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색맹의 섬

uragawa 2018. 11. 3. 21:36

색맹은 푸르와 핀지랩 두 곳에서 한 세기 이상 존재했으며 두 섬 다 각종 유전자 연구의 주제가 되어왔으나, 그곳 사람들에 관한 인간적 (말하자면, 웰스식의) 탐구며 색맹 사회에서 색맹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까 자기만 완전히 색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색맹 부모와 조부모, 색맹 이웃, 선생님까지도 색맹인 곳. 색에 대한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신 다른 형태의 지각 능력, 다른 형태의 관찰력이 증폭 돼 발달한 문화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관한 연구는 전혀 없었다.



암초 아래에서 아이들이 벌써 헤엄치며 놀고 있는데 아이는 이제 갓 걸음마를 덴 아기이지만 산호가 뾰족뾰족 솟아 있는 물 속으로 겁 없이 뛰어 들면서 신나서 빽빽 고함을 질러댄다. 색맹 꼬마 두세명도 물속으로 뛰어들어 다른 아이들과 고함을 지르며 놀고 있다. 적어도 저 나이대에는 소외되거나 끼지 못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날이 아직 일러 하늘이 어둑어둑해서 대낮일 때 만큼 눈이 부시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콜로니아에는 교통신호기도 네온 간판도 극장도 없이 가게만 한두 곳 있고 곳곳에 사카우 술집뿐이다. 정오가 되도록 오가는 사람 없는 중심가 한복판에서 나른해 보이는 기념품 가게며 잠수 장비 가게를 기웃거리면서 걷다 보니 우리도 허름하고 무심한 이곳 공기에 빠져들었다. 중심가에는 이름이 없으며, 지금은 어떤 거리에도 이름이 없다. 콜로니아 사람들은 잇따른 점령자들이 붙인 거리 이름을 더는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한시라도 빨리 있고 ‘바다 기슭 길’이나 ‘소케스가는 길’ 같은 식민지 이전 시절의 본디 이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도시에는 중심가가 따로 없고 거기다 길에 이름까지 없어 우리는 계속 길을 잃었다. 도로에는 차가 몇 대 있지만 사람 걷는 속도나 그보다 더 천천히 움직이며 도로 한가운데 누워 있는 개들을 피해서 몇 미터마다 멈춰 섰다. 이 무기력한 곳이 폰페이만이 아니라 미크로네시아 연방 전체의 수도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그동안 차모로 사람들 사이에는 서양 의사들에 대한 분노가 쌓여왔다. 차모로 사람들은 그들의 사연과 시간, 피, 나아가서는 뇌까지 바쳐왔다. 그러면서 종종 의사들이 자기네를 의학 표본이나 실험 대상으로 여길 뿐 그들이 진정으로 자기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이 자기네 가족한테 이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한 고개 넘은 겁니다.” 필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의사를 집 안으로 들인다면, 힘든 고개 하나를 또 넘은 거죠. 하지만 처치든 간호든 보건이든 자택 치료든, 보조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어요. 객원 의사란 사람들이 온갖 서류 양식이며 실험 계획안 나부랭이를 들고 왔다 가는데 정작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존과 저는 사람들 집을 정기적으로 찾아다니면서 가족들과 집안 내력,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아나가죠. 존한테는 10년에서 12년 동안 봐온 환자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은 우릴 믿게 됐고, 그래서 점점 더 마음을 열고 도움을 요청하죠. 그러니까 ‘아무개가 좀 창백해요. 어떻게 해야하죠?’ 같은 거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네를 도와주려 한다는 걸 아는 겁니다. 연구원들은 여기 와서 표본을 떠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는데, 몇 주 뒤에 이 사람들 집으로 진료를 하러 오는 건 우리거든요.”



나는 뉴욕에 있는 말기 신경위축성경화증 환자들을 생각했다. 모두가 병원이나 사설 요양원에서 코와 위장의 관과 흡입 장비, 때로는 인공호흡 장치까지 온갖 최첨단 장비의 혜택을 받으며 지낸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이, 그들이 이런 상태인 것을 차마 볼 수 없거나 그들을 (병원이 그러듯이) 사람이 아니라 각종 ‘생명 유지 장치’와 최고의 현대적 진료를 받는 말기 환자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친척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외면 당한 채 홀로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