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라이프 오어 데스

“자네 이름이 뭔가, 젊은이?” “모스 제러마이어 웹스터인데요.” “이름이 모스가 뭐야?” “그게요, 소장님, 엄마가 제 출생증명서에 모세를 잘못 쓰셔 가지고요.” 자라다 만 나무들의 행렬 위로 붉게 빛나는 태양이 떠오른다. 네 시간 후, 물의 기억은 까마득하고 하늘에서는 불타는 원이 용접공의 불꽃처럼 뒷목을 달구고 있다. 길 위에는 피부의 모든 주름과 패인 곳에 먼지를 뒤집어쓴 오디 혼자뿐이다. 면회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여자들이 몇 명 있다. 남자들을, 또는 범죄자들을 잘못 고른 여자들이다. 잡힌 자들. 패자들. 서툰 자들. 사기꾼들. 데지레는 회상에 잠긴다. 데지레는 이미 좋은 남자를 찾는 건 쉽지 않다고, 제일 좋은 남자는 보통 게이 아니면 유부남이거나 허구의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2..

한밤의 도서관 2020.03.12

출근길의 주문

성공한 여성들이 힘들어하는 정도를 넘어 현업을 떠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공격을 너무 많이 받아서." 이 얘기를 하면 남성들은 누구나 공격을 받는다고, 본인도 받는다고 말한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언제나 여자들은 남자들이 당하는 일에 플러스알파로 곤경을 겪는다. 일과 관련된 모든 욕지거리에 더해, 사생활과 여자다움을 빌미로 한 뒷담화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신도 나이를 먹는다. 어느 순간 꼰대가 된다. 나이를 먹는다고 윗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꼰대가 되는 건 숨만 쉬어도 가능한 일이다. 이래라저래라, 나는 이랬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한 말 또 하고, 과거의 승리를 복기하고 또 복기하고. 술을 마시면 더 심해진다.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다 보..

한밤의 도서관 2020.02.13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한 때 도서관이라고 불렸던 장소 중 일부는 박물관이 되었고 그럴 가치가 없는 곳들은 대부분 전산화되었다. 지금의 도서관은 다른 개념이다. 이곳에 있는 건 책도 논문도, 그 비슷한 자료들도 아니다. 이제 도서관엔 끝없이 늘어섰던 책장 대신 층층이 쌓인 마인드 접속기가 자리하고 있다. 더보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친구가 빌려준 책. 2020년 첫 책이 되었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첫 문장부터 너무 불편해서 거를까 싶었던 단편. 작가가 준비한 세계관으로 들어갈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깊은 대화를 건네는 느낌이었음. [스펙트럼] 요소는 재미있었는데,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할지 몰라 급하게 마무리한 느낌이었다. 일방적인 이야기만 펼쳐놔서 재미가 좀 떨어졌음. [공생 가설] 어떻게든 한국을 ..

한밤의 도서관 2020.02.09

아는 척에 딱 좋은 단위, 원소, 수식

미터 meter 빛이 진공 속에서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이동한 길이. : 미터는 1799년에 태어난 단위이다.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하여 그것의 1/40000만으로 정했다. (6년의 세월이 걸림. 도중에 도둑을 만나는 등 고난을 겪음.) 캐럿 carat 1ct=200mg : 아프리카의 습관이 퍼진 것 보석 무게로 친숙한 단위인 은 로커스트 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콩은 무게가 균질해서 거의 200밀리그램이다. 값비싼 보석의 아주 작은 무게를 재는 아프리카의 습관을 아라비아 상인들이 받아들여서 거래한 방법이 널리 퍼진 것으로 여겨진다. 일 day 1일=86,400초 : 평균을 구해서 결정된다 86,400초, 이것이 하루의 정확한 길이다. 이것은 지구가 1회전하는 시간일까? 아니, 그렇지..

한밤의 도서관 2019.12.29

종이 동물원

"어머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지요?" 사이는 전화기로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어제 일어난 큰 사건이 뭔지 얘기할 수 있나요? 3년 전에 사서 재미있게 읽은 책은 뭔가요? 마지막으로 헤어진 애인하고 사귀기 시작한 때는?" 사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봤지요? 틸리가 없으면 당신은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자신의 삶조차 기억 못 하고, 어머니한테 전화 한 통 못 겁니다. 이제 인류는 사이보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의식을 전자(電子)의 영역으로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아를 두뇌 속으로 다시 욱여넣기가 불가능합니다." -천생연분 中 내가 지금 느끼는 기분이 바로 그거야. 마음이 탁 트인 기분, 만사가 태평한 기분, 어디에든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말이야. 그래, 내 삶은 이..

한밤의 도서관 2019.12.28

디자인FM

“그 많던 여성 디자이너는 어디로 갔을까.” 35세를 전후하여 여성 디자이너가 사라진다는 유구한 괴담이다. 35세 여성 디자이너는 대체로 36세에도 디자인을 하는데, 대체 어디로 사라진다는 것일까? 자신의 죽음을 너무 일찍 예언해버렸다가 약속된 날짜에 상황이 여의치 않자 자결을 택해버린 중세 유럽의 어느 천문학자처럼, 디자인 업계를 둘러싼 많은 사람은 반드시 여성 디자이너를 사라지게 만들어야만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여성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고, 여성 디자이너를 승진에서 제외하고, 작업을 맡은 여성 디자이너 대신 그가 속한 회사와 단체의 이름을 불러준다. 사실 저는 제가 기업에 있어서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기 보다는, 저의 나이와 연차에서 오는 성취감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꾸준히 궁금해..

한밤의 도서관 2019.11.28

빙산이 녹고 있다고?

누구에게나 위기는 닥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나 붕괴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현재에 안주하여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예정된 시점보다 더 빨리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다. 조직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전략을 수립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리더가 필요하다. 또한 뛰어난 문제해결력과 창의력으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아이디어맨도 필요하다. 더불어 경영진과 팀원을 연결하여 조화와 협력을 이끌어내고, 개성이 다양한 구성원들이 인간적인 신뢰를 기반으로 강력한 팀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 중간관리자도 있어야 한다. 지금 직면하고 있거나, 장차 닥쳐올 심각한 위기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미온적인 변화가 지속되면 결국 겉잡을 수 없는 위기..

한밤의 도서관 2019.11.07

로드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目). 남자는 자신이 아무런 근거 없이 희망을 걸고 있음을 알았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더 어두워지고 있다는 걸 잘 알면..

한밤의 도서관 2019.11.03

언제나 여행 중

개성을 만드는 요소란 자란 환경이나 경험이나 유전뿐 아니라 그 시대, 그 장소의 공기이기도 하다. 국경을 지나기 전의 하늘은 분명 핀란드 직원의 미소 띤 얼굴을 닮은 흐린 하늘이었는데, 국경을 지난 뒤의 하늘은 여지없이 러시아 직원처럼 거만하게 흐린 하늘이었다. - 아무래도 모르겠는, 그런 도시___러시아 나고 자란 나라에서 변화를 느끼기는 정말 어렵다. 물론 컴퓨터 보급이나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소통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 등은 체감할 수 있지만, 그건 변화가 아니라 단지 신제품이 등장한 것뿐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어떤 세계관 같은 것이 크게 변하는, 온몸이 뒤흔들리는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히 여행하다가 반해버린 곳에서 생생한 변화를 목격하는 건 정말 행복..

한밤의 도서관 2019.10.29

로스트 케어

현대의 교수형은 기관이 아니라 경동맥을 조이기 때문에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한다. 고통을 맛보기도 전에 뇌로 가는 피가 멈추어 실신하게 된다. 물론 실제로도 그런지는 알 수 없다. 먼저 뇌사 상태에 빠져 뇌의 기능이 정지하고, 따라서 심폐기능도 멈춰 이윽고 완전히 죽는다. 이때 근육이 이완되어 똥오줌을 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어머니는 이제 성장하지 않는다. 앞으로 더 나빠지기나 하지 좋아질 일은 없으리라. 날이 갈수록 더욱 의사소통이 힘들어진다. 요코는 지금까지 막연히 일본이 오래 사는 나라라는 게 좋은 거라고 여겼는데 그건 큰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니, 이렇게 절망적일 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소개한 ..

한밤의 도서관 2019.10.20

선량한 차별주의자

토크니즘tokenism이란 이렇게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시정정책을 말한다. 토크니즘은 차별받는 집단의 극소수만 받아들이고서도 차별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기회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노력하여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은 이상적인 평등의 상황과는 꽤 먼 상태임에도 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여기는 착시를 일으킨다.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견’인 이유가 있다. 일상적으로 누리는 이런 특권은 대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많은 경우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권..

한밤의 도서관 2019.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