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박물관을 좋아했다. 박물관들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세상의 질서를 (생생하고 구체적이지만 정돈된 형태의) 축소판으로 보여주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내가 식물원과 동물원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다. 식물원과 동물원은 자연을 보여주되, 일목요연하게 분류된 자연, 즉 생명의 분류체계taxonomy를 보여준다. 책에는 아쉽게도 실물은 없고 단어만 존재하지만, 박물관은 실물을 조목조목 배열함으로써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이라는 경이로운 메타포를 구현한다.
우리 모두에게도 라부아지에와 같은 인물―평생 동안 함께할 자아이상ego ideal◆◆ 1이 필요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나와 대화하는 젊은 과학자 친구들 중에는 데이비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 나의 관심사가 뭔지를 말해주면, 그들 중 일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곤한다. 구 과학과 신 과학간의 연관성은 그들의 안중에는 없는 듯하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서재였다. 그곳은 커다란 오크 판으로 마감된 방으로, 네 벽이 모두 책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한복판에는 집필 및 연구용으로 견고한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재에는 히브리학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의 특별한 장서, 입센의 희곡에 관한 모든 것(나의 부모님은 의대생 시절 입센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만났다)이 보관되어 있었다. 한 칸짜리 선반에는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젊은 시인들의 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내 손이 쉽게 닿는 책장 아래쪽 칸들에는, 세 형들의 소유물인 모험과 역사에 관한 책들이 즐비했다. 내가 키플링의 《정글북Jungle Book》을 발견한 것은 바로 거기서였다. 나는 주인공 모글리와 깊은 동질감을 느낀 나머지, 그의 모험을 나만의 판타지 세상을 향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나는 대체로 학교를 싫어했다.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들으면, 정보가 한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선천적으로 수동적인 게 싫었고, 매사에 능동적이라야 직성이 풀렸다.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배워야만 했다. 나는 좋은 학생이라기보다는 좋은 학습자였다. 웰즈덴 도서관(그리고 그 이후에 찾은 모든 도서관)에서 서가와 선반 사이를 기분 내키는 대로 어슬렁거리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뭐든 골랐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갔다. 나는 도서관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수천 권, 수만 권의 책들을 마음대로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거닐고, 특별한 분위기와 다른 독자들과의 조용한 동행을 즐겼다. 그들은 모두 나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자신만의 것’을 추구했다.
“특정한 단어를 자꾸 반복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는 말했다. “내가 강박적으로 뭔가를 만질 때 느끼는 만족감과 똑같아요. 내가 당신의 회중시계 유리를 만지거나 손톱으로 톡톡칠 때도 기분이 좋았어요. 다양한 감각을 갖고 노는 거예요.”
칼라와 클라우디아 자매를 승용차에 태우고 운전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교차로를 지날 때 마다 한 명은 “우회전!”, 다른 한 명은 “좌회전!”을 외쳤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영화관에서 함께 “불이야!”를 외치는 바람에, 놀란 관람객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또 “상어다!” 하고 외쳐 해변을 깨끗이 비운 적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침실 창문에서 고막을 터뜨릴 정도로 고함을 칠렀는데, 그중 하나는 “흑인 여자와 백인 여자가 동성애를 해요!”라는 소리였고, 더욱 가관인 것은 “아버지가 나를 강간해요!”라는 울부짖음이었다. 모든 이웃들은 그들의 외침이 황당무계하다는 점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그 말에 결코 익숙해지지 못했고 딸들이 “강간!”하고 외치면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전두엽은 인간의 뇌에서 가장 복잡한 부분으로, 가장 최근에 진화했다. 전두엽은 지난 200만 년 동안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폭넓게 심사숙고하는 능력, 많은 아이디어와 사실을 상기하고 보유하는 능력, 주의를 집중하고 꾸준한 집중력을 유지하는 능력,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능력―이 모든 것들을 전두엽 덕분에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두엽은 뭔가를 억제하거나 제한하는 역할도 수행하는데, 그 대상은 파블로브가 말한 “피질하의 맹목적인 힘”, 즉 억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우리를 압도할 수 있는 충동과 열정이다.
치매 환자를 돌보려면(특히, 이미 상당한 수준의 치매를 앓고 있으며, 상태가 비가역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환자라면) 기진맥진할 정도의 신체적 중노동도 필요하지만, 지속적이고 거의 텔레파시에 가까운 감수성이 필요하다. 생각을 주고받는 능력이 점점 더 감소하는 데다 명확한 사고를 점점 더 못하게 되므로 환자의 의향을 알아내기 위해 극단적인 감수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치매 환자들의 혼동과 지남력상실은 끔직한 수준이므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간병인들이 몸져누울 수 있다. 나는 의사로서 그런 경우를 자주 본다. 연로한 배우자나 남편이나 아내를 돌보다 건강을 해쳐, 환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외부의 도움이 필수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알츠하이머 병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겁을 집어먹거나 몹시 당황하게 된다.
그중에서 일부는 지적 능력과 태도를 상실하고 혼돈과 지리멸렬함이 갈수록 더해가는 세상에 직면하게 된에 따라, 매우 심각한 공포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더욱 차분해진다. 왜냐하면 뭔가를 상실했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매우 단순하고 무덤덤한 세상으로 옮겨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고많은 질병 중에 정신병 특히 조증을 가리켜 유혹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뭘까? 프로이트는 모든 정신병들을 나르키소스적 장애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정신병자들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고―메시아 내지 ‘심령의 대속자代贖者’가 되든 (우울성정신병이나 편집성정신병의 경우에 그러하듯) 보편적인 박해와 비난이 초점이 되든, 조롱이나 비하의 대상이 되든―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선발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초기 저작 중 일부는 큰글자판으로도 출간되었으므로, 공개 낭독회에서 낭송 요청을 받았을 때 매우 유용했다. 요즘에는 큰 글자판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 이유인즉 전자책 덕분에 활자 크기를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키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나는 킨들이나 누크Nook나 아이패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욕조에 빠뜨리면 먹통이 되고, 바닥에 떨어트리면 망가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자책에는 조그맣고 희미한 아이콘이 있어, 그걸 들여다보려면 확대경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종이에 인쇄된 ‘진짜 책’을 좋아한다. 종이책은 지난 55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중량감과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으며,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읽거나, 책꽂이에 꽂아뒀다가 뜻하지 않게 시선이 꽂혀 읽을 수도 있다.
내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2006년 1월,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난감했다. 오디오북이라는 게 있었지만 (그중에는 내가 직접 녹음한 것도 몇 권 있다), 나는 청취자가 아니라 뼛속까지 독자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고질적인 독자로서, 단락과 페이지의 쪽수나 형태를 거의 자동으로 기억해뒀다가, 대부분의 내 책에서 특정한 구절이 몇 페이지에 있는지 곧바로 찾아낼 수 있다. 나는 ‘내 소유의 책’, 즉 편제(조판과 편집)가 익숙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책을 원하다. 이처럼 읽기에 최적화된 뇌를 갖고 있다 보니, 내게틑 큰글자책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독서란 매우 복잡한 과제로, 수많은 뇌 영역을 호출한다. 그리고 독서는 언어와 다르다. 즉, 언어는 인간의 뇌에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지만, 독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독서는 인간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서는 비교적 최적(아마도 5000년 전)에 진회했으며, 뇌의 시각피질 중 미세한 부분에 의존한다.
개인의 독서 행위는 기억과 경험만이 아니라 감각양식sensory modality과도 제각기 독특하게 결합한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는 동안 단어의 소리를 ‘듣는’가 하면(나도 단어의 소리를 듣는다. 단, 정보 수집을 위해 독서를 할 때가 아니라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할 때만), 어떤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읽은 것을 시각화한다. 어떤 사람들은 문장의 청각적 리듬이나 강약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어떤 사람들은 문장의 시각적 모습이나 형태를 더 민감하게 의식한다.
‘직접 읽기’와 ‘읽어주는 책 듣기’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가 책을 직접 읽을 때는, (눈을 사용하든 손가락을 사용하든) 자유자재로 건너뛰거나 되돌아오고, 다시 읽고, 문장 한가운데서 심사숙고하거나 몽상에 빠질 수 있다. 그에 반해 읽어주는 책을 듣는 것과 오디오북을 듣는 것은 직접 읽기보다 수동적인 경험이고, 타인의 음성의 변덕에 놀아나기 쉬우며, 대체로 내레이터의 페이스에 맞춰 진행한다.
만약 만년에, 예컨대 시력 상실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독서 방식을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한다면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적응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읽기에서 듣기로 전환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가능한 한 오래 독서를 계속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자책에서, 어떤 사람은 컴퓨터에서 활자체를 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술 중 어느 것도 채택하지 않았으며, 적어도 지금까지는 구식 확대경을 고수하고 있다. (나는 다양한 형태와 배율을 가진, 10여 개의 확대경을 보유하고 있다.)
자연이 인간의 뇌를 진정시키고 정돈하는 메커니즘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내가 돌보는 환자들의 사례에 비춰볼 때, 자연과 정원은 심지어 심각한 신경장애를 경험하는 환자들에게도 회복력과 치유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정원과 자연의 효능이 의약품보다 뛰어난 경우도 많다.
자연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뭔가에게 말을 거는 게 틀림없다. ‘자연’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생명애biophilia는 인간됨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창문 없는 사무실에서 장시간 근무하는 사람들, 녹색 공간에 접근할 수 없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도시의 답답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어린이들, 양로원과 같은 시설에서 생활하는 노인들…. 자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의 범위는 영적 · 정서적 측면 뿐 아니라, 생리학적 · 신경학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나는 그것이 뇌의 생리학은 물론 어쩌면 구조에도 심오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 M. 포스터가 1909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기계가 멈춘다The Machine Stops>에서 오늘날 펼쳐질 상황을 상당 부분 예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소설에서, 지하의 고립된 감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직접 만나지 않고 오디오 및 시각 장치를 이용하여 의사소통하는 미래 세계를 상상했다. 그 시계에서는 “혼자 생각해낸 아이디어를 조심하라!”고 외치며, 독창적인 생각과 직접적인 관찰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다. 인간성을 접수한 기계the Machine가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수요를 충족하되, 인간적 접촉의 욕구만은 금지한 것이다. 단 한 명의 청년 쿠노가 스카이프 비슷한 기술을 이용하여 어머니에게 호소하였다. “나는 기계를 통하지 않고 어머니를 보고 싶어요. 지긋지긋한 기계를 통해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건 싫어요.”
세상을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을 신뢰한다. 인류와 지구는 생존할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며, 지금이 인류의 마지막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좀 더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2019/07/27 - [한밤의도서관] - 온 더 무브
2017/10/14 - [한밤의도서관]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만든 완전성의 기준을 말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