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네버랜드

uragawa 2013. 1. 26. 13:53

어쩐지 짜증나는 녀석이라고 느꼈던 것은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일일이 자기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라고  깨달은 게 그때였다.

 

 

 

“나 말이야, 이 열차에 타는 꿈을 자주 꾼다.”
느닷없이 미쓰히로가 입을 열었다.
“이거?”
요시쿠니는 기분이 울적해지는 차창 밖 풍경을 보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잿빛 논밭.
“응. 꿈속에서는 늘 다른 승객은 한 사람도 없고 나 혼자 타고 있어. 그럼 어느새 창밖이 바다가 되어 있는 거야. 아, 맞다, 여기 바다였지. 하고 생각해. 창밖 어디를 봐도 죄다 수평선이고, 쏴쏴 파도소리가 들려와.”
“오오. 그러고?”
“그걸로 끝.”
“그게 다냐?”
“그게 다야.”
이야기는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끝나고, 두 사람은 또다시 열차의 리듬 속에 몸을 잠갔다.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고 있다.
잿빛 하늘에 나무들이 흔들리고 있다. 몇 겹으로 겹쳐진 나뭇가지가 몸을 비틀듯이 술렁술렁 흔들리고 있다.
쓸쓸한 곳이다. 쓸쓸하다.

 

 

 

관광지의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 벽에 가득 붙어 있는, 똑같은 공간의 사진. 모두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안내판이나 동상에 손을 얹고 사진을 찍는다. 모두들 똑같은 곳에 서있는데, 그들의 시간이 교차하는 일은 없다.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가끔씩 이상한 일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공유하는 시간이 우연히 일치했기 때문에 이곳에 있다. 이곳에서 우연히 간지와 미쓰히로의 시간이 자신의 시간과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기적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늦가을이었다. 공기는 차가웠다. 공원의 나무들은 이미 나뭇잎을 떨어뜨려, 벌거벗은 나뭇가지가 높은 곳에서 술렁술렁 흔들리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는데도 공원은 썰렁하고 인적이 없었다. 손질은 잘 되어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우울한 곳이었다.

 

 

 

눈은 부드럽게 계속 내리고 있다. 하루 종일 내렸다가 그쳤다가 한다는 것 같다.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먼 옛날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하얀 어둠 저편에 다른 시간이 흐르는 다른나라가 있는 것 같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처음에 '소록소록'이라고 표현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만큼 딱 맞는 묘사를 생각해낸 사람은 천재임에 틀림없다. 그말을 듣고 모두들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도 쓰이고 있는 것이다.

 

 

 

하얀 어둠이 암전되고, 자기혐오가 눈앞을 시커멓게 가로막는다.

 

 

 

“이렇게 하늘을 올라다보고 있으면 다리라든지, 등이라든지 점점 근질근질하지 않냐?”
“맞아.”
“뭐랄까, 파란 하늘에 녹아들어갈 것 같지.”
“그래그래, 그런 느낌.”

 

 

 

“가끔씩 열려 있는 문을 보면 오싹할 때가 있어. 미닫이문이면 그나마 또 나은데, 안팎으로 여는 문이면 못 견디겠어. 동아리방의 문이라든지. 교장실 문 같으면 더 싫고. 언제였더라, 복도 모퉁이를 돈 순간, 교장실 문이 열려 있는 게 갑자기 눈에 들어온 적이 있었거든. 그때는 심장이 쿵쿵 뛰고 식은땀이 나서 혼났다. 게다가 저녁이 다 됐을 때라 문안쪽이 컴컴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어. 난 무슨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발이 안 떨어져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 문 안쪽의 어둠을 보고 있었어.”

 

 

 

문 안쪽에, 요시쿠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문 안쪽의 어둠 속에 미쓰히로는 꼼짝 않고 누워 있는 것이다.
편안히 자기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런 꿈도 꾸지 말고 편안히 자기를.
한 걸음, 한걸음 힘주어 걸으면서 요시쿠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빌었다.

 

 

 

단거리 달리기의 풍경은 말하자면 저속 촬영이다. 최대한으로 부풀려진 어마어마한 긴장감이 총성과 함께 파열된 순간부터 1초, 1초가 영원처럼 잡아늘려진다. 겨우 십수 초 안에 극채색 시간과 만화경 같은 풍경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여자애들은 귀엽고 재미도 있지만 쓸데없는 게 이것저것 너무 많이 따라오거든. 편의점 영수증이라든지, 분홍 리본이라든지, 도넛 가게에서 받은 머그컵이라든지, 수첩에 붙이는 스티커라든지, 그런 자잘한 것들이 같이 붙어오는 점이 귀엽지만, 한편으로는 싫어.”

 

 


“늘 그래. 어른들은 다들 그래. 전부 끝난 다음에, 내가 모르는 곳에서 자기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나서 용서해달라고 그래.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 이해해달라고 그래. 늘 사라져버리고 나서 날 괴롭혀. 몇 년씩이나 나 몰래 쌓아놨다가 나중에 가서 한꺼번에 터뜨려. 내가 얼마나 상처를 입는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설명을 안 해줘.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려고 그래도, 늘 그때는 이미 아무도 없어. 다들 자기 생각밖에 안 해. 아무도 내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 하면서 나더러 자기를 이해해달라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