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76

빵 고르듯 살고 싶다

두 번째 회사는 가정집을 사무실로 써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점심밥을 직접 만들어 먹었다. 이것도 웃기지만 사실이다. 십여 명의 직원들이 돌아가며 두세 명씩 짝이 되어 점심시간 한 시간 전부터 장을 보고 밥을 짓고 상을 차렸다. 이 덕에 10인분이 넘는 밥과 국과 반찬을 만들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따금 대표라는 사람이 “오늘은 밥이 질다”라든지 “국이 아주 건강에 좋은 맛이네”라는 식으로 평가를 했는데 그게 맛있다는 말이라 해도 기쁘지 않았다. 점심을 차리는 일도 업무의 연장이라니, 당황스러웠다. 하얀색 컵에 유자청을 담고 펄펄 끓은 물을 부었더니 차가운 청과 뜨거운 물이 만나는 결이 보였다. 인간은 참 이상하구나. 과일을 썰어 설탕에 담아 맑아질 때까지 보관하고, 차게 만들어서 뜨..

한밤의 도서관 2018.10.20

아무래도 방구석이 제일 좋아

자고로 생물이라면 배가 고플 때는 뭔가를 먹으면 되고 컨디션이 나쁠 때는 얌전히 자면 된다. 하지만 기계는 상태가 나빠도 대체 뭘 해야 호전되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조용하게 그리고 갑작스레 상태가 나빠진다. 마치 기업의 전사로 일선에서 싸우다 과로로 쓰러지는 아버님들 처럼, 혼자 있을 때 술을 홀짝홀짝 마시다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어머님들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망가지는 것이다. - 백설공주의 독 사과 中 “그야 남성이라는 생물과 도무지 인연이 없는걸요. 가끔씩 생기는 만남도 살리지 못하고, 세상의 절반이 남성인데도.” “에이, 그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이에요.” 뭐, 그 말도 맞다. 남성과의 사랑에 인연이 없다고 해서 동성애자라는 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논법이리라. “미우라 씨는 여자..

한밤의 도서관 2018.07.05

지독한 하루

인턴은 숙련돼 있지 않아 살아 있는 사람의 살을 꿰맬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죽은 사람의 상처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불태워질 것이므로 어설픈 인턴이 맡는다. 나는 심상치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터무니없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원래 세상 일이란 인간들의 육신이 이토록 부서지고 시들어가는 과정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행의 변주를 의연하게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받아들이곤 했다. 그들이 그날 전 지구에서 가장 불행해지는 꼴을 보면서, 괜찮으냐는 말 따위를 건네야 했을까. 세상에는 자신의 말이 쓸모없음을 깨닫고도 꼭 그 말을 해야 하는 멍청이가 있다. 그것이 그날의 나였다. 외과 인턴의 업무 중에는 수술방에서 ..

한밤의 도서관 2017.09.09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

페이스북은 100퍼센트 자기 자랑입니다. 자신이 만든 요리, 놀러 갔던 곳, 화목한 가족 모습 등을 올리면서 기대하는 것은 “와아, 멋지네요.” “수고했어요” 같은 칭찬입니다. 가끔은 자학적인 에피소드도 올리지만 그것도 ‘이런 것까지 올릴 수 있는 여유있는 나’에 대한 자랑입니다. 아이에 대한 얘기는 뭐를 올려도 성공합니다. “귀여워!” “많이 컸네.” “정말 고생 많았어.” 같은 칭찬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이래서 아이 애기는 빼놓기 어렵죠. 그런데 항상 SNS를 접해야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큰일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잘 아는 후배가 갓난아이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미혼인 후배 친구 A씨가 “축하해”라는 댓글을 다니까 이 후배가 “너도 다른사람만 축하하지 말고 어서 네 아이 낳아야지. 정말 귀여..

한밤의 도서관 2017.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