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76

언젠가는, 서점

저자본으로 창업 공간을 구하는 ‘시작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서 나는 권리금이라는 이상하고 나쁜 관행 때문에 세상의 많은 꿈과 가능성이 박탈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삶의 어느 순간보다 많이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꼈다.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사실상 나에게는 책방을 통해, 또 책을 판매하는 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저 책을 계속 만드는 일을, 책을 좋아하고 읽는 사람들 곁에서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책방이 지역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한다든지, 지역의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만드는 문화의 장이 된다든지 하는 거창한 목표는 전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야 지역 사회, 책방이 위치한 거리, 그리고 책방을 찾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필요..

한밤의 도서관 2020.08.28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

대수롭지 않은 글을 쓴다. 별 것 없는 그림을 그린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갈 것을 강요하는 이 사회에선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고, 결과물이다. 운이 좋아 먹고 살고는 있지만 위대한 것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 사라지는 건 물론, 당장에라도 대체할 사람은 많다. 나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다. 부모님은 인간성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하시지만, 그저 타인과 교류하고 싶은 욕구가 적을 뿐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 모임이나 행사에 참여하는 일도 거의 없다. 심술 맞은 고슴도치 같은 삶을 살았다. 당연히 친구도 매우 적다. 삼십대도 슬슬 끝나가는 즈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한둘밖에 되지 않는다. “푸딩을 한번 먹어봤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는 ‘푸우디잉?’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

한밤의 도서관 2020.08.24

나이 들수록 인생이 점점 재밌어지네요

우선은 정년 후의 생활을 상상하면서 ‘재미없어 보이는 일’을 적어보세요. 그런 다음 그 재미없어 보이는 일을 피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는 겁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게 싫다면 갈 곳을 만들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재미없어 보이는 일을 하나하나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바꾸어나가는 것이지요. 그 아이디어를 찾는 데에 필요한 것이 바로 호기심입니다. 정년 후에도 어떻게든 호기심만은 잃지 말아주세요. 호기심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본능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기나 어린아이가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지요. 하지만 사회인이 되고 주변 사람의 기대나 주어진 역할을 우선시하다 보니 호기심이 뚜껑을 아예 닫아버린 사람이 많지요. 우선..

한밤의 도서관 2020.08.21

이파브르의 탐구생활

귀농을 시작했을 때, 당연히 마당이 딸린 단층 시골집에 살 거라 상상했다. 시골에 빈집이 점점 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며 저 가운데 한 곳에 살 수 있겠지 기대했다. 하지만 서울이나 시골이나 집이 문제였다. 모든 물건은 쓰다 보면 세월의 흔적이 남는다. 구멍이 나거나 바래거나 닳거나 깨지거나 금이 간다. 그것들을 수리해서 이어 쓴다면, 새로이 만드는 기술을 어렵사리 익히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힘들지만, 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건 보다 가볍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요새는 ‘되살리는 기술’에 더 큰 관심이 생겼다. “잡곡이라고 하지 말고 밭곡이라고 해. 우리 어머니는 옛날부터 그렇게 불렀거든!” 수수, 조, 보리 등을 싸잡아 이르는 잡곡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때..

한밤의 도서관 2020.08.19

생애최초주택구입 표류기

한 가지 깨달은 점은 무엇이든 이사 전에 미리 사두면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이사를 할 때까지 시간이 많으면 그만큼 생각도 많아진다.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이 새 집의 구조와 맞지 않거나 필요 없어지는 일이 생긴다. 내게 있어 진정한 ‘내 집’이란 극단적으로 말해서 ‘고독사’가 가능한 집이다. 전기도 끊기고 수도가 끊기더라도 나만 아무렇지 않으면 살 수 있는 집. 그 공간에 웅크리고 살다가 누구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집. 누군가가 찾아와 관리비를 내라고 독촉하지도 않고, 반상회에 나오라고 안내문을 전하지도 않는 집. 길에는 수많은 전단지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것 중 하나가 ‘신축 빌라’ 분양을 알리는 전단지다. 그것들이 보여주는 빌라들은 하나같이 모두 놀랍다. 역세권에 위치해 있으며 ‘왕 테라스’..

한밤의 도서관 2020.08.18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결혼할 남자한테 아기 기저귀를 갈아줄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보라 이 말이죠. 뭐라고 대답하는지 들어보면, 그 사람이 당신을 동등하게 대할 사람인지 종 부리듯 부려먹을 사람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왜 저렇게 여왕벌을 만지는 거예요?” “저 벌들은 여왕벌에게 나는 특별한 향기를 모아서 다른 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거야.”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저렇게 하면서 어느 벌집이 자기 집인지 알게 되지. 여왕벌마다 자기만의 향기를 가지고 있거든. 여왕벌의 딸 벌들은 그 냄새를 절대 잊지 않는단다.” 엄마들에게 저마다 특유한 향기가 난다는 건 사실이다. 우리 엄마에게서는 교회 중고 옷 가게에서 산, 다른 사람들의 옷에 밴 희미한 머스크 향에 엄마의 찰리 향수와 밴티지Vantage 담배 냄새가 섞인 향이 났다. ..

한밤의 도서관 2020.08.06

나의 비거니즘 만화

채식주의자의 범주 비건 (동물착취로 얻은 가죽, 화장품등도 소비하지 않는다.) 락토 (채식을 하나 달걀을 제외한 유제품까지는 허용.) 락토 오보 (채식을 하나 달걀과 유제품까지는 허용.) 페스코 (채식을 하나 생선, 달걀, 유제품까지는 허용.) 폴로 (‘붉은’ 살코기를 먹지 않는다.) 플렉시테리언 (채식을 지향하나 때에 따라 육류와 생선을 먹는다.) 프루테리언 (식물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 열매, 잎, 곡식 등만 먹는다.) 채식주의의 실천 범주는 정리한 것보다 아~주 넓고 다양해요. 저는 자신을 ‘어떤 채식주의자’라고 정하고 단어 안에 갇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건, 페스코 등의 명칭은 그저 무엇무엇을 소비하지 않는다고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소통하기 편리한 단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채식을..

한밤의 도서관 2020.08.02

어서 와, 이런 정신과 의사는 처음이지?

2014년 6월 12일, 12시 15분. “하이, 하오 선생님. 이렇게 또 만나니 기쁘네요.” “얼마나 기쁩니까?” “만신창이가 될 만큼 기쁘달까요.” “단어 선택 좋네요.” “선생님, 제가 시를 한 편 썼는데 들려드릴까요?” “밥 먹으러 가는 길입니다.” “괜찮아요. 시가 마음의 양식 아니겠습니까, 이 간호사님도 제 시를 듣더니 배고픔이 싹 사라졌다고 하던데요.” “시가 밥이 됐다는 겁니까?” “아뇨, 토를 하시더라고요.” “그럼 전 이만.” 우울증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생태’가 아니라 병이다.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노르아드레날린)등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지면서 노의 화학 구조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에게 ‘좋게 생각하라’든가 ‘기분 풀어라’ 등의 말은 삼가야 한다...

한밤의 도서관 2020.07.28

도서관의 말들

마스다 미리 처럼 도서관에 가기 위해 여행지를 고른 적은 없지만 여행지에서 도서관을 만나면 일단 들어가고 본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방전된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충전할 수 있으며 화장실까지 해결된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마실 물이 있고 앉아서 쉴 만한 의자가 있다. 서가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살펴보는 건 맨 나중 일. 책을 둘러보기 시작하면 도서관에 발이 묶이기 십상이니 아쉬워도 간단하게 일별한다. 도서관에는 분명히 좋은 책이 많이 있다. 하지만 모든 좋은 책이 내게 영감을 주진 않는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 순식간에 내 경험이 될 수 없고, 아무리 훌륭한 작가의 인생 좌우명이라 해도 단숨에 본받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흠 없고 진실한 문장이어도 나와 그 문장 사..

한밤의 도서관 2020.07.04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여전히 독서 모임은 매번 정원을 채우기가 힘들다. 점점 나아지겠지 하며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지인들을 끌어들이는 다단계 판매 방식과 흡사하다. 책 또한 지인들이 얼마나 많이 사갔던가. 그래서 3개월 동안 월세 안 밀리고 출판사와 독립출판 제작자에게 정산을 다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남은 돈은 아이들에게 용돈을 쥐어줄 정도의 금액뿐이다. 다음 날 출근하면 책방은 텅 비어 보인다. 사방이 책이지만 책은 보이지 않고 빈 공간만 눈에 들어온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골목에는 점점 인적이 뜸해진다. 특히 요즘처럼 폭염이 이어지는 날은 더욱더 그렇다. 책방을 두드리면 텅텅 소리를 낼 것 같다. 책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읽어주는 이들이 있어야 비로소 책은 책으로서 빛난다. 모임으로 인한 피..

한밤의 도서관 2020.07.02

B급 며느리

나는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무책임해지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경제적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정을 꾸리는 것에는 한 치의 로망도, 관심도 없었다. 탕웨이와 결혼한 김태용 감독을 보며 ‘언젠가는 나도…’를 읊조린 적은 있다. 그냥 자유롭고 무책임한 그 상태가 좋았다. 여자들은 평생에 걸쳐서 자기 자신을 주변의 상황에 맞추는 것에 익숙해져요.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원하는 옷차림, 말투, 행동을 체화하고 그걸 통해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는 거죠. 결혼하면서도 마찬가지예요. 여자들은 결혼 전의 취미나 생활양식을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개성 없는 아줌마 파마예요. 남편에, 시댁에, 아이들에게 맞춰서 사는 거죠.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자신의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아요. 낚시나 야구 따..

한밤의 도서관 2020.06.25

결 : 거칢에 대하여

자유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기본적인 물적 토대를 필요로 하며, 이 기본적인 물적 토대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의 조건이기도 하다. 춥고 배고픔이라는 가난과 그런 결핍상태의 지속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릴 수 없게 한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 이 모순적 태도는 남에 비해 내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려는 인간의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속성은 필연적으로 나와 다른 남을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차별, 억압, 배제하는 데 동의하도록 작용한다. 우리는 경쟁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욕망을 넘어 탐욕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한밤의 도서관 2020.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