 성실하게 살아왔다. 오로지 성실하게 온 힘을 다해 산다고 살아왔다. 그래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깨달았다. -새해 첫날의 결심 中 “원래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실사영화를 많이 봤어. 근데 언제부턴가 실사를 보는 게 힘들어지더라고.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찾게 된 거야.” “어째서 힘들어졌는데?” “글쎼, 어째서일까. 아무튼 실제 인간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제 그만, 이라는 기분이 들어. 사람 얼굴은 현실 세..

한밤의 도서관 2017.12.15

섬에 있는 서점

긍정왕 어밀리아의 신념은 감수성과 관심사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살 바에야 혼자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그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는 일단 이것저것 해보겠다는 마음가진만 있으면 해결되기 마련이었다. 혼자살이의 고충은 자기가 싸지른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 혼자살이의 진정한 고충은 내가 속상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거다. 서른아홉 먹은 남자가 왜 어린애처럼 카레가 담긴 플라스틱 그릇을 벽에 내던졌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만약 제니가 책이라면, 방금 막 상자에서 꺼낸 페이퍼백이었다. 어디 한 군데 접어놓은 귀퉁이도 없고, 물에 젖은 적도 없고, 책등에 구김도 가지 않은 책. “때로는 적절한 시기가 되기 전까진 책이 우리를 찾아오지 ..

한밤의 도서관 2017.12.02

블랙머니

저녁의 정적이 수정처럼 흔들렸다. 높고 가늘게 떨리는 소리가 집 쪽에서 들려왔다. 공작새 울음일 수도, 여자의 비명일 수도 있었다. “내가 20년간 진료를 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실수가 된다 해도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둬야 한단 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깨우치게 되거든. 폐기종 환자면 담배를 끊고, 만성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끊고, 그리고 중증 낭만주의자 아가씨는 현실주의자로 변합디다. 여기 내 사랑하는 아내처럼” 나는 침대에 쓰러졌고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잤다. 해 뜨기 직전 바람이 잦아들었다. 조용함에 나는 뭐가 빠진 거지 하고 의아해하며 깨어났다. 회색빛에 창문이 뿌옜다. 시내 바닥을 돌아다니는 거지처럼 철퍽거리는 바다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알아요...

한밤의 도서관 2017.11.23

무인양품 보이지 않는 마케팅

무인양품의 방식은 혁신 그 자체다. 혁신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것들의 ‘새로운 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고객은 일반적으로 ‘(내가 찾던 제품이) 바로 이거야’를 지향한다. 자신의 취향에 딱 맞는 상품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상품을 개발하는 사람도 ‘바로 이거야’를 추구한다. 이것은 마케팅적 발상이다. 그러나 MUJI의 개발자는 다른 개발자와는 달리 ‘바로 이거야’가 아니라 ‘이거면 됐어’를 추구한다. 때문에 상품에서 마케팅 활동의 흔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마케팅’이야말고 가장 MUJI다운 특성이다. 흔히 부하에게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먼저 부각한 후에 인간적이 따뜻함을 드러내는 지도자 유형이 많은데, 사실은 따뜻함을 먼저 드러내야 부하에게..

한밤의 도서관 2017.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