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온 더 무브

uragawa 2019. 7. 27. 22:00

결국 내 성 정체성은 남이 상관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고, 비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떠들고 다닐 일도 아니지 않은가.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 에릭 콘과 조너선 밀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이 주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조너선은 나를 ‘무성애자’로 여긴다고 말했다.



나를 특히 매혹시킨 것은 감각기관의 생리학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색과 입체감과 움직임을 보는가? 어떻게 어떤 것을 알아보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 세계를 시각적으로 이해하는가? 나는 시각편두통을 겪으면서 일찌감치 이런 의문을 품어왔다. 눈부신 지그재그 모양이 나타나는 전조aura 증상 말고도 편두통이 일어나는 동안 색이나 입체감이나 움직임을 지각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심지어 어떤 것을 알아보는 능력까지 상실했기 때문이다. 시력이 내 눈앞에서 파괴되고 해체되었다가는 바로 몇 분 만에 재형성되고 복원되는 현상은 몹시 무서웠지만 또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나는 ‘예-아니요’를 묻는 지식 시험에는 형편없었지만 에세이라면 물 만난 고기였다.


시어도어 윌리엄스 상에는 부상으로 상금 50파운드가 따라왔다. 50파운드라니! 그렇게 큰돈이 한목에 생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이번에는 화이트호스로 가지 않고(그 술집 옆에 있는) 블랙웰서점으로 가서 44파운드를 주고 12권짜리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을 구입했다.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 무엇보다 갖고 싶었던 책이었다. 나는 의학부 시절 내내 이 사전을 통독했고,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책꽂이에서 한 권을 뽑아들고 잠자리로 가곤 한다.



나는 낮과 밤에 각각 다른 자아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낮이면 흰 가운 입은 친절한 올리버 박사님으로 살다가 일몰이 오면 모터사이클용 가죽 복장으로 갈아입고서 익명의 존재가 되어 늑대처럼 병원을 빠져나가 길거리를 배회하거나 타말파이어스 산의 굽잇길을 타고 올라가 달빛 내리는 길로 스틴슨비치나 보데가 만까지 달렸다. 이 이중생활에는 내 중간 이름, 울프Wolf가 아주 유용했다. 톰과 바이크 친구들하고 어울릴 때는 울프, 동료 의사들에게는 올리버였으니 말이다.



모터사이클로 캘리포니아 일대를 누빌 때면 늘 니콘 F 카메라와 각종 렌즈를 싣고 다녔다. 특히 좋아한 것은 꽃과 나무껍질, 지의류, 선류 이끼까지 접사 촬영이 가능한 매크로렌즈였다. 삼각대가 견고한 4×5인치 린호프 뷰카메라도 한 대 있었다. 이 장비들을 진동과 충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전부 침낭에다 칭칭 싸맸다.



글 쓸 자유를 얻고 나니 마감이 임박한 듯한 초조한 기분에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1967년 원고는 만족스럽지 않아 완전히 새로 쓰기로 작정했다. 9월 1일, 스스로 다짐했다. “9월 10일까지 완성한 원고를 넘기지 못하면 내 손으로 날 죽여야 할 거야.” 이런 협박 아래 책을 쓰기 시작했다. 대략 하루 만에 협박받는 기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글 쓰는 기쁨이 대신 들어섰다. 더이상 마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의기양양하고 힘이 샘솟았다. 책 쓰는 과정은 마치 누가 불러주는 걸 받아쓰는 것처럼 모든 것이 신속하게 알아서 구성되고 정리되었다. 잠은 두어 시간 자면 그만이었다. 마감 기한을 하루 앞둔 9월 9일, 원고를 들고 페이버앤드페이버로 갔다. 출판사 사무실은 대영박물관 근처 그레이트러셀 스트리트에 있었다. 원고를 넘기고 걸어서 박물관으로 갔다. 창작자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은 그곳의 유물(도자기, 조각상, 도구, 그리고 특히 서적과 필사본)을 보면서 나 또한 무언가를 창조했다는 기분에 젖었다. 그리 대단하지는 않지만 실체와 존재가 있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무언가를.



나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서 글을 쓰는 동시에 생각을 발견하는 쪽인 듯하다. 어쩌다 깔끔하게 딱 완성되는 글도 있지만 그보다는 수차례 다듬고 잘라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같은 생각을 여러 가지로 표현해보는 내 스타일 탓인 듯하다. 글을 쓰다 보면 내 안에 숨어 있던 생각들이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와 문장 중간에서 글의 주제와 결합해 발전하곤 한다. 그런 경우에는 괄호 안에 넣거나 종속절로 덧붙여 때로는 문장 하나가 단락 하나 길이가 되기도 한다. 형용사 여섯 개가 쌓여 더 적확한 문장이 될 수 있는데 다 쳐내고 하나만 쓰는 것은 결코 내 방식이 아니다. 내가 느끼는 세계는 온통 촘촘하고 빽빽하기만 하다. 이것을 글에 다 담으려다 보니(클리퍼드 거츠〔1926~2006, 미국의 인류학자: 옮긴이〕가 말하는) “두툼한 기술thick description”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글의 짜임새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사고를 통해 또한 내가 연약한 존재,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다. 나는 어느 모로 보나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고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도 아니었다. 모터사이클 타던 젊은 시절에는 겁이라고는 몰랐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자기가 불사신인 줄 아는 놈이라고 했을까. 낙상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로 내 인생에는 조심과 두려움이 깃들었고, 지금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내내 함께하고 있다. 무사태평 인생이 유비무환 인생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이로써 내 청춘이 막을 내리고 중년이 시작되는구나 느꼈다.



최고의 즐거움은 잔잔한 호수에서 즐기는 수영이었다. 이따금 어부가 노 젓는 거룻배가 슬렁슬렁 지날 뿐 무방비 상태의 헤엄꾼을 위협하는 동력선이나 수상스키 같은 것은 없었다. 레이크제퍼슨호텔은 전성기를 지난 곳이어서 장식 정교한 수영 플랫폼과 뗏목, 대형 천막 따위가 다 방치된 채 조용히 썩어가고 있었다. 속박 없이 근심걱정 하나 없이 헤엄치다 보면 몸은 편안해지고 머리는 빠릿빠릿하게 돌아갔다. 생각이 떠오르고, 이미지가 떠오르고, 때로는 단락 하나가 통째로 머릿속에서 헤엄치기 시작하는 바람에 수시로 물 밖으로 튀어나와 호수 옆 야외 탁자에 놔둔 메모지에다가 쏟아 붓곤 했다.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는지 가끔은 제대로 말리지 못한 물기에 메모장이 흠뻑 젖기도 했다.



내게는 누군가 그렇게 마음을 써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생각해주는지조차 믿지 못할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에야, 50년 전 미국으로 떠나올 때 부모님이 쓴 편지를 읽으면서야, 그분들이 얼마나 마음 깊이 나를 염려하고 생각해주었는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생각해주었다는 사실도. 내게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낀 것은 어쩌면 내 내면의 어떤 결핍 또는 억압이 투영된 것이었을까?



나는 일상에서 사람 대하는 일에 수줍음이 많다. 평범한 ‘잡담’이 내게는 결코 쉽지가 않다. 사람 얼굴 알아보는 데도 문제가 있고(이것은 평생 문제였지만 지금은 한쪽 시각을 잃으면서 더 심해졌다). 정치건 사회건 성이건 시사 문제에는 거의 아는 바도 관심도 없다. 게다가 난청까지 왔다. 정중하게 표현해 그렇다는 거고 귀가 멀었다는 소리다. 종합하자면 나는 눈에 띄지 않게 구석자리로 물러나는 쪽이며 누구든 알은척하지 말고 지나가줬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길거리에서 사람들하고 말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몇 해 전 개기월식이 있던 날 20배율 소형 망원경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분주히 걸어가는 사람들은 바로 머리 위 천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멈춰 세우고 말했다. “보세요! 달이 어떻게 됐는지 봐요!” 그러고는 내 망원경을 사람들 손에 들려줬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접근하니 처음에는 놀라서 물러섰다. 하지만 내가 순수하게 열광하는 것을 알고 호기심을 보이면서 망원경을 눈에 갖다 대고는 “와” 감탄하고 망원경을 돌려줬다. 그러고는 “저런 걸 보게 해주다니, 고맙습니다” 하거나 “아이고, 보여줘서 고마워요”라며 인사했다.



요리에 젬병인 나였지만 그날따라 더 엉망이었다. 카레 봉투가 터져 온몸에 노란 가루를 뒤집어썼다. 톰에게는 이 일이 굉장히 인상에 남았던지 1984년에 시 <노란벌레잡이풀Yellow Pitcher Plant>을 내게 보내주면서 원고에 “샛노란 사프란 범벅 색스에게, 졸린 건으로부터”•라고 써놓았다.



톰에게는 스스로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그에게 시는 서두른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가 스스로 침잠하여 무르익은 뒤에 나오는 무엇이었다. 그는 학생들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지만(학생들이 엄청나게 사랑하는 교수였다) 시 창작을 위해 버클리대학교 강의도 1년에 한 학기로 제한해야 했다. 가끔씩 서평이나 에세이를 청탁받는 경우 외에는 강의가 사실상 유일한 소득원이었다. “내 수입은 동네 버스 기사나 거리 청소부가 버는 것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되지만 이건 내 선택이었어. 어떤 데 정직원으로 매여 일하는 것보다는 한가하게 내 시간 갖는 것이 더 좋으니까.” 하지만 나는 톰이 빈약한 생계수단에 위축되거나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남에게는 후하게 베풀었지만) 사치와는 거리가 먼, 태생이 검소한 사람이었다.



글쓰기는 분명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본질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파생적 글쓰기를 꽤나 즐기는 시인이다.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이 누가 되었건 배우고 싶어한다. 내가 다른 곳에서 읽은 것을 빈번히 빌려 쓰는 이유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나의 총체적 경험의 일부이며 내가 쓰는 시 대부분은 내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빌려오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나는 나만의 시적 개성을 키우는 일을 시급한 과제로 여기지 않으며, 예술은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엘리엇의 멋진 말에 환호를 보낸다.



이렇듯 《색맹의 섬》(1997; 알마, 2015)은 전작들과는 아주 다른 더 서정적이고 더 개인적인 책이었으며, 여러 면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었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같이 음악을 듣는다거나 같이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열네 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장이 현재 1,000권에 육박한다. 늘 들고 다니는 작은 수첩형 일기장에서 큰 책만 한 것까지 모양도 크기도 가지각색이다. 나는 꿈속이나 밤중에 생각이 떠오를 경우를 대비해 항상 머리맡에 공책을 놔두고, 수영장이나 호숫가, 해변에도 웬만하면 한 권 놔둔다. 수영은 생각이 굉장히 활발해지는 활동이어서 특히 완성된 문장이나 단락으로 떠오르면 곧바로 나가서 써놔야 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글을 완성하는 경우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로 충분했다. 글을 쓰다 보면 생각과 감정이 분명하게 정리된다. 내게 글쓰기는 정신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요소다.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이 꼴을 갖추어가는 과정 전체가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가 쓰는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뿐더러 나 스스로 지난 일기를 꺼내 읽는 것 또한 좀처럼 없는 일이다. 오히려 일기는 내가 자신과 단둘이 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자신과의 대화에 필수적인 형식의 글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종이 위에서 생각한다고 꼭 공책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편지봉투 뒷면도 되고 메뉴판도 되고,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에든 쓰면 그만이다. 나는 마음에 드는 글귀가 나오면 밝은색 색종이에 옮겨 적거나 타이핑해서 게시판에 압정으로 꽂아놓기가 다반사였다.



글쓰기는 잘될 때는 만족감과 희열을 가져다준다. 그 어떤 것에서도 얻지 못할 기쁨이다. 글쓰기는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잡념이나 근심 걱정 다 잊고, 아니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오로지 글쓰기 행위에 몰입하는 곳으로. 좀처럼 얻기 힘든 그 황홀한 경지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쉼 없이 써내려간다. 그러다 종이가 바닥나면 그제야 깨닫는다. 날이 저물도록, 하루 온종일 멈추지 않고 글을 쓰고 있었음을. 평생에 걸쳐 내가 써온 글을 다 합하면 수백만 단어 분량에 이르지만, 글쓰기는 해도 해도 새롭기만 하며 변함없이 재미나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던 거의 70년 전의 그날 느꼈던 그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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