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uragawa 2020. 8. 6. 22:30

“결혼할 남자한테 아기 기저귀를 갈아줄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보라 이 말이죠. 뭐라고 대답하는지 들어보면, 그 사람이 당신을 동등하게 대할 사람인지 종 부리듯 부려먹을 사람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왜 저렇게 여왕벌을 만지는 거예요?”
“저 벌들은 여왕벌에게 나는 특별한 향기를 모아서 다른 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거야.”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저렇게 하면서 어느 벌집이 자기 집인지 알게 되지. 여왕벌마다 자기만의 향기를 가지고 있거든. 여왕벌의 딸 벌들은 그 냄새를 절대 잊지 않는단다.”
엄마들에게 저마다 특유한 향기가 난다는 건 사실이다. 우리 엄마에게서는 교회 중고 옷 가게에서 산, 다른 사람들의 옷에 밴 희미한 머스크 향에 엄마의 찰리 향수와 밴티지Vantage 담배 냄새가 섞인 향이 났다. 그것은 내가 침대에 올라갈 때마다 가장 먼저 느끼는 독특한 향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은 순간 침대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을 엄마를 생각했다.



유치원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애들을 더 유심히 관찰해서 그대로 따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 것인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단서를 찾아가며 인류학자의 눈으로 아이들을 관찰했다. 아이들이 디즈니랜드나 동물원, 맥도날드에 관해 나누는 대화를 엿듣기도 했고, 그들이 사용하는 은어를 따라 썼으며, 부르는 유행가 가사를 외웠다. 도시락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는지 살펴보고 그 목록을 만들었다. 반 친구들은 은색 파우치에 포장된 주스, 결을 따라 세로로 길게 찢어지는 치즈 토막, 셀로판지처럼 생긴 납작한 과일 젤리 따위를 가지고 다녔다. 한 번은 핼리가 내게 ‘오레오 쿠키’를 비틀어 분리한 뒤에 안쪽 크림을 먼저 핥아먹는 방법을 알려줬는데 세상에, 그건 엄청난 맛이었다. 마치 얼리지 않아도 되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같았다.



매일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그날 배운 것들을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했고, 할아버지는 마음 맞는 친구들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고,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보라고 격려해주었다. 핼러윈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했을 때는 두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핼리와 평생 친구로 지낼 것, 그리고 내년에는 할아버지의 복면포를 쓰고 가서 양봉가라고 하면 된다는 것. 어째서 진작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그러는데 할아버지는 진짜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래요.”
할아버지는 생각에 잠긴 듯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런 다음 나를 안아 올려 한쪽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팔을 뻗어 매슈를 들어 다른 쪽 무릎에 앉혔다.
“자, 이제부터 할아버지 말을 들어봐라. 잘 들어야 한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할아버지 팔을 꼬집어보렴.”
우리는 할아버지가 농담을 하나 싶어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농담이 아니야. 있는 힘껏 세게 꼬집어 봐.”
나는 손톱으로 할아버지 팔뚝을 세게 꼬집어 살갗에 반달 모양을 만들었다.
“할아버지 피부가 느껴지니?”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할아버지는 진짜란다. 할아버지가 너희 할아버지야.”
만족스러워진 매슈는 할아버지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려 느릿느릿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도 전보다 기분이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무엇 때문인지 여전히 마음이 괴로웠다.
“할아버지, ‘의붓-’이 뭐예요?” 내가 물었다.
“음, 의붓-이라는 건, 이 경우에 그저 할아버지 한 명 넘게 있는 행운아라는 뜻이지.”
“그치만 엄마 말로는……”
할아버지는 코가 서로 맞닿을 만큼 얼굴을 내게 가까이 기울이고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엄마가 가끔 뭘 헷갈려 할 때가 있어.” 할아버지는 나만 들을 수 있는 정도로 아주 나직이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누구를 할아버지로 삼고 싶은지 내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건 내게 쉬운 선택이었다
.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빠가 말을 이었다. “거기서 사는 게 행복해?”
이건 누구도 내게 물어본 적 없는 엄청난 질문이었다. 아빠가 내게서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의 행복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아빠의 질문은 약간 충격적이었다. 음악 시간에 빈둥거리며 노는 친구들만큼 행복한 건 아니었지만 엄마처럼 슬픈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 같았다. 거기가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 걸까? 나는 대답 대신 이불에서 풀려나온 실밥만 만지작거렸다.



꿀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들의 높은 사회지능에 깜짝깜짝 놀란다. 벌들은 언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적이기까지 했다. 자료 조사를 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 논의한 다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모두가 함께 결정했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나는 뜬금없이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뭐가 말이냐?”
“벌들은 정말 똑똑해요.“
“그건 너도 이미 알고 있었잖니.”



“있잖니.” 할아버지가 정적을 깼다. “너희 할머니하고 결혼했을 때 내 나이가 마흔이었단다.”
할아버지는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아이를 키울 일이 없을 줄 알았어.”
할아버지의 꿀 상표를 젖은 스펀지에 문지른 뒤 꿀단지에 꾹 눌러 붙이고 있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꿀이 나오는 주둥이를 닫고 일어나더니 양팔을 넓게 벌려 우리를 꼭 끌어당겨 안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작아졌다.
“그랬는데 무슨 행운인지 너희 둘이 나타났단다.”
그 순간 기쁨이 폭발하며 온몸이 짜릿해졌다. 내게도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내 벌집은 바로 이곳. 할아버지의 꿀 버스 안이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자신의 벌을 돌봐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건 남아 있는 마지막 꿀벌들만을 의미한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자연을 위해서,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내게 모든 벌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양봉가의 눈으로 바라보며 내가 마주할 모든 생명을 온화하게 대해 달라는 당부였다. 그 존재가 혹시 내게 침을 쏴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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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The Honey Bus(2019)



도서관에서 대여한 전자책.

올해 하반기는 전자책을 읽을 예정이라
서울도서관 구독형 전자책 리스트를 쭉 훑어보는데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대여했다. 

책 펼치니 지은이 소개에 저널리스트 겸 작가신데
코네티컷 프렌드십 가든에서 5대째 양봉업을 이어오고 있다.라고요???
와 직업 장난아니시닼ㅋㅋㅋ
무슨 내용이 나올지 너무 기대가 되는 것!



햐, 핵존잼이네.
원 제목도 국내 번역 제목도 둘 다 너무 좋다.

저널리스트 겸 작가 셔서 그런지
에세이가 가볍지 않고 문장력도 있어서
읽기 시작하면 끊기가 정말 어려웠다.

특히 오레오 쿠키 먹은 감상 디테일 장난 아니었어 ㅋㅋㅋㅋ



엄마의 이혼, 할머니가 대신하는 육아,
엄마의 육아 방치,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양봉 이야기
(사실 엄마랑 할머니 이야기 나올 때마다 혈압이 올랐는데
끝에 가서야 나오는 엄마와 할머니의 유대감의 이유에서 많이 슬펐다.)

할아버지와 벌꿀이 아니었다면
우울하기만 했을 수도 있을 유소년 기를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이렇게 멋진 할아버지와 결혼한 할머니께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음 ㅋㅋㅋㅋㅋㅋㅋ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네! 별 다섯 개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