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리쿠 30

엔드게임

그리운 학생 시절의 감각. 이런 시절도 있었다. 세계는 단순하고, 눈앞에는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자기는 젊고 총명하고 매력적이며, 그런 자기를 기다리는 것은 틀림없이 빛나는 미래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이 넘치고 있었다. 그리운 어리석음. 사랑스러운 어리석음. 실제 세계는 모순과 타협, 곤란과 좌절로 가득하건만. 기묘한 기분이었다. 초조감과 긴박감은 있는데, 왜 그런지 마음은 무척 차분했다. 이 세계는 어차피 이미 종반에 접어들었다. 나는 그것을 마지막까지 지켜보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언제부터 이런 얼굴을 하게 됐을까. 마치 죽은 사람 같은 눈이다. 유리 너머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어, 그쪽에 사는 에이코는 몹시 고통스러워 보인다. 이쪽에 있는 나는 이렇게 행복하고 만족하고 있는데. 드..

한밤의 도서관 2013.02.05

민들레 공책

자기가 행복했던 시기는 그 당시에는 모르는 법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처음으로 아아, 그때가 그랬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수많은 돌멩이를 주워 짊어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계절이 지나간 뒤에, 지친 손으로 바구니를 내려놓고 지금까지 주운 돌멩이를 살펴보면 그중에서 몇 개인가 작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그 몇 번의 계절. 그 저택에서 보낸 계절이 그 보석이었습니다. -창가의 기억 中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걱정하지 않는 법이야. 자기가 손에 넣었다가 잃을지도 모르는 것.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먼저 손에 넣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지금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명확하지 않나.” -빨간 연 中 저..

한밤의 도서관 2013.02.04

빛의 제국

복 받은 사람은 종종 오만하다. 복 받은 상태가 당연한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라도 빠졌을 때 맨 먼저 느끼는 감정은 노여움이다. 아이코가 집을 나갔을 때도 야스히코가 처음 느낀 것은 불편하게 됐군, 하는 불유쾌한 감정이었다. 시트를 세탁해 줄 여자를 찾아야겠어. 늘 결여된 인간, 늘 달리면서 무언가에 목말라하는 인간이고 싶다.-다루마 산으로 가는 길 中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를 하게 내버려 둔다. 부하직원들도 바보는 아니라 자신이 실패한 부분, 허술했던 부분을 교묘하게 에누리 하기도 하고 책임 전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빠짐없이 철처하게 보고를 시키면서 한두 곳 세세한 부분을 지적하면, 점점 실체가 들통 나면서 결국에는 처음과는 90도쯤 다른 보고가 된다. 머릿속에서 고무장갑을 낀 차가운 손이 슬슬 어..

한밤의 도서관 2013.02.01

네버랜드

어쩐지 짜증나는 녀석이라고 느꼈던 것은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일일이 자기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라고 깨달은 게 그때였다. “나 말이야, 이 열차에 타는 꿈을 자주 꾼다.” 느닷없이 미쓰히로가 입을 열었다. “이거?” 요시쿠니는 기분이 울적해지는 차창 밖 풍경을 보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잿빛 논밭. “응. 꿈속에서는 늘 다른 승객은 한 사람도 없고 나 혼자 타고 있어. 그럼 어느새 창밖이 바다가 되어 있는 거야. 아, 맞다, 여기 바다였지. 하고 생각해. 창밖 어디를 봐도 죄다 수평선이고, 쏴쏴 파도소리가 들려와.” “오오. 그러고?” “그걸로 끝.” “그게 다냐?” “그게 다야.” 이야기는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끝나고, 두 사람은 또다시 열차의 리듬 속에 몸을 잠갔다. 흔들리고 있..

한밤의 도서관 2013.01.26

도미노

는 젊은 관객층을 노린 B급 할리우드 영화다. 한창 잘나가는 신인 배우들이 고등학생들로 등장해 이상한 가면을 쓴 수수께끼의 살인귀와 싸운다는 내용으로, 관객 동원력이 괜찮은 장르 영화답게 연이어 속편이 만들어지고 있다. 1편은 고등학교 캠퍼스, 2편은 여름 캠프장, 3편은 눈 덮인 산장이 무대였다. 물론 매번 진범은 가까운 멤버들 가운데에 있었지만, 각본까지 맡고 있는 감독은 호러영화와 미스터리 마니아인듯, 언제나 극적인 반전을 선보이며 일본 미스터리 팬들에게도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번 4편에서는 새로 생긴 놀이공원이 무대인 모양이다. 여주인공은 당연히 글래머 미인이다. 1년에 한 번씩 벌써 세번이나 많은 친구들이 상해당했는데도 놀이공원에 가다니 참 회복이 빠른 여자다. “낯가리는 걸 고치기 위해서..

한밤의 도서관 2011.01.27

1001초 살인 사건

“황혼 녘에 한자를 붙이면 ‘誰そ彼’거든요. 그리고 어스름 녘은 ‘彼そ誰’래요. 저말이죠. 황혼 녘은 가까이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저기 가는 사람은 누구다’하고 알아볼 수 있는 때고, 어스름 녘은 똑같이 가까이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도 ‘저기 가는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황혼 녘보다 좀 더 늦은 시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흠흠, 그렇군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양쪽 다 지나가는 사람을 어렴풋하게만 알 수 있는 시간대를 가리키는 말이고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 뭐예요. 다만 예전에는 저녁에 어둑어둑할 때를 황혼 녘이라고 하고 새벽에 어둑어둑할 때를 어스름 녘이라고 했대요.” - 그대와 밤과 음악과 中 학창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이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멀다. 평소에는 잊고 ..

한밤의 도서관 2010.03.31

한낮의 달을 쫓다

이 순간부터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롭고 불확실한 존재가 된다.아마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인간에게 자유는 꽤 괴롭다. “좋아하게 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지만 헤어지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거든. 아니면 끝낼 수 없잖아.”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나도 지당한 의견이었다. - 때에 임하여 짓는 노래 中 나는 평소에 늘 그런 여자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자신이 여자라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는 여자. 회사 탈의실에서 돌려 보는 통신판매 카탈로그에서는 어김없이 세상 대다수 여자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고르고, 레슨 선생님에게 얼마를 드려야 할지 넌지시 의논할 수 있는, 느낌이 좋고 손톱 손질을 잘하는 여자들을. “지금은 점점 기..

한밤의 도서관 2009.12.31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

과학 기술의 진보 등은 속임수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대단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소비는 악덕이며, 문명이 소비를 조장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옛날처럼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불필요한 것을 생각하거나 현실에 있을 법하지도 않은 것을 공상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이며, 일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 역시도 악덕이다 더구나 서브컬처는 죄악이다 - 어두워질 때까지 中 우리는 어리석은 생물이다 하얀 화면과 상자 안에서 공허한 망상에 빠지고, 뇌만 비대해져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폐쇄된 공간에서 하찮은 것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손도 발도 내장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거세된 듯한, 유령 같은 인간이 세계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향락적으로 피부를 노출하고 춤추는 사람들. 죽 늘어선 하얀 화면을 홀..

한밤의 도서관 2009.11.06

나비 -생명의 퍼레이드

원래 남성이랑 진정한 굴욕을 모르는 생물이다. 진정으로 착한 사람이 아닌 인간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별 생각 없이 상투적인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어디선가 들었음 직한 대사로 얼렁뚱땅 넘기려 한다 그럴듯한 말, 잘 알려진 흔한 말, 빈껍데기 말. 착한사람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을 뿐인 그는 그 역할에 잘 어울리는 친숙한 말을 별 생각 없이 썼다 그러니까 자신의 말로 말하지는 않은 것이다.-스페인의 이끼 中 아무 존재도 아니고, 사용 목적조차 제대로 모르는 채, 대도시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되어 무기질로 이루어진 경치 속에 파묻혀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톱니바퀴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공포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평온한 날들을 보낼 수 있..

한밤의 도서관 2009.09.30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먹을거리란 이렇게 무거운 거로구나. 그걸 처음 깨달은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으로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였다. 돈도 없었기 때문에 식비를 줄이려고 되도록 밥은 해서 먹었다. 나는 우리 또래치고는 드물게 어려서부터 패스트 푸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감자와 양파, 양배추와 사과, 샐러드 오일과 참치통조림. 먹을거리는 살아 숨 쉰다. 살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무거운 것이다. 여자는 과거를 가차 없이 끊을 수 있는 생물이다. 남자가 역사소설에서 인생의 지혜를 얻으려고 하거나 과거의 여자들을 자신의 훈장처럼 떠벌리는 동안에도 여자는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한다. 물론 과거에 연연하는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도 그런 여자의 일면이 있을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의 경우, 평소에는 그런 여자를 ..

한밤의 도서관 2009.02.23

초콜릿 코스모스

전철안이나 군중 가운데서 그런 기이함을 느낄 때가 있다. 명백히 '위험한'사람, 주위와는 다른세계에 사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다. 이상하게도, 그냥 서있거나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인데 멀리서도 알아차리게 된다. 다들 멀찍이 떨어져 서고, '시선을 마주치면 안 된다'는 소리없는 공감이 주위를 휩싼다.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 중에도 재미있는 작품은 여러편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아스카의 인상에 남은 것은 그것이'가짜'라는 점이었다. 한 영화에서 권총을 맞고 죽어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도했던 사람이 다른 날 본 영화에서느 멀쩡하게 살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녀는 그 사실에 놀랐다. 그 고통스러운 표정, 닭똥 같은 눈물은 아무래도 '가짜'였던 듯 하다. 모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

한밤의 도서관 2008.10.29

황혼녘 백합의 뼈

어릴 때부터 선과 악이 싸우는 이야기를 몇 편이나 읽었다. 언제나 선과 악은 검은색과 하얀색처럼 왜 분명하게 구분되는지 의문이었고 왜 악은 계속 악인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렴풋이 안다. 악은 모든것의 근원이다. 선 따위, 어차피 악의 윗물 중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악을 돋보이게 하는, 말하자면 손수건 테두리의 자수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는 왜 늘 선이 그렇게 약하고 무르고 덧없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아 이여자, 사람 잡는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한번 읽으면 밤새서라도 끝까지 읽고싶게 만드는 능력. 탁월한 단어 선택 능력 원서로 꼭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주는 사람 - 2008년09월04일

한밤의 도서관 2008.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