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79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여전히 독서 모임은 매번 정원을 채우기가 힘들다. 점점 나아지겠지 하며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지인들을 끌어들이는 다단계 판매 방식과 흡사하다. 책 또한 지인들이 얼마나 많이 사갔던가. 그래서 3개월 동안 월세 안 밀리고 출판사와 독립출판 제작자에게 정산을 다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남은 돈은 아이들에게 용돈을 쥐어줄 정도의 금액뿐이다. 다음 날 출근하면 책방은 텅 비어 보인다. 사방이 책이지만 책은 보이지 않고 빈 공간만 눈에 들어온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골목에는 점점 인적이 뜸해진다. 특히 요즘처럼 폭염이 이어지는 날은 더욱더 그렇다. 책방을 두드리면 텅텅 소리를 낼 것 같다. 책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읽어주는 이들이 있어야 비로소 책은 책으로서 빛난다. 모임으로 인한 피..

한밤의 도서관 2020.07.02

B급 며느리

나는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무책임해지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경제적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정을 꾸리는 것에는 한 치의 로망도, 관심도 없었다. 탕웨이와 결혼한 김태용 감독을 보며 ‘언젠가는 나도…’를 읊조린 적은 있다. 그냥 자유롭고 무책임한 그 상태가 좋았다. 여자들은 평생에 걸쳐서 자기 자신을 주변의 상황에 맞추는 것에 익숙해져요.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원하는 옷차림, 말투, 행동을 체화하고 그걸 통해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는 거죠. 결혼하면서도 마찬가지예요. 여자들은 결혼 전의 취미나 생활양식을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개성 없는 아줌마 파마예요. 남편에, 시댁에, 아이들에게 맞춰서 사는 거죠.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자신의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아요. 낚시나 야구 따..

한밤의 도서관 2020.06.25

결 : 거칢에 대하여

자유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기본적인 물적 토대를 필요로 하며, 이 기본적인 물적 토대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의 조건이기도 하다. 춥고 배고픔이라는 가난과 그런 결핍상태의 지속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릴 수 없게 한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 이 모순적 태도는 남에 비해 내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려는 인간의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속성은 필연적으로 나와 다른 남을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차별, 억압, 배제하는 데 동의하도록 작용한다. 우리는 경쟁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욕망을 넘어 탐욕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한밤의 도서관 2020.04.28

언제나 여행 중

개성을 만드는 요소란 자란 환경이나 경험이나 유전뿐 아니라 그 시대, 그 장소의 공기이기도 하다. 국경을 지나기 전의 하늘은 분명 핀란드 직원의 미소 띤 얼굴을 닮은 흐린 하늘이었는데, 국경을 지난 뒤의 하늘은 여지없이 러시아 직원처럼 거만하게 흐린 하늘이었다. - 아무래도 모르겠는, 그런 도시___러시아 나고 자란 나라에서 변화를 느끼기는 정말 어렵다. 물론 컴퓨터 보급이나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소통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 등은 체감할 수 있지만, 그건 변화가 아니라 단지 신제품이 등장한 것뿐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어떤 세계관 같은 것이 크게 변하는, 온몸이 뒤흔들리는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히 여행하다가 반해버린 곳에서 생생한 변화를 목격하는 건 정말 행복..

한밤의 도서관 2019.10.29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

엽산 저장량이 부족한 정자도 선천성 기형을 일으킬 위험이 높다. 엽산은 수용성비타민의 일종으로 DNA 합성과 세포분열 등에 관여하는데, 가임기 여성이 엽산을 먹지 않으면 태아 척추 이분증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임기 남성이 엽산을 먹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한다.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엽산을 먹지 않은 수컷의 2세가 엽산을 많이 먹은 수컷의 2세에 비해 선천성 결손 발생 비율이 30%가량 높게 나타났다. 또 다른 연구에서 엽산을 많이 먹은 남성들(섭취량 상위 25%)은 정자 염색체 수가 비정상일 위험이 대조군보다 20~30% 낮았다. 이론적으로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임신 0주차 0일로 본다. 흔히 열 달간 아이를 품는다고들 하지만, 인간의 임신 기간은 열 달이 채 안되는 40주(..

한밤의 도서관 2019.10.13

책갈피의 기분

언어의 기본 역할은 뜻을 통하게 하는 것이 첫째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도 일상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대충 말하고 쓴다. 편집자가 대순가, 바빠 죽겠는데. 실장님ㅁ~ 종이 들어갓나여? ㅃㅏ릴빠ㄹ리빨리빨리 대펴님 이거 빨리 확인해주샤야 마감햅니다 편집자가 되어서 저따위로 언어를 파괴한다고 비낸해도 진짜 어쩔 수 없다. 생존형 언어니까.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들 하던데, 그 말에 정말 200퍼센트 공감한다. 책이 좋아서 책 사이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그 책 사이에 끼어 납작한 책갈피의 기분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일을 하면서 가장 날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띄어쓰기’다. 미친 듯이 어려운 건 사실 아닌데 진짜 너무 헷갈리고 애매하다. 이미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는 문제를 넘어서 ‘찾아보..

한밤의 도서관 2019.09.16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여자 인생 마흔부터잖아? 늦지 않았다고! “경력이 너무 많네요.” 그사이 내 나이 앞자리는 3에서 4로 바뀌어 있었다. 연차도 연봉도 부담스러운 위치가 돼버린 것이다. 아무리 일 잘하고 커리어가 좋아도 팀장 자리를 누구의 라인도 아닌 나 같은 여자에게 내어줄 곳은 없었다. 조직 내에서 열심히 일하던 여성도 40대가 되면 밀려나는 것이 남성중심적 기업구조다. 조직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는 프리랜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일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적 발언권을 얻었다. 일은 경제적 자립을 넘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해주었다. 그런 일이 사라진다는 건 내가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야망을 갖고 위로 올라가려는 것은 여성스럽지 않은 것. 그런 여자는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여자. ..

한밤의 도서관 2019.09.11

좋은 사람이길 포기하면 편안해지지

사실 인간은 누구나 오십보백보지만, 자기 안에 있는 추한 열정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주면 마음놓고 그 사람을 경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들은 매우 기뻐한다. 인간은 좋은 일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오히려 적당히 그때그때 얼버무리며 넘어갈 때가 더 많다.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이 정당한 일, 훌륭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타인도 자신처럼 행동하기를, 또 타인이 자신에게 반드시 감사와 칭찬을 해주기를 마음속으로 요구한다. 우리들은 최대한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맑은 물에만 몸을 두지 말고 탁류에도 부대낄 일이며, 내 손은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언제나 진흙투성이라고 생각할 일이다. 언제나 나는 강하다고 자신하지 말고 나의 나약함을 확인할 수 있는..

한밤의 도서관 2019.08.23

모든 것은 그 자리에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박물관을 좋아했다. 박물관들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세상의 질서를 (생생하고 구체적이지만 정돈된 형태의) 축소판으로 보여주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내가 식물원과 동물원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다. 식물원과 동물원은 자연을 보여주되, 일목요연하게 분류된 자연, 즉 생명의 분류체계taxonomy를 보여준다. 책에는 아쉽게도 실물은 없고 단어만 존재하지만, 박물관은 실물을 조목조목 배열함으로써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이라는 경이로운 메타포를 구현한다. 우리 모두에게도 라부아지에와 같은 인물―평생 동안 함께할 자아이상ego ideal◆◆이 필요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나와 대화하는 젊은 과학자 친구들 중에는 데이비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심..

한밤의 도서관 2019.08.22

깃털도둑

“수집가들 덕분에 동물학이 발전했다는 자네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어. 그들은 박물관을 채웠다고 자랑스러워하겠지만, 사실은 자연을 비운 것이지……. 매우 부적절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네.” 전 세계 곳곳에 기업형 농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왜가리 같은 새는 새장에서 기르기 힘든 종이기에 가느다란 면실로 위아래 눈꺼풀을 꿰매어 앞을 보지 못하게 하고 길들이기도 했다. 새들은 이렇게 무를 창출하는 수단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아갔다. 1912년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배에서 가장 값 나가고 보험료가 높았던 물건도 바로 깃털 상자 40개였다. 친애하는 여성 동지들이여, 신은 우리에게 머리를 주었습니다. …… 우리에게 평생의 과업은 남자든 혹은 누구라도 다른 사람을 유혹하거나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

한밤의 도서관 2019.08.15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책을 통해서라면 누구도 자신의 시야에 갇히지 않고 현재와 과거의 모든 사건, 전 인류의 사상과 감정에 모두 관여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 정신세계의 모든 혹은 거의 모든 지성적 활동은 책에 기초하고 있으며, 물질의 상부에 있는 문화라고 불리는 그 무엇은 책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에서 영혼을 확장하고 세계를 건설하는 이러한 책의 힘에 대해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며, 매우 드문 순간에만 자각할 뿐이다. 새롭고 놀라운 것의 존재에 매번 감사함을 느끼는 것과 다르게 책은 이미 우리 일상에서 당연한 것이 된 까닭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에 동승하고 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책을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의 눈만이 아니라 셀 수 없..

한밤의 도서관 2019.08.13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임신 중 복통은 월경통과는 다른 고통을 준다. 내 몸도 부스러질 거같이 너무 아픈데 아기에 대한 걱정도 함께 들어 정신적으로 버텨내기가 힘들다. 아픔의 원인을 찾으려고 수만 가지 생각을 하다가도 결국엔 진료비 걱정에 병원 가기를 주저한다. -10주차 中 결국 보스가 우리 부서의 전 직원을 불러 모았다. 급격히 많아진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결국 임신한 여성 직원들에 대해 말을 꺼낸다. 임신 당사자도 같은 공간에 불러놓고 “임산부가 많지만 업무에 빈틈 생기지 않도록 긴장하라”는 말을 하려면, 업무 중 임산부에 대한 배려도 같이 언급해야 온당하지 않나 싶지만 역시 그런 건 없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저 임신해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 동료들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육아휴직자의 대체근..

한밤의 도서관 2019.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