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76

언제나 여행 중

개성을 만드는 요소란 자란 환경이나 경험이나 유전뿐 아니라 그 시대, 그 장소의 공기이기도 하다. 국경을 지나기 전의 하늘은 분명 핀란드 직원의 미소 띤 얼굴을 닮은 흐린 하늘이었는데, 국경을 지난 뒤의 하늘은 여지없이 러시아 직원처럼 거만하게 흐린 하늘이었다. - 아무래도 모르겠는, 그런 도시___러시아 나고 자란 나라에서 변화를 느끼기는 정말 어렵다. 물론 컴퓨터 보급이나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소통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 등은 체감할 수 있지만, 그건 변화가 아니라 단지 신제품이 등장한 것뿐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어떤 세계관 같은 것이 크게 변하는, 온몸이 뒤흔들리는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히 여행하다가 반해버린 곳에서 생생한 변화를 목격하는 건 정말 행복..

한밤의 도서관 2019.10.29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

엽산 저장량이 부족한 정자도 선천성 기형을 일으킬 위험이 높다. 엽산은 수용성비타민의 일종으로 DNA 합성과 세포분열 등에 관여하는데, 가임기 여성이 엽산을 먹지 않으면 태아 척추 이분증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임기 남성이 엽산을 먹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한다.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엽산을 먹지 않은 수컷의 2세가 엽산을 많이 먹은 수컷의 2세에 비해 선천성 결손 발생 비율이 30%가량 높게 나타났다. 또 다른 연구에서 엽산을 많이 먹은 남성들(섭취량 상위 25%)은 정자 염색체 수가 비정상일 위험이 대조군보다 20~30% 낮았다. 이론적으로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임신 0주차 0일로 본다. 흔히 열 달간 아이를 품는다고들 하지만, 인간의 임신 기간은 열 달이 채 안되는 40주(..

한밤의 도서관 2019.10.13

책갈피의 기분

언어의 기본 역할은 뜻을 통하게 하는 것이 첫째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도 일상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대충 말하고 쓴다. 편집자가 대순가, 바빠 죽겠는데. 실장님ㅁ~ 종이 들어갓나여? ㅃㅏ릴빠ㄹ리빨리빨리 대펴님 이거 빨리 확인해주샤야 마감햅니다 편집자가 되어서 저따위로 언어를 파괴한다고 비낸해도 진짜 어쩔 수 없다. 생존형 언어니까.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들 하던데, 그 말에 정말 200퍼센트 공감한다. 책이 좋아서 책 사이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그 책 사이에 끼어 납작한 책갈피의 기분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일을 하면서 가장 날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띄어쓰기’다. 미친 듯이 어려운 건 사실 아닌데 진짜 너무 헷갈리고 애매하다. 이미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는 문제를 넘어서 ‘찾아보..

한밤의 도서관 2019.09.16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여자 인생 마흔부터잖아? 늦지 않았다고! “경력이 너무 많네요.” 그사이 내 나이 앞자리는 3에서 4로 바뀌어 있었다. 연차도 연봉도 부담스러운 위치가 돼버린 것이다. 아무리 일 잘하고 커리어가 좋아도 팀장 자리를 누구의 라인도 아닌 나 같은 여자에게 내어줄 곳은 없었다. 조직 내에서 열심히 일하던 여성도 40대가 되면 밀려나는 것이 남성중심적 기업구조다. 조직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는 프리랜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일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적 발언권을 얻었다. 일은 경제적 자립을 넘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해주었다. 그런 일이 사라진다는 건 내가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야망을 갖고 위로 올라가려는 것은 여성스럽지 않은 것. 그런 여자는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여자. ..

한밤의 도서관 2019.09.11

좋은 사람이길 포기하면 편안해지지

사실 인간은 누구나 오십보백보지만, 자기 안에 있는 추한 열정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주면 마음놓고 그 사람을 경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들은 매우 기뻐한다. 인간은 좋은 일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오히려 적당히 그때그때 얼버무리며 넘어갈 때가 더 많다.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이 정당한 일, 훌륭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타인도 자신처럼 행동하기를, 또 타인이 자신에게 반드시 감사와 칭찬을 해주기를 마음속으로 요구한다. 우리들은 최대한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맑은 물에만 몸을 두지 말고 탁류에도 부대낄 일이며, 내 손은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언제나 진흙투성이라고 생각할 일이다. 언제나 나는 강하다고 자신하지 말고 나의 나약함을 확인할 수 있는..

한밤의 도서관 2019.08.23

모든 것은 그 자리에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박물관을 좋아했다. 박물관들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세상의 질서를 (생생하고 구체적이지만 정돈된 형태의) 축소판으로 보여주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내가 식물원과 동물원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다. 식물원과 동물원은 자연을 보여주되, 일목요연하게 분류된 자연, 즉 생명의 분류체계taxonomy를 보여준다. 책에는 아쉽게도 실물은 없고 단어만 존재하지만, 박물관은 실물을 조목조목 배열함으로써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이라는 경이로운 메타포를 구현한다. 우리 모두에게도 라부아지에와 같은 인물―평생 동안 함께할 자아이상ego ideal◆◆이 필요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나와 대화하는 젊은 과학자 친구들 중에는 데이비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심..

한밤의 도서관 2019.08.22

깃털도둑

“수집가들 덕분에 동물학이 발전했다는 자네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어. 그들은 박물관을 채웠다고 자랑스러워하겠지만, 사실은 자연을 비운 것이지……. 매우 부적절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네.” 전 세계 곳곳에 기업형 농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왜가리 같은 새는 새장에서 기르기 힘든 종이기에 가느다란 면실로 위아래 눈꺼풀을 꿰매어 앞을 보지 못하게 하고 길들이기도 했다. 새들은 이렇게 무를 창출하는 수단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아갔다. 1912년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배에서 가장 값 나가고 보험료가 높았던 물건도 바로 깃털 상자 40개였다. 친애하는 여성 동지들이여, 신은 우리에게 머리를 주었습니다. …… 우리에게 평생의 과업은 남자든 혹은 누구라도 다른 사람을 유혹하거나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

한밤의 도서관 2019.08.15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책을 통해서라면 누구도 자신의 시야에 갇히지 않고 현재와 과거의 모든 사건, 전 인류의 사상과 감정에 모두 관여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 정신세계의 모든 혹은 거의 모든 지성적 활동은 책에 기초하고 있으며, 물질의 상부에 있는 문화라고 불리는 그 무엇은 책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에서 영혼을 확장하고 세계를 건설하는 이러한 책의 힘에 대해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며, 매우 드문 순간에만 자각할 뿐이다. 새롭고 놀라운 것의 존재에 매번 감사함을 느끼는 것과 다르게 책은 이미 우리 일상에서 당연한 것이 된 까닭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에 동승하고 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책을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의 눈만이 아니라 셀 수 없..

한밤의 도서관 2019.08.13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임신 중 복통은 월경통과는 다른 고통을 준다. 내 몸도 부스러질 거같이 너무 아픈데 아기에 대한 걱정도 함께 들어 정신적으로 버텨내기가 힘들다. 아픔의 원인을 찾으려고 수만 가지 생각을 하다가도 결국엔 진료비 걱정에 병원 가기를 주저한다. -10주차 中 결국 보스가 우리 부서의 전 직원을 불러 모았다. 급격히 많아진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결국 임신한 여성 직원들에 대해 말을 꺼낸다. 임신 당사자도 같은 공간에 불러놓고 “임산부가 많지만 업무에 빈틈 생기지 않도록 긴장하라”는 말을 하려면, 업무 중 임산부에 대한 배려도 같이 언급해야 온당하지 않나 싶지만 역시 그런 건 없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저 임신해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 동료들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육아휴직자의 대체근..

한밤의 도서관 2019.08.01

아무튼, 술

나에게는 어떤 대상을 말도 안 되게 좋아하면 그 마음이 감당이 잘 안 돼서 살짝 딴청을 피우는, 그리 좋다고는 하지 못할 습관이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다 보면 지나치게 진지해지고 끈적해지는 마음이 겸연쩍어 애써 별것 아닌 척한다. 술꾼들끼리의 밥 먹자는 약속은 결국 술 먹자는 약속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술은 원래 밥과 곁들여 먹는 기본 반찬이니까. 술이란 건 참 시도 때도 없이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마시고 싶다는 점에서나, 마시기 전부터 이미 마시고 난 이후의 미래가 빤히 보인다는 점에서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앞일 뒷일 따위 생각 안 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헵타포드어 같지 않은가. 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리디셀렉트..

한밤의 도서관 2019.07.31

하면 좋습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모든 여자에게는 '자기만의 방'과 '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에게도 만약 젊은 여성들이 조언을 딱 하나 해달라고 한다면 1초도 지체없이 "돈 열심히 벌고 열심히 모으세요"라고 할 것이다.(돈의 중요함은 비혼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문제는 아무리 개인이 열심히 벌고 모아봤자 경제적으로 독립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가장 크게 들어가는 돈이 주거비용인데 1인 가구를 위한 주거공간은 턱없이 부족하거나 비싸다. 내 집 마련 좀 해보자고 주택청약을 들어도 1순위는 신혼부부 즉 '정상 가족'의 몫 '혼자 사는 여자'랑 '불안'은 한 몸이야, 한몸. 자웅동체!가깝게는 CCTV 하나 없는 빌라에 매일 혼자라는 불안....출입할 때 사주경계는 기본이고 밤늦게 문 ..

한밤의 도서관 2019.07.18

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

손님 『윌리를 찾아라!』를 반품하고 싶어요 꼭이요. 점원 왜요? 손님 윌리를 찾아서요. ¶ 손님 죽은 동물을 다시 살리는 주문이 들어간 책을 추천해주시겠어요? 직원 ….손님 사람은 아니고 동물만요. 이해하시죠? 남편이 살아 돌아오길 원하진 않거든요. ¶ 손님 나는 전기가 싫습니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가서는 꼭 죽잖아요. 결말이 너무 뻔하지 않냐고요! ¶ 어린 소녀 엄마, 책장 꼭대기에 꽃혀 있는 저 책들은 키 큰 사람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 손님 이 오디오북을 살까 하는데요. 직원 오디오북 좋죠. 손님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낭독자가 마음에 안 들어요. 직원 그러세요? 손님 낭독자도 고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난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택할 텐데. ¶ 손님 (친구에게)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

한밤의 도서관 2019.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