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3

꽃은 알고 있다

아마 여러분은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을 테다. 적어도 4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전히 그렇다. 내가 죽은 사람의 비강에서 나온 꽃가루를 채취하는 방법을 개발한 뒤 여기저기서 나를 '콧구멍 여인'이라고 불렀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그것 말고도 여러 이름으로 불려봤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세계의 한 측면을 해석해 형사들을 돕는 '법의생태학자'다. 집 안에서 범죄가 일어나면 수사관들이 법의학을 통해 조사할 방법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집 안은 이미 지문과 DNA로 잔뜩 뒤덮여 있고, 옷의 섬유도 여기저기에 묻는다. 행동분석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 무거운 사체를 끌고 갈 수 있는 한계 거리는 약 100미터다. 오늘..

한밤의 도서관 2020.04.18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정신을 차려 보니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자신이 있었다. 환갑을 넘긴 남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쑥스럽지만, 문득 외로워서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인간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고독을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쁜 나날에 가려져 있던 고독이란 놈은 한가해지는 순간 빠끔히 고개를 내미는 모양이다. 대일본석유회사에서도 출산을 계기로 회사를 그만둔 여직원은 많았다. 다들 아이를 키우고 가사노동에 전념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이처럼 이전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여자도 있는 걸까. "역시 여자는 파트타임 정도가 고작일까." "아버지 잠깐만, 마이 앞에서 그런 소리 절대 하지마." 인간관계라는 건 원래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단란한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려면..

한밤의 도서관 2020.04.15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나처럼 나이들어 몸은 망가졌지만 정신은 멀쩡한 인간이 되면 말이지." 그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혼자일 때 고통을 덜 느껴. 다른 노인네들을 보고 있으면 병들고 망가진 자기 모습이 떠오르니까." 책 읽기는 신성한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꾹 참는다. 그러면 매번 효과를 보는데, 소리 내어 책을 읽는 동안 나를 옭아매고 있던 모든 매듭들이 조금씩 조금씩 풀린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 폭군이 나에게 가하는 그 모든 모욕들이 하나하나 지워진다. 낭독이 끝날 때쯤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화가 모두 사라진다. 예를 들어 네가 서점을 운영한다고 치자. 너는 다른 누구보다 먼저 신간을 읽지. 그런데 남들보다 먼저 읽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결정하는 건 시건방진 짓이야. 책은 우..

한밤의 도서관 2020.04.13

여름의 책

"사랑은 참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사랑은 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정말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계속 사랑해야지." 소피아가 위협하듯이 말했다. "더욱더 많이 사랑해야지." "난 좀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날이 좋으면 짜증이 나는 거 같아."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건 네 할아버지하고 똑같구나. 할아버지도 폭풍을 좋아했지." 하지만 소피아는 할머니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가 버렸다. 여름이 깊어 밤이 꽤 길어진 지 오래여서, 잠에서 깬 소피아는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새 한 마리가 협곡 위를 날아가며 먼저 가까운 곳에서, 이어서 멀리서 울었다. 평화로운 밤이었고, 바다 소리가 들렸다. 협곡을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치 무언가 움직이..

한밤의 도서관 2020.04.10

나를 쳐다보지 마

이처럼 상세한 편린(片鱗)들은 아동기의 기억 대부분이 멀리 사라진 후에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의 마지막 날은 내 마음에 철썩 들러붙어, 감은 눈꺼풀 속에서 일렁이며, 빛과 어둠으로, 마치 옛날 홈무비처럼 끊임없이 재상영된다. 나는 기다림을 싫어하지 않는다. 인내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때를 보는 행위이다. 우리는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늙기를 기다린다……. 어떤 날엔, 아니 대부분의 날에 나는 실망한 채로 귀가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해하지는 않는다. 기회는 또 오기 마련이니까 “신문에 났더라. 글래스고의 어떤 나이 든 여자가 집 안에서 죽은 채로 8년간이나 방치돼 있었대.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봐. 그래서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고. 가스랑 전기는 끊겼어. 창문은..

한밤의 도서관 2020.04.08

지진 새

《말괄량이 삐삐》와 《비밀의 화원》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그녀는 거침없는 삐삐를 존경했고 인도에 살다가 요크셔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된 비참한 메리의 처지에 공감했다. 구름 한 점 없던 그날, 루시는 《폴리아나》를 읽고 있었다. 선생님이 빌려준 책이었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은 역겨웠다. 감상적인 주인공 소녀는 불평하는 법을 몰랐고, 최악의 상황이 분명함에도 좋은 점만을 찾아내려 애썼다. 도쿄는 루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너무 커서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았고,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으며, 너무 비싸서 저축에 관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혼란 속에서 차갑고 조용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허리가 굽은 백 세 넘은 노인들, 세 살 먹은 닌텐도의 귀재들, 먹고 잠..

한밤의 도서관 2020.04.04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결혼은 친척을 두 배로 늘리고, 짐을 두 배로 늘리고, 싸움을 네 배로 늘린다. 당연히 책꽂이의 책은 전부 이중으로 꽂혀 있다. 뒤에 있는 책은 보이지 않으니 분명히 있을 책이 걸핏하면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아내에게는 시침 뚝 떼고 똑같은 책을 또 샀다. 하지만 그런 나쁜 짓은 물론 들키게 돼 있다. 도대체가 책의 형태가 문제다. 네모나고, 쌓기 편하고, 게다가 썩지 않는다. 임시로 한 권을 책 탑 위에 대충 올려놓는다. 이게 그 뒤의 행방불명과 붕괴로 이어진다. 가나와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아침 일찍 청소와 빨래를 시작해 오전 중으로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치우고 나면, 전철을 갈아타고 경로 우대 할인이 되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백화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거나(가나를 우연히 만난 국숫집을 처음 발견한 ..

한밤의 도서관 2020.03.26

열 문장 쓰는 법

당연한 말이지만, 일단 한 문장부터 씁시다. 다만 길이는 정하지 않고 쓰는 게 어떨까요? 요즘은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저자나 작가는 물론 그 글을 다듬어 책으로 내는 편집자도 무조건 문장을 짧게 쓰라고만 강조합니다. '단문교'短文敎라는 종교 단체가 결성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단문에 대한 칭송은 거의 숭배에 가깝죠. 하지만 이는 글을 어느 정도 쓰고 다루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도 아닙니다. 결국 말하기와 글쓰기에서 '자연스럽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자연스럽다'의 의미가 사람의 노력이나 손길이 닿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어떨까요. 가령 가을에 벼가 누렇게 익어 가는 김제 평원 같은 곳을 둘러보며 '자연'을 만끽했다고 느..

한밤의 도서관 2020.03.23

고독한 늑대의 피

오가미와 히오카는 가코무라구미 사무소 주변에서 신도 방문을 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말하는 ‘신도檀家’란 사건 관련 정보를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일반 시민을 가리킨다. 신도 방문과 통상적인 탐문의 차이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사건처럼 보이는 일이나 사건으로 연결될 만한 일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는 점이다. 신도는 주유소 종업원, 현지의 개인 상점 주인, 커피숍 주인 등 다양하다. “폭력단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 인간은 말이지, 밥을 먹으면 똥을 눠야 해. 밑을 닦을 휴지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폭력단은 화장실 휴지 같은 거야.” “그런데 왜 나와시로들은 시체를 섬에 묻었을까요?” 눈앞에 나타난 아카마쓰 섬의 그림자를 응시하면서 오가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드럼통..

한밤의 도서관 2020.03.20

염소가 웃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잠깐 안겨줬다가 곧바로 그 작은 희망마저 빼앗아버리는 게 아닐까? 상황이 좋아진 거라곤 하나도 없는데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최악의 결과를 알고 있으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유령도 아니고, 자신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걸 제일 두려워한다. 한마디로 '미지未知'를 가장 두려워한다. 더보기 염소가 웃는 순간 山羊獰笑的剎那(2018) 찬호께이 새로운 책이라 제목만 보고 구매했는데, 두껍고 무거워서 집에서 저녁에만 읽기로 생각했거든? 인물 설명을 읽고 '청춘물이겠구나~' 하고 가볍게 읽기 시작. 했는데? 왜 때문에 호러 공포물이냐!!..

한밤의 도서관 2020.03.15

라이프 오어 데스

“자네 이름이 뭔가, 젊은이?” “모스 제러마이어 웹스터인데요.” “이름이 모스가 뭐야?” “그게요, 소장님, 엄마가 제 출생증명서에 모세를 잘못 쓰셔 가지고요.” 자라다 만 나무들의 행렬 위로 붉게 빛나는 태양이 떠오른다. 네 시간 후, 물의 기억은 까마득하고 하늘에서는 불타는 원이 용접공의 불꽃처럼 뒷목을 달구고 있다. 길 위에는 피부의 모든 주름과 패인 곳에 먼지를 뒤집어쓴 오디 혼자뿐이다. 면회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여자들이 몇 명 있다. 남자들을, 또는 범죄자들을 잘못 고른 여자들이다. 잡힌 자들. 패자들. 서툰 자들. 사기꾼들. 데지레는 회상에 잠긴다. 데지레는 이미 좋은 남자를 찾는 건 쉽지 않다고, 제일 좋은 남자는 보통 게이 아니면 유부남이거나 허구의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2..

한밤의 도서관 2020.03.12

출근길의 주문

성공한 여성들이 힘들어하는 정도를 넘어 현업을 떠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공격을 너무 많이 받아서." 이 얘기를 하면 남성들은 누구나 공격을 받는다고, 본인도 받는다고 말한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언제나 여자들은 남자들이 당하는 일에 플러스알파로 곤경을 겪는다. 일과 관련된 모든 욕지거리에 더해, 사생활과 여자다움을 빌미로 한 뒷담화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신도 나이를 먹는다. 어느 순간 꼰대가 된다. 나이를 먹는다고 윗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꼰대가 되는 건 숨만 쉬어도 가능한 일이다. 이래라저래라, 나는 이랬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한 말 또 하고, 과거의 승리를 복기하고 또 복기하고. 술을 마시면 더 심해진다.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다 보..

한밤의 도서관 2020.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