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6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여전히 독서 모임은 매번 정원을 채우기가 힘들다. 점점 나아지겠지 하며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지인들을 끌어들이는 다단계 판매 방식과 흡사하다. 책 또한 지인들이 얼마나 많이 사갔던가. 그래서 3개월 동안 월세 안 밀리고 출판사와 독립출판 제작자에게 정산을 다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남은 돈은 아이들에게 용돈을 쥐어줄 정도의 금액뿐이다. 다음 날 출근하면 책방은 텅 비어 보인다. 사방이 책이지만 책은 보이지 않고 빈 공간만 눈에 들어온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골목에는 점점 인적이 뜸해진다. 특히 요즘처럼 폭염이 이어지는 날은 더욱더 그렇다. 책방을 두드리면 텅텅 소리를 낼 것 같다. 책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읽어주는 이들이 있어야 비로소 책은 책으로서 빛난다. 모임으로 인한 피..

한밤의 도서관 2020.07.02

무증거범죄

뭘 하든 돈이 필요했고 월급은 언제나 빠듯했다. 그런 궈위에게 지금 다니는 직장은 무척 소중했다. 야근이 아무리 힘들어도 안정적인 수입이 있다는 건 큰 위안이었다. 이 도시에서 집도 사고 차도 사며 근심없이 살 날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곧 쓴웃음이 나온다. 아무리 안정적인 수입이라도 월급만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세 번째 공통점은 범행 도구인 줄넘기의 양 손 잡이에 범인의 지문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범인은 지문이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대체로 어떤 살인사건이든 경찰이 진실을 밝혀내려면 증인, 물증, 진술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해. 그래서 완전범죄란 일반적으로 증인과 물증, 용의자의 진술이 없는 사건을 뜻하지. 이번 사건에서 증인은 나밖에 없으니 내가 말..

한밤의 도서관 2020.07.01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로. 헨은 늘 음산한 분위기의 책들을 골랐고,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어둡고 징그러운 그림으로 몇몇 대회에서 상까지 탔으니까. 하지만 캠던 대학교 1학년 때 첫 조증이 오면서 과도한 자신감과 심각한 불안감 사이를 미친 듯이 오가게 되었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밤새 강박적으로 1시즌 DVD를 다시 봤다. 나중에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미라는 ⟪시간의 딸⟫을 읽기 시작했고, 매슈는 ⟪동떨어진 거울(A Distant Mirror)⟫를 거의 다 읽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이 세 번째로 읽는 것이리라 . 매슈는 역사물은 다 좋아했지만 특히 중세시대를 다룬 책이 제일 좋았다. ..

한밤의 도서관 2020.06.30

근육에 힘 좀 빼고 삽시다

속이 꽉 찬 소시지를 수건 짜듯이 비틀면 껍질이 순식간에 찢어져 소시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근육을 두드리거나 주무르면 근육을 둘러싼 근막은 찢어지고 근섬유는 파열된다. ‘아프지만 시원한 마사지’의 정체는 근육의 파열인 것이다. 근육이 파열되면 근육 사이의 체액이 빠져나온다. 팽팽했던 근육 내의 압력이 낮아지면 근육이 부드러워져 시원함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빈 곤강이 생긴 근육은 그 기능이 저하된다. 그렇게 되면 펌프 작용이 약해져 혈액 순환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내장에서 발생하는 통증을 포함한 전신 통증의 대부분은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서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마사지나 스트레칭을 해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약해진 몸을 괴롭힌다고 해서 통증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한밤의 도서관 2020.06.29

서점의 온도

유능한 사람을 만난 기쁨, 그 유능한 사람이 내 친구라는 기쁨 그리고 그 유능한 친구가 나와 함께 일한다는 기쁨. 이 세 가지 기쁨의 순위를 정해보라고 한다면 역시 뒤에서부터 앞으로 순위를 매겨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24시간 서점이 밤에 오갈 데 없는 이들의 쉴 곳이 되기를 바란다. 책을 보든 안 보든, 돈을 쓰든 안 쓰든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지 않으면 그들이 이 도시에 머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우리 서점에서 장애인 직원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퍼져, 장애인 몇 명이 찾아와 면접을 보았다. 지금 1200북숍의 모든 지점에서는 청각 장애인 직원이 일하고 있다. 그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내게는 작은 수고에 불과했다. 사실 우리 서점으로서는 별로 희생한 것이 없다. 솔직히 말해..

한밤의 도서관 2020.06.26

B급 며느리

나는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무책임해지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경제적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정을 꾸리는 것에는 한 치의 로망도, 관심도 없었다. 탕웨이와 결혼한 김태용 감독을 보며 ‘언젠가는 나도…’를 읊조린 적은 있다. 그냥 자유롭고 무책임한 그 상태가 좋았다. 여자들은 평생에 걸쳐서 자기 자신을 주변의 상황에 맞추는 것에 익숙해져요.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원하는 옷차림, 말투, 행동을 체화하고 그걸 통해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는 거죠. 결혼하면서도 마찬가지예요. 여자들은 결혼 전의 취미나 생활양식을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개성 없는 아줌마 파마예요. 남편에, 시댁에, 아이들에게 맞춰서 사는 거죠.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자신의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아요. 낚시나 야구 따..

한밤의 도서관 2020.06.25

요리코를 위해

“하지만 당장 써야 할 소설 마감이 코앞이라고요.” “그런 건 개나 줘버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용을 써봐야 아무 소용 없어. 억지로 매수만 늘린다고 좋은 글이 나올 거 같냐?” “인간이란 종종 가까이 이웃한 누군가에게 모든 죄업을 뒤집어씌우곤 합니다. 때론 거기서부터 비극이 태어나죠. 니시무라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진정으로 증오해야 할 적을 잃어버리고 손이 닿는 곳에서 증오의 표적을 정해버린 겁니다. 증오란 결코 이성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남의 괴로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친절한 사람이라도 동정에는 한도가 있기 마련이라고. 니시무라가 내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말로 이해할지 모르겠네요. 아니, 이건 아니다. 근거 없는 상..

한밤의 도서관 2020.06.22

실버 로드

“죽음에는 어딘가 짜증나는 면이 있어요. 내면에서부터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참전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런 경고를 해주지 않았죠. 죽음을 직접 보면 어떻게 되는지, 죽음을 대면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죽음이 날 조종하고, 내 일부가 된다는 걸요.” “그걸 알았다면 참전 안 했을까요?” “제 경험상 잘 웃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더군요.” “무슨 말이죠?” “아무 이유 없이 웃고 미소로 상대를 속이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악하더군요.” “명심하죠.” 과거를 떨쳐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쉬운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나 상대의 추악한 면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아. 불가피한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 하지.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때를 놓..

한밤의 도서관 2020.06.15